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1) >
3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체스터필드에 위치한 CIA 안전가옥 지하 서재에는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전날 자세가 불편하다고 느꼈기에 오늘은 바지 정장을 입고 온 트레이시는 조금은 편한 자세로 높이가 낮은 빈백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트레이시는 편해진 자세와는 달리 더 불편해진 마음으로 눈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미스 제인 도우.
기프티드로 의심되는 한규호가 CIA에게 의탁하고, CIA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한규호에 대한 정보 제공은 거부한 여자.
트레이시는 어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
요.)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트레이시는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CIA는, 밀러 국장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어젯밤 트레이시의 숙소에서 진행된 화상 회의에서 신시아 챔버, CIA소속 기프티드 담당요원 은 그저 ‘어머’ 소리만을 연발했다. ‘청춘이네’ 라든가, ‘보고 싶네. 여자 입에서 그런 말을 나오게 할 수 있는 남자는 위험해’ 같이 마치 드라마에 빠져 있는 일반적인 가정주
부들이 할 법한 말들만을.
반면에 밀러 국장은 그녀가 협상테이블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협상 스킬의 일환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트레이시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눈앞의 이 여자가 더 원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더 많은 지원금? 더 좋은 직장?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사람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트레이시는 알 수 있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나 보네요.”
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트레이시의 찻잔은 처음 받은 그 상태로 변함이 없었다.
“차는 즐기지 않아서요. 고구마 향이 나는 차는 처음이네요.”
반면에 완에게는 익숙한 차였다.
완의 고향인 운남성에서 생산되는 전홍(?紅;Dianhong) 품종은 특이한 고구마 향과 맛으로 유명했다. 물론 완은 어릴 때 그곳을 떠나 전홍차, 일명 윈난 차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MSS 교육을 받을 때 차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고향의 차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오랜만에 마시게 된 전홍차는 그녀의 감정에 미묘하고 그리운 울림을 주었다.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요?”
트레이시는 그녀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민망함을 참으며, 주제를 돌렸다.
“네. 죄송하지만.”
완이 말했다. 단호하게.
“그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어떻게 만났죠?”
“죄송합니다.” “무슨 대화를 나눴죠?”
완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왜 당신을 구했죠?”
그 말에 찻잔을 들던 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완의 물 흐르듯 유려하고 자연스럽던 움직임의 흐름이 잠깐 멈췄다.
잠시 멈추었던 하얗고 긴 손이 금세 다시 움직여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찻잔엔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온기가 사라질 것이다. 온기가 사라지면 향기도 사라지고, 향기가 사라지면 풍미가 줄어든다.
완은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그를 떠올렸다.
그는 왜 나를 구했을까? 구해달라고 해서? 식양을 찾아내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불쌍해서?
찻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지만 잔향은 아직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궁금했다.
그는 왜 자신을 구했을까?
궁금했다. 왜 아무런 이유 없이 그 고생을 해가면서 자신를 구했을까?
식양이라는 것도, 북한의 비자금이 세탁 과정에서 분리운동세력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사실도 완 스스로 말했다.
그는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데 모든 전력을 다했을 뿐, 그가 원하는 것을 묻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완이, 그녀 스스로가 그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그녀가 식양임을, 그녀가 완이 아닌 샤오메이 임을 털어놓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런 방법도 있다.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이고, 그 호의를 바탕으로 경계를 무너트려서 정보를 캐내는 방법도 있다.
보통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사용하는 미인계.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방법이다.
완은 규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못생긴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는, 결코 미남계를 쓸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항상 무표정하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규호의 얼굴을 떠올리자 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트레이시는 제인도우가 갑자기 풋 하고 웃자 기분이 나빠졌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당신을 구했죠?”
트레이시가 완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질문을 다시 던졌다.
완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화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라는 것도 느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렇게 느꼈다.
“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나요?”
완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트레이시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밀었다.
나를 더 격양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밀러 국장의 말대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심리적인 협상의 기술일까.
그래서 짐짓 여유를 보이고, 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미소를 띠고, 웃고, 지금처럼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일까.
제인 도우는 CIA의 공식 심문 매뉴얼에 따라 다룰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트레이시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그녀에게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트레이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녹록치 않은 여자다.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화내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침착하게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제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물어보기만 하네요.”
트레이시도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고구마 향이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트레이시의 취향은 아니었다.
“이렇게 서로의 질문만 반복하면 계속 같은 방향으로 평행선만 긋겠네요. 서로 하나씩 질문하고 하나씩 대답하기로 할까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완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당분간은 계속 ‘보호’ 받게 될 거에요. 하지만 여기는 아니에요. 새로운 거처로 이동하게 될 거에요. 미리 말해주자면 감옥은 아니에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어젯밤 진행된 화상회의에서 이 정체불명의 제인도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결정됐다.
그녀는 시애틀 인근 머다이나(Medina) 신시아 챔버의 저택에 머물기로 결정됐다.
트레이시도, 밀러 국장도 그녀를 놓아주면 안 된다는 것에는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한규호와의 유일한 연결선인 그녀를 놓아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국장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긴 했지만, 트레이시는 그녀가 어딘가의 요원이거나, 적어도 요원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즉 그녀 자신만으로도 CIA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이 트레이시의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지금의 안전가옥에서 머다이나의 챔버가로 옮겨 보호 겸 감시를 할 생각이었다.
아직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녀, 제인 도우는 오늘 저녁에 트레이시의 전용기를 타고 함께 시애틀로 떠날 예정이었다.
“자. 이번에는 당신이 답할 차례에요. 그는 왜 당신을 구했죠?”
완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차가 많이 식어서인지 이제 은은히 풍겨나오던 고구마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씩 묻고 답하자는 트레이시의 제안에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차를 마신 완이 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제가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요?”
“네. 제가 탈출할 수 있도록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완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어이가 없었다.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
그리고 그가 그녀를 구출해 줬다고?
CIA가 파악하기로 그들는 적어도 미얀마를 관통해왔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을 이루는 히말라야 산맥의 지류를 넘어서 말이다. 그것도 총까지 맞은 채로!
그런데 그 이유가 그저 데려가 달라는 이유였다고?
그 뿐이었다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미스 제인 도우.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조금 더 자세히...”
완이 트레이시의 말을 끊었다.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를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를 이용해 도망칠 생각이었어요.”
“어느 조직에서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두 번째 질문이네요.”
완이 웃으며 말했다.
“MSS.”
“중국 국가 안전부(Ministry of State Security : MSS)!”
트레이시가 자신도 모르게 조금 크게 말했다.
가능성은 검토해 보았지만 MSS의 요원이라고 스스로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너무도 쉽게 나온 대답에 트레이시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건 무슨 협상 기술이지?
“그 말이 사실인가요? 증명할 수 있나요?”
트레이시의 질문에 완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제는 완전히 온기를 잃은 찻물이 그녀의 입술을 적셨다.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붉은색의 입술을 찻물이 촉촉이 감싸 안았다.
“질문은 하나씩 아니었나요?”
완이 말했다.
“전 두 개의 질문에 답했어요. 이제는 요원님 차례에요.”
트레이시는 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가 할 질문은 무엇일까? 원하는 답은 무엇일까?
완은 트레이시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통화하고 싶어요. 그와.”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저의 모든 조건을 전부 다 털어놓으면 믿어 주겠어요? 어떻게 능력을 얻었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해야 능력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능력을 잃게 되는지 당신에게 전부 다 털어놓으면, 그러면 베르나를 구해줄 수 있나요?”
앤 챔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한규호에게 있어서 그 내용은 전혀 차분하게 듣고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카라카스의 관문공항 출국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이곳에서 말하고 들을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을 한 앤 챔버, 듣고 있는 한규호 둘 다, 주위에서 누가 듣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쓸 수 없었다.
앤 챔버는 베르나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카드를 다 꺼내 내려놓았다.
스즈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줄다리기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베르나에게 보여준 태도,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긴장하는 베르나의 처지를 고려할 수 있는 여유, 초코바를 건네주고, 아고스토의 잔인한 질문에서 그녀를 보호해준 스즈키라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서, 미국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베르나를 포기할까봐, 그럴까봐 앤 챔버는 자신이 가진 패를 모두 다 내려놓았다.
한규호는 말없이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기프티드라고 부른다고? 기프티드라.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한규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이었다.
몇 주 전 한규호는 미얀마의 한 작은 도시에서 불가능한 저격을 가능케 한 남자를 만났다. 800m 밖에서 야간에 스코프도 없이 저격을 시행한 애꾸눈의 남자를.
한규호는 그도 자신과 같은 이능을 가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명은 확실히 알고 있다.
백금산.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눈보라가 치던 백금산에서 만난 그 개자식. 그 개자식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애꾸눈을 만났다. 그 애꾸눈은 불가능한 저격을 해냈다.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편마암 장석으로 만든 칼을 그의 옆구리에 찔러 넣어, 그의 생명을 빼앗은 자가 한규호 자신이었으니까.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혀 상상도 못한 장소에서, 상상도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능력자, 기프티드라고 말했다.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증명할 수 있나?”
한규호가 앤 챔버를 보면서 말했다.
발현조건, 유지조건, 제한조건.
모두가 사실이다. 한규호가 직접 체험한, 능력자 즉 기프티드만이 알 수 있는 그것.
“보여 드리죠.”
앤 챔버가 한규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한규호의 오른손이 한규호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내부의 힘, 뇌에서 내리는 신경명령에 의한 내부의 작용이 아니라, 외부의 알 수 없는 물리력이 한규호의 손을 천천히 끌어올리고 있었다.
“염동력(psychokinesis)?”
한규호가 짧게 외쳤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