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92화 (93/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9) >

3일차

라과이라 항(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주(州), 베네수엘라

“어이. 형제.”

푸에르토는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들리길 바라면서 더블 티의 전화를 받았다.

(엘 오로인가?)

전화 너머로 더블 티가 인사도 없이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야? 나 푸에르토라고. 전화를 잘못 건 거 아닌가 형제?”

(엘 오로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나?)

“.......... 무슨 말이지 형제?”

(고속도로에서의 그 병신 같은 습격. 엘 오로가 시켰냐는 말이지. 무식한 줄은 알았지만 멍청하진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오판이었군.)

푸에르토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미국 유학파 출신 엘 오로와, 카라카스 중앙 자치대학을 나온 더블 티에 비해 가방끈이 짧은 푸에르토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무식하다와 멍청하다였다.

“말조심하지 형제.”

(멍청하다는 말에 화내는 것을 보니, 스스로가 멍청한 것은 알고 있나 보군. 좋은 자세야. 멍청한 것을 알아야 덜 멍청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지.)

“이 새끼가!”

푸에르토가 결국 화를 터트렸다.

삼두사를 결성하기 이전에, 주 경계에서 서로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총질을 하던 시기에는 서로에게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었다. 삼두사를 결성하고 나서는 최대한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말을 피하게 됐지만.

(말하는 꼴을 보니 아직 소식도 못 들었나보군. 멍청한데다가 정보도 늦고. 좋아. 형제인 내가 친히 알려주지.)

푸에르토는 침착한 더블 티의 목소리에서 더러운 기분을 느꼈다. 보통 이런 기분이 들면 좋지 않은 소식이 따라왔다.

(엘 오로가 무식한 너의 옆구릴 쑤셔서 돌아가는 놈들을 혼 좀 내주라고 부추겼고, 멍청한 네 놈은 좋다고 애들에게 덮치라고 지시했겠지. 아주 멍청한 행동이지만 거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칭찬해주지. 유일하게 현명한 판단이었다.)

“뭔 개소리야!”

(너의 멍청한 개들은 다 죽었다.)

“죽었다니?”

(역시 모르는군. 하긴 다 죽었으니 누구 하나 전화해서 우린 다 죽었습니다 할 놈이 있을 수가 없지.)

“뭔 개소리냐고!”

푸에르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도밍게즈가 같이 있는걸 알면서도 그 얼치기 짓을 한 건가? 용기가 대단하군,)

“도밍게즈? 방위군이라면 철수.....”

푸에르토는 아차 싶었다.

자신이 습격을 지시했다고 자백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밴을 운전한 게 도밍게즈였다. 엘 오로가 그건 알려주지 않았나 보군.) “씨발. 자꾸 말 뱅뱅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 죽었다니. 그게 뭔 개소리야.”

(알았어. 알았어. 말해주지. 멍청한데 성격은 급하고....)

“티노 토르. 마지막이다.”

푸에르토가 더블 티의 본명을 입에 올렸다.

(다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경고한다.)

두 사람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의 침묵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더블 티였다.

(돌아가는 손님들에게 이별의 아쉬움을 전하는 편지를 전달하려 부하들을 보냈다. 그리고 내 기사들이 죽음의 검은 길에서 혀를 내밀고 죽어 나자빠져 있는 너의 개들을 발견했지.)

“발견...... 했다고?”

(밴 3대, 그 중 한 대는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에서 불타고 있었고, 두 대는 서로 엉켜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멈춰 있었다는군. 용맹하고 멍청한 네 부하들은 당연히 안전벨트 따위는 하지 않았고, 차에서 튕겨나간 시체들이 도로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네 멍청한

친척동생 살비아노 헤레라도 거기 있던데. 얼굴 한쪽이 콘크리트에 갈리면서 삼분의 일이 날아갔어. 사진도 찍어왔던데 금방 보내주도록 하지.)

푸에르토는 충격을 받았다.

밴 3대, 살비아노.

더블 티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 알 수 없어야 하는 내용이다.

“...... 살비아노가?.....”

(엘 오로가 꼬드겼나? 그들을 습격하라고? 방위군이 철수했을 테니, 내가 하려는 일을 네가 처리하고 세 개의 머리 중에서 첫 번째 머리가 되라고 시켰나?)

“대답해 씨발! 살비아노가 죽었다고?”

(닥치고 들어! 네 놈의 쓰레기 같은 동생 놈은 이미 뒈져버렸으니까 관심 따윈 끄고!)

더블 티가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엘 오로가 시켰냐!! 더블 티는 못한 일을 푸에르토가 해내고, 삼두사의 정점에 서라고 시켰느냔 말이다. 이 멍청한 자식아!)

“.........”

(삼두사, 그런 유치한 이름을 지은 것도 너였지. 그 유치한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도 이제 끝이다. 엘 오로 그 뱀 같은 놈이 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전화를 한 이유는 엘 오로에게 더 이상 놀아나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기 위해서다. 우리 둘이

서로 죽이려고 총을 겨누고 있을 때, 팝콘을 쳐 먹으며 웃고 있을 엘 오로에게 놀아나지 말라고 전화 한 거다. 넌 멍청해서 거기에 100% 놀아날 것이 확실하니.)

“다시 전쟁을 시작하자는 거냐?”

푸에르르토가 낮게 말했다.

(멍청한 놈. 전쟁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푸에르토는 전화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책상 위에 힘껏 내리쳤다.

꽝 소리와 함께 전화기 액정 한쪽 모서리에서 시작된 금이 전화기 전체로 검은 하늘에 번개가 치듯 퍼져 나갔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움찔거렸다.

“확인해 봐.”

한 손에 금이 간 전화기를 움켜잡고 푸에르토가 말했다.

“네....네?”

부하가 되물었다. 확인하라고? 뭘 확인하라는 이야기지?

푸에르토는 책상 위에 있던 키보드를 들어 부하에게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가서 살비아노가 무사한지 보고 오라고 이 병신아!”

유선으로 연결된 키보드는 부하에게 맞지 않았다. 대신 책상위에 있던 본체를 쓰러트린 후 바닥에 강하게 떨어졌을 뿐.

그러나 부하는 그 키보드에 맞은 것처럼 빠르게 사무실에서 몸을 빼냈다. 주저하다가 키보드 대신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실제로 문 밖으로 뛰어 나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푸에르토는 누군가를 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쏴 죽이든, 패 죽이든, 누군가를 죽여 버려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때 푸에르토에 손에 들린 전화기가 진동했다. 강하게 책상을 내려쳤음에도 그의 전화기는 아직 살아 있었다.

푸에르토는 전화기를 들어 액정을 보았다. 자글자글 금이 가 있는 액정에 처음 보는 전화번호가 떠있었다.

푸에르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푸에르토. 네 놈 짓이냐?)

전화기 너머로 다짜고짜 들려오는 너의 짓이냐는 질문에 푸에르토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누구냐.”

(푸에르토 네가 한 짓이냐고!)

전화기 너머의 정체불명의 남자가 소리쳤다.

“넌 또 뭐야. 이 개자식아!”

푸에르토도 마주 소리쳤다.

그가 푸에르토임을 알면서도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적어도 일반인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가 일반인이건 아니건 누구든 간에 상관없다. 찾아서 죽여 버릴 테니까.

(도밍게즈다. 이 개자식아!)

푸에르토는 그 말에 잠시 생각했다.

도밍게즈? 도밍게즈가 누구지? 자신에게 소리 지르고 욕할 수 있는 도밍게즈가 누가 있었지?

곧 그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도밍게즈 소령. 제 5방위군의 도밍게즈.

“방위군의 도밍게즈.”

(그래 나다. 네 놈이 한 짓이냐?)

잔뜩 화가 난 푸에르토는 방위군의 도밍게즈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넌 또 뭔 개소리야! 뭐 씨발 개소리를 짖고 있는 거야?”

푸에르토가 전화기가 부서져라 소리쳤다.

(내 부하들을 살해하고, 아이를 납치한 것이 네 놈 짓이냐고!!!)

도밍게즈의 목소리가 그보다 더 크게 전화기를 뚫고 나왔다.

푸에르토는 고막을 찢을 듯한 데시벨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도 한편으로 의아했다.

아이? 무슨 아이를 말하는 거지?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을 통해 마이애미로 떠나시는 루시아 그레이스 승객. 루시아 그레이스 승객께서는 중앙에 위치한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공항 출국장에 울리는 안내방송 소리에 한규호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갑작스럽게 들린 자신을 찾는 안내 방송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한규호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다시 그레이스 박사에게 향했다.

“가 봅시다.”

한규호가 말하자 그레이스 박사는 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한규호를 돌아보았다.

한규호는 짜증이 났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이 짜증났다.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저 여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아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었다.

그 아이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용하려 했던 사실을 다시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참아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앞으로 평생 이 여자를 볼 일은 없으니.

“가 봅시다.”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그제야 그레이스는 아고스토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게이트에서 안내 데스크까지는 약 3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 길을 그레이스는 아고스토와 앤 챔버에게 부축을 받으며 혼자 걸을 수 없는 노인처럼 힘없이 걸어갔다.

인터뷰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눈을 치켜뜨면서 대들던 몇 시간 전의 그레이스와는 딴 사람 같았다.

“그레이스 박사님입니다. 찾으셨다고요.”

안내 데스크에 다가간 뒤 그레이스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앤 챔버가 물었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웃으면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잊으신 물건이라며 전해 왔습니다.”

안내 직원이 데스크 위에 올려놓은 것은 얇은 서류 봉투 하나였다.

봉투를 본 앤 챔버가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앤 챔버의 시선을 받은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은 결코 잃어버린 물건이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서류 봉투 상단에는 카라카스 중앙 자치대학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누가 전달했습니까?”

뒤에 서 있던 한규호가 물었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내 직원이 여전히 직업적 미소를 얼굴 가득 띠고 말했다.

“내가 먼저 봅시다.”

한규호가 한발 앞으로 나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한규호는 봉투를 손에 들고 감각을 집중했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서류 봉투 안으로 얇은 엽서 크기의 종이 질감이 느껴졌다.

한규호는 조심스럽게 봉투 모서리를 뜯었다. 새끼손톱크기만큼 뜯어낸 다음 봉투 안의 공기를 느꼈다.

사람을 해할 수 있는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았다. 탄저병 균이라든가.

한규호는 안전하다는 확신을 하고 봉투의 위를 확실하게 뜯어 낸 다음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념 엽서크기의 종이로 보이는 것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내가 먼저 보겠습니다.”

이것은 그레이스에게 온 것이고, 한규호가 내용물을 살펴보려면 그녀의 허가가 필요했다.

미국의 우편물관련법은 엄격하다.

한규호는 그레이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아고스토와 앤 챔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진이었다.

한규호는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낸 후 남들은 볼 수 없도록 자신만 보았다.

사진을 본 한규호의 표정이 굳었다.

앤 챔버는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3일에 불과하지만 한규호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앤 챔버는 불안해졌다.

“뭔......가요?”

앤 챔버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 있는 한규호에게 물었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 사진을 앤 챔버에게 건넸다.

사진을 받는 앤 챔버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사진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한규호가 건네준 사진에는 백열등이 켜진 어두운 방에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누군가의 잘린 머리를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베르나의 모습이 인화되어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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