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95화 (96/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2)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한규호의 오른손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갔다.

무형(無形)의 힘.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확인할 수 없는 힘이 물리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규호의 심장 박동수가 증가했다.

심장 박동수가 증가하면서 혈류가 빨라졌고, 혈류가 빨라지면서 혈압이 상승했다. 혈압이 상승하면서 몸 전체에 근긴장이 발생했다.

한규호는 흥분했다. 오랜만에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흥분했다.

가설.

(계속 이 짓을 하다보면 언젠가 그 개자식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그런 말이죠.)

평택지방해양항만청 뒷골목에 있던 간장게장 백반집에서 한규호가 말했던 가설.

그 가설이 현실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기프티드라는 이능보유자들이 있고, 그 사실을 미국이 알고 있다. 그 정보를 모으고 있다. 보유하고 있다.

한규호는 자신의 목표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개자식과의 거리도.

“.... 구해주세요.”

앤 챔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정신을 돌리고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구해줘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앤 챔버가 다시 말했다.

그러나 한규호에게는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기프티드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미국 마이애미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이제 탑승 시작하겠습니다. 탑승하실 승객께서는 게이트 55번, 게이트 55번에서 탑승을 준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비즈니스 클래스와 우선 탑승 자격이

있는 승객부터 탑승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미국 마이애미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한규호와 앤 챔버, 두 사람이 탈 비행기의 탑승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프티드.

지금 한규호에게 중요한 것은 기프티드라는 정보였다.

미국이 그 개자식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어디에 있는지 확인이 되면 당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그 개자식의 목을 따버리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가장 최우선 과제였다.

베르나.

그 불쌍한 아이를 구출하는 것보다 당장 그 개자식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우선순위에서 앞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개자식을 찾는 것보다 우선순위에서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규호의 머릿속에는 빨리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미국이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개자식만 찾을 수 있다면 미국이 원하는 어떠한 조건이든 다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규호는 오직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 있으니까.

***

3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통화하고 싶어요. 그와.”

“안 돼요.”

트레이시는 그와 통화하고 싶다는 말을 바로 거절했다.

즉답이었다.

“약속과는 다른데요?”

완이 말했다.

“약속은 서로 질문 하나씩에 답을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당신이 MSS라는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쩡 장.”

완이 이름 하나를 말했다.

“네?”

트레이시가 반문했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쩡 장(曾 江). 당신들 코드명으로는 안드레(Andre).”

트레이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쩡 장? 안드레?

“들어본 적 없다는 표정이네요. 확인해 보세요. 전화를 걸어 안드레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해보세요.”

완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호출 버튼을 눌러 이 집의 주인인 노인을 불렀다.

잠시 후 전직 법대교수 노인이 지하 서재로 들어왔다.

트레이시가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난 후 노인이 다시 들어와 트레이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귓속말을 들은 트레이시의 눈이 흔들렸다.

완은 두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레이시의 눈에 놀라움이 퍼져나가는 것도 보았다.

완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노인이 다시 나가고 서재에는 완과 트레이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안드레. 그는 어디에 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CIA 코드명 안드레, 중국 국무원 산하 상무부(商?部) 쩡 장 부부장(副部長), 그리고, 미국이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워낸 친미(親美) 인사.

오랜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은 서로의 행정부에 수많은 스파이를 심었고, 자신에게 심어진 스파이를 확보해 이중간첩으로 전향시켰다. 전향된 이중간첩은 또 다시 전향해 삼중간첩이 되기도 했다. 007을 소재로 한 영화의 인기가 사그라진 것처럼, 냉전이 끝나가면서 스파이는 도구로써의 매력을 상실해갔다. 위험부담이 컸고, 비용대비 효과는 적었다. 무엇보다 발각되어 처리당하는 요원들의 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미국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할 때부터 인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성장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 내에 미국에 이익을 위해 일 할 사람을 심어두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스파이가 아닌, 학생 때부터 만들어진 친미(親美)인사 육성 계획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자 중 한 명이 80년대 말에 미국에 국비 유학을 왔던 쩡 장 이었다. 칭화대 출신인 쩡 장은 미국의 계획과 지원에 의해 키워졌고, 중국 상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성장했다.

미국은 쩡 장에게 단 한 번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미국이 쩡 장에게 원하는 것은 그가 상무부 부장(장관)이 되고, 중국의 대외무역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입김을 은밀하게 불어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고 원대한 계획의 끝이 눈앞에 있었다. 다음 대 상무부 부장 겸 국무원 상무회의 임원이 확실시되던 그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 미국은 당황했다. 중국이 알아챘는지, 알아챘다면 어디에서 정보가 샜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 그의 행방을 알기 위해 수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었지만 허사였다.

그런 그의 이름을 눈앞의 이 여자가, MSS의 요원이었다고 주장하는 신원 미상의 이 여자가  언급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다.

“세 번째 질문이네요.”

완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말없이 눈앞의 여자를 보았다. 저 여자는 안드레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두 가지를 얻어냈다. 그녀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한규호를 차치하더라도 그녀 자신만으로 중요 인물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협상에서 트레이시는 완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와의 통화는...... 내 권한 밖의 일이에요.”

거짓말이었다.

트레이시에겐 권한이 있었다. 오직 단 한 사람, 네일 밀러 CIA 국장에게만 책임을 지고, 대부분의 사항에 면책 특권이 있었다.

“그럼 권한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완이 대답했다.

트레이시는 완을 노려보았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인 CIA 요원에게 굴욕감을 안겨 준 전직 MSS 요원을 노려보았다.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

앤 챔버가 뭐라고 말했다.

한규호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메스티소 혈통의 미국인 아가씨에게로 맞춰졌다.

침착하자.

한규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의도적으로 심장박동수를 낮추고, 혈류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혈압이 내려갔고 근긴장이 해소되었다.

“당신은 베르나를 구할 수 있어요.”

“구할 수 있다 쳐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당신은 베르나를 구하고 싶으니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

한규호는 바로 부정했다.

베르나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 그의 목표. 짙은 안개 뒤에 숨어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라 고통스러운 그 존재의 실마리가 안개 너머로 어렴풋이 그 형태를 드러냈다. 백 번을 물어도 그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베르나가 아니었다.

베르나.

110cm는 넘었을지 의심스러운 7살 소녀.

기자의 손을 잡고 들어와 잔뜩 긴장된 얼굴로 눈치를 살피던 소녀.

어디에 산다고 했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서부 바리오 중 한 곳에 살며 지역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닌다고 말했던 소녀.

엄마에게 버림받고, 양부에게 상품으로 양육당하는 소녀.

그가 건네준 초코바를 두 손으로 들고 오물오물 먹던 소녀.

오물오물 먹던 소녀.

차분하게 생각하자.

한규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베르나를 구할 수 있을까?

구할 수 있다.

베르나가 살아있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한 개 사단이 그녀를 지키고 있어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구출해 낼 수 있다.

베르나를 구하고 싶은가?

한규호는 그 질문에 선뜻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기프티드, 베르나, 기프티드, 베르나, 기프티드, 베르나.

“아니. 그렇지 않아.”

한규호는 다시 부정했다.

자신이 베르나를 구하고 싶어 한다는 앤 챔버의 말을 다시 부정했다.

부정하는 그의 눈을 앤 챔버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이에요.’

앤 챔버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한규호가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베르나를, 그 작은 아이를 구하고 싶어요.’

앤 챔버의 눈이 다시 말했다.

“아니......”

한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베르나.

한규호의 의식에 다시 그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한규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식이 초코바를 들고 오물오물 먹는 그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는 겁에 질려 있었다.

까레라라는 개자식의 손을 잡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이끌려 들어 왔었다.

그나마 있는 깨끗한 옷.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입고, 아침도 먹지 못한 채로 그를 이용하려는 더러운 손에 의지해 인터뷰 장소로 끌려왔다. 한규호 그 자신이 초코바를 건넸을 때 움찔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르는 동양인 성인 남성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아니 회피 자세를 취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코바를 눈높이에 맞추고, 껍질을 천천히 벗길 때, 초코바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던 시선이 떠올랐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초코바를 향하던 베르나의 눈빛이 떠올랐다.

초코바를 들고 오물오물 먹는 그 모습이 떠올랐다.

오물오물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새의 뒷다리를 들고 오물오물 먹던 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러운 옷을 입고, 두 뺨 위로 눈물자국을 그린 채로, 한규호가 잡아 온 작은 새의 뒷다리를 들고 오물오물 먹던 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갑자기 왜 그 모습이 떠오른 것일까?

갑자기. 갑자기 왜.

이제는 더 이상 상관없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일까?

“베르나를 구해줘요. 그래 준다면....”

앤 챔버가 다시 한규호에게 말했다.

그 소리에 한규호의 의식이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게요.”

“무슨 말이지?”

“미국이 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어요. 당신이 기프티드가 아니라고 하라면 그렇게 말하겠어요. 기프티드와 관련해 제가 아는 것도 전부 알려줄게요.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빼내 보도록 할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할게요. 그러니.....”

한규호는 앤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간절함이 가득했다.

앤도 한규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베르나를 바라볼 때 보였던 자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갈등으로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베르나를... 구해줘요. 그 아이를 구해주세요.”

그 순간 한규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전화기가 진동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 CIA에서 지급받은 전화기가 처음으로 울린 것이다.

이 전화가 걸려올 곳은 한 곳 뿐이었다.

CIA.

한규호가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곳. 그 곳 뿐이었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한규호의 손은 주머니 속 전화로 향했다.

“여보세요.”

한규호는 앤 챔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전화기를 받았다.

(왜 그랬어요?)

“........뭐?” (그때 왜 그랬어요? 왜 마지막에 말할 기회를 안 줬어요?)

“뭐라고?”

(왜 그때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언제 이야기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완?”

(네. 저에요.)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