소설리스트

기프티드-97화 (98/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4)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밴 운전석에 앉아서 도밍게즈는 담뱃갑을 꺼냈다.

구겨진 담뱃갑 안에는 담배 두 개비만이 남아 있었다.

도밍게즈는 그 중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게 빨아들였다.

공항에 도착한 지 벌써 3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처음 차를 댄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스즈키 일행이 떠나고 바로 걸려온 부관의 전화는 비보를 알렸다.

베르나를 보호하기 위해 딸려 보낸 부하들의 소식이 끊겼고, 확인해 보니 바리오에서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아 전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도밍게즈는 빠르게 집결명령을 내렸다. 부대로의 집결이 아니라, 그와 부하들이 사전에 약속해 놓은 비밀 집결지로의 집결이었다.

부대원들을 한 곳으로 모아 또 다른 외부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또 전우들의 복수를 하기 위한 집결이었다.

그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빠르게 모일 것이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비공식적으로 휴가복귀를 할 것이다. 3시간이 지난 지금, 이미 많은 부하들이 돌아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밍게즈는 아직 공항 출국장 구석의 밴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앉아 한 갑의 담배를 거의 다 태웠다.

스즈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다. 그럼에도 도밍게즈는 그 자리에서 계속 있었다.

도밍게즈가 다시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는데 갑자기 밴의 트렁크가 열렸다.

도밍게즈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룸미러만으로 뒤를 보았다.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캐리어 두 개를 싣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뒷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뒷좌석으로 들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도밍게즈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룸 미러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뒷문이 닫히고, 조수석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조금 흔들거렸다.

“아직 안 갔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담배 피느라.”

도밍게즈가 답했다.

“너무 오래 피는데.”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말했다.

“애연가라서.”

도밍게즈가 담뱃갑을 꺼내 조수석의 앉은 한규호에게 내밀었다.

한규호는 씩 웃으며 도밍게즈가 내민 담뱃갑에 남아있는 마지막 담배를 꺼냈다.

***

공항을 빠져나온 차량은 공항 인터체인지에서 다시 카라카스-라과이라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향이 달랐다. 차량은 카라카스 대신 라과이라 항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푸에르토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조수석에 앉은 한규호가 물었다. “카르텔 놈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체면이지. 그 체면을 위해서라면 조직원 한둘 갈아버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놈들이니까.”

도밍게즈가 전방 도로를 주시하면서 말했다.

“체면? 구역에 대해 말하는 건가?”

한규호가 말했다.

“그래. 주 경계. 카라카스는 연방정부 관할이고, 연방정부 관할과 바르가스 주 관할의 경계가 바로 그 터널이고. 더블 티나 엘 오로고 만약 습격을 하려 했다면 경계 이전에 달려들었을 거야. 마찬가지로 푸에르토가 습격한다면 경계 이후가 될 테고.”

“일리가 있군.”

“습격당한 직후에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 푸에르토 그 개자식 짓일 거라고. 하지만 떠나는 자네에게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는 부분이라 그냥 있었어. 그리고 자네들이 떠나자마자 부하들이 당했다는 전화가 왔고 꼭지가 돌아서 그 자식에게 전화를 했어. 그리고 소리

질렀지. 내 부하를 습격하고 아이를 납치한 것이 너냐고.”

“뭐라고 하던가?”

“자기가 시켰다고 하더군. 열 받아서 죽여 버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생각해보니 정말 그 개자식의 짓일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도로에서의 미친 짓은 그놈 짓이라 하더라도, 카라카스에 가서 더블 티의 영역까지 들어가 난장을 피웠을까 하는 생각이.”

차량은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바다를 왼쪽에 두고 항만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그랬다면서요. 자기가 시켰다고.”

뒷자리에 앉은 앤 챔버가 말했다.

“그 말대로일 수도 있죠. 하지만 전 돈을 걸라면 아닌 쪽에 걸겠습니다.”

도밍게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앤 챔버는 더 빠른 말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항구로 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빨리 베르나를 찾으려면 그.... 바리오로 먼저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앤 챔버의 빠른 말투에서 그녀가 느끼는 조바심이 배어나왔다.

“만약에 맞다면?”

한규호가 말했다.

“네?”

“만약에 푸에르토의 말이 맞는 거라면?”

앤 챔버는 한규호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처리해야지. 이러면 어떻게 하지? 저러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은  지금 아무런 도움이 안 돼.”

한규호의 말에 앤 챔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살짝 기분이 상하려 했던 도밍게즈는 그녀의 솔직한 사과에 마음이 풀렸다. 한편으로 그녀가 느끼는 조바심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나저나 어쩔 생각인가?”

도밍게즈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엘 푸에르토가 본거지로 쓰는 항운노조 본부가 공항에서 고작 4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쪽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도밍게즈는 그의 말에 일단은 그 쪽으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그가 어떻게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총 좀.”

한규호의 말에 도밍게즈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도밍게즈가 말했다. 라과이라 터미널 입구에 있는 항운노조 건물이 엘 푸에르토의 본거지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적어도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무장하고 있을 것이다.

푸에르토가 거기에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스즈키가 설마 그 자살행위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을 달라니?

총. 도밍게즈의 글록. 17발 중 5발을 사용해 12발 밖에 남지 않은 그의 권총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설마.”

“푸에르토라는 놈의 사진 있나?”

“..........”

도밍게즈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몇 시간 전에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새로 사귄 친구는 미친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3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전화를 끊은 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혼자 있는 서재의 공기가 그녀의 호흡에 작게 일렁였다.

완은 손에 든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만이지? 얼마 만에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였는지 생각했다.

마치 백년은 지난 것 같은 그리움과, 어제 보았던 것 같은 친숙함이 혼재되어 전화기 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완은 다시 심호흡을 깊게 했다.

살아있다.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세상이 온통 바뀐 느낌이었다.

또 보자고 했으니, 또 볼 것이다.

규호. 그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는 남자니까.

완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렀다. 트레이시가 집주인을 부를 때 쓰는 버튼을 눌렀다.

안전가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보안이다. 그리고 그 보안이 가장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서재라는 것을 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공간에서 그와 통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통화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식양이라는 단어도 나왔다.

상관없었다. 설사, 그와의 통화에서 미국이 그녀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 비밀들은 완에게 있어서는 무기였고, 그 무기를 이용해 그를 지킬 것이다.

문이 열리고 트레이시가 들어왔다.

“통화가 끝났어요.”

완이 말했다.

“네.”

트레이시가 건조하게 답했다. “안드레는 어디에 있나요?”

트레이시는 의자에 앉지 않고서 물었다.

“안드레는, 쩡 장은 헤베필리아(Hebephilia)를 가지고 있어요.”

그 말에 트레이시의 얼굴에 혐오가 드러났다.

헤베필리아. 사춘기 초기의 아이들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끼는 성도착증.

“당신네 안드레는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컨트롤 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성벽을 노출시키지 않았어요. 당신들도 모를 정도로 아주 잘 숨겼어요. 그는 알고 있었죠.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그런 욕망을 잘 조절해왔어

요.”

트레이시는 말없이 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도 결국 한 번의 실수를 했어요. 그 추잡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네요. 그 한 번의 실수가 있었고, 발각 당했죠. 문제는 그가 상무부 부부장이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실수는 공론화되지 않았어요. 대신 그는 내몽골자치구 어월둬쓰(鄂?多斯市/

????) 인근 MSS 건물 중 하나에 유폐되어 있어요. 평생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거에요.”

“안드레가.... 우리 쪽 사람이라는 것을 중국이 알고 있나요?”

“안드레는 80년대 말에 국비장학생으로 코넬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 미국 정부는 그에게 접근했고, 미국 정부가 접근하자마자 쩡 장은 바로 본국에 보고했어요. 당신네가 어떻게 접근했고,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지원을 했고, 얼마를 줬는지 중국은 전부 다 알고 있었

죠, 그는 단 한순간도 안드레였던 적이 없었어요. 그게 그의 목숨을 살렸고요.”

“..........”

트레이시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잠시 실례해요.”

트레이시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를 하기 위해 문을 나서면서, 저 여자를 절대로 놓아줘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완은 뒤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녀의 가치가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녀의 가치가 올라갈수록 그를, 규호, 그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미소였다.

***

3일차

라과이라 항(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베네수엘라

도밍게즈는 밴을 라과이라 해사세관청(Recinto de la Aduana Maritima de la Guaira) 맞은  편에 세웠다.

항만으로 들어가려는 대형 컨테이너 트레일러 사이에 주차되어 있는 도밍게즈의 밴은 위화감 없이 그 자리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었다.

“미친 소리!”

도밍게즈가 그의 새 친구에게 소리쳤다.

“이렇게 생겼군.”

도밍게즈의 휴대전화를 들고 엘 푸에르토의 사진을 보고 있는 한규호는 도밍게즈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사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도밍게즈는 질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엘 푸에르토의 본거지인 항운노조 건물로 들어가 푸에르토가 있으면 잡아오고, 아니면 개중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놈을 잡아오겠다는 이야기였다.

12발이 들어있는 권총 한 자루를 들고 들어가서.

“고작 12발로 어떻게 하려고!”

도밍게즈가 다시 소리쳤다.

“안에 있는 저 놈들도 총 가지고 있겠지.” 한규호는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안에 있는 조직원들이 총을 가지고 있으면 그걸 쓰면 된다. 안 가지고 있으면? 그럼 그보다 좋을 수 없고.

“저도 같이 갈까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앤 챔버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미친 소리!”

도밍게즈가 다시 소리쳤다.

공항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미치기라도 한 건가? 한규호는 그렇다고 쳐도 앤 챔버, 국무부 인턴이라는 이 아가씨까지 푸에르토 카르텔의 본거지에 들어가는 것을 무슨 동네 산책이라도 갔다 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한규호는 푸에르토의 얼굴을 전부 익혔다.

눈썹의 형태, 눈의 위치, 코와 입의 배치, 턱선 등 몇 가지 특성만 외워두면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푸에르토가 안에 있기만 하다면 찾을 수 있다.

그를 죽이지 않는 것이 쉽지 않아 문제였지, 찾는 것은 이제 문제가 아니다.

“그럼 갔다 올게. 바로 출발하게 시동 끄지 말고 있으라고.”

한규호는 말을 마치면서 차문을 열었다.

갑자기 한규호가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도밍게즈가 죽으러 가는 한규호의 옷을 잡으려 뒤늦게 팔을 뻗었지만 한규호는 이미 차 밖으로 나가버린 후였다.

“저도 같이 갈까요?”

앤 챔버가 다시 물었다.

“아니. 우선은 차에 있어. 내가 혼자 갔다 오는 게 빨라.”

도밍게즈의 시선에, 편의점을 혼자 다녀오겠다는 듯 말하는 한규호와, 혼자 다녀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앤 챔버의 모습이 잡혔다.

“이런 미친!”

도밍게즈는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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