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8) >
3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탑승 게이트 바로 앞 벤치에 앉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항공사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캐리어를 부치고, 보안검사와 출국심사를 마친 후 탑승장에 들어오고 나니 이제야 안전하다는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공항으로 오는 도중 갑자기 엎드리라는 스즈키의 말을 듣고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차 바닥에 엎드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어야만 했다. 날아온 총알이 차량을 뚫고 그녀의 몸에 박힐까 두려움에 떨면서 수십 번도 더 기도를 드렸다.
이번 한 번만 살려달라고. 남미의 여성인권이고 뭐고, 더 이상 욕심도 부리지 않고,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살겠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처음 겪는 공포 속에서 공항에 도착했고, 어떻게 여기까지 온 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여 드디어 탑승게이트 앞까지 온 것이다.
그레이스는 탑승권에 인쇄된 게이트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권을 가진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탑승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비행기에 탑승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그레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레이스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자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제복을 입은 항공사 여직원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레이스는 겁에 질린 눈으로 몸을 뒤로 뺐다.
누구지?
또 나를 노리고 온 자일까?
항공사 직원의 옷까지 구해 입고 나를 해치려고 온 것일까?
“저리가!!”
그레이스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고음역의 비명이 높은 천장에 반사되어 조용하던 탑승장에 울렸다.
출국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레이스를 향했지만 그레이스는 그런 사실도 모르는 듯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넌 누구야! 누구! 저리 꺼져! 아고스토! 스즈키! 어디 있어!!”
그레이스의 외침에 놀란 항공사 직원이 당황하며 한발자국 물러났다.
비행기를 타는 것에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러 왔다가, 또는 탑승했다가, 아주 가끔씩은 이륙 후에 공황발작을 일으키곤 했었다. 탑승 전에 징후를 발견하게 되면 탑승을 포기시키는 것으로 간단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물론 짐을 빼는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이 가장 간
단한 절차였다.
일단 비행기 안에 탑승한 후 발작을 일으키게 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모든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비행기 내부에 대한 보안검사를 시행해야 했다. 9/11 이후 생긴 철저한 보안검사지침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은 이륙 후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승객의 사망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기장이 착륙을 결정하고 긴급 상황을 선언하면, 착륙시의 위험 때문에 항공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항공유를 버리고, 재착륙 절차에 돌입해야했다.
항공사 직원들은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탑승 전 승객들을 유심히 살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에, 벤치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초초해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MP5K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공항경비요원이 소란을 감지하고 다가와 물었다.
그레이스의 눈에 경비대원이 들고 있는 총이 들어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스즈키이이이이!”
***
화장실에서 막 나온 한규호는 그레이스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규호는 곧 그레이스 앞에서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항공사 여직원을 발견했다.
한규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높아져 있는 그레이스가 아마 무언가 사달을 일으킨 것이라고.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은 위험해도 한규호는 상관 없었다.
한규호는 신경 쓰지 않고 라운지로 돌아가 뭘 좀 먹어두자고 생각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는 게 그의 철칙이니까.
그때 날카로운 고음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그레이스가 찢어지는 소리로 스즈키를 부르고 있었다.
한규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날뛰도록 내버려 두고 싶은데, 저렇게 자신의 이름을 계속 불러대면 곤란하다.
재워버릴까?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가서 이문혈에 내기를 잔뜩 집어넣어, 한 일주일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재워버릴까 하는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하던 한규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레이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죠?”
어디선가 나타난 앤 챔버가 한규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모르겠소.”
한규호는 거짓말을 했다.
설명하자니 귀찮았다. 비행기만 타면 되는데, 그 짧은 시간을 못 버티고 일이 생기는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슨 일입니까?”
한규호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레이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스즈키만을 외치고 있었다.
“누굽니까? 함부로 다가오지 마시오.”
공항 경비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 눈빛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 스즈키요.”
한규호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불안해 보여서 제가 말을 걸었더니 이분께서 갑자기 막 소리를 지르시고...”
항공사 여직원이 한규호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저 미친 여자가 애타게 목 놓아 외치고 있는 스즈키, 이자가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레이스에게 귓속말을 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앤 챔버는 그가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앤 챔버가 보기에도 그레이스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박사님. 스즈킵니다.” 한규호가 그레이스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계속 소리를 지르던 그레이스는 스즈키의 목소리가 들리자 비명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스즈키를 바라보았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고개를 뒤로 빼서 엉망이 된 박사의 얼굴에서 거리를 두었다.
“박사님. 진정하지 않으시면.”
한규호가 박사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레이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탑승을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탑승거부를 당한다 해도, 저희는 박사님을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한규호가 조용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정신이 들었다.
탑승을 거부당한다. 그리고 혼자 남는다. 이 지옥 같은 곳에.
“그러니 진정하시길.”
한규호는 여기까지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항공사 직원과 경비 대원에게 말했다.
“다 끝났습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항공사 직원은 몇 마디 듣지도 않았는데 바로 발작을 멈추는 그레이스 박사를 보고는 황당함을 느꼈다.
“그....녀의 공황발작이...”
“발작이 아닙니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한규호가 말을 잘랐다.
앤 챔버가 그레이스를 부축해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발작이 아닙니다. 비행 공포증도 없습니다. 비행기에 탈 수 있습니다.”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항공사 여직원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한규호의 눈을 보고 입을 닫았다.
그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럴 것 같았다.
“보호자신가요?”
공항 직원이 확인차 한규호에게 물었다.
“전 관계자입니다. 보호자분을 모셔오는 게 좋겠군요.”
항공사 여직원은 한규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에 미스터 아고스토가 계실 겁니다. 그를 불러 주시죠,”
한규호가 말했다.
***
그레이스는 많이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비즈니스 라운지에서 음식을 잔뜩 퍼 놓고 베네수엘라에서 마지막 만찬을 즐기려다 갑작스럽게 호출되어 온 아고스토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레이스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항공사 직원이 아고스토에게 그레이스의 보호자냐고 물었고, 평소 신사를 자청하는 아고스토는 넋이 나간 그레이스를 보면서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운지의 음식들을, 프리미엄 위스키들을, 베네수엘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포기하고 그레이스 옆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앤 챔버에게 말했다.
“챔버 양.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앤과 아고스토 두 사람의 시선이 한규호에게 집중됐다.
“네? 아..아니. 저기 전 생각이 없어서...”
앤이 당황하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지? 식사라니?
“또 쓰러질 수 있으니 간단하게 무언가를 먹어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고스토 이사님께서 그레이스 박사님을 잘 보살펴 주실 테니, 우리는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오도록 하죠.”
한규호가 앤 챔버에게 말했다.
앤 챔버는 한규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저기... 그...”
자신을 두고 떠나려는 두 사람에게 아고스토가 말을 건넸다. 한규호가 뒤돌아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님이 곁에 계시니 박사님이 한결 편안해 보이시는군요. 역시 이사님이십니다.”
그 말에 아고스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뒤돌아 걸어가는 두 사람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규호는 아고스토와 그레이스를 뒤로 하고 걸어가면서 보이지 않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공항에 울리는 안내 방송이 그의 발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을 통해 마이애미로 떠나시는 루시아 그레이스 승객. 루시아 그레이스 승객께서는 중앙에 위치한 안내 데스크로 오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914편에 탑승하시는 루시아 그레이
스 승객께서는.....”
***
3일차
라과이라 항(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주(州), 베네수엘라
레니 페레아.
푸에르토 카르텔의 수장인 일명 엘 푸에르토는 라과이라 항만 정문 앞 12층 빌딩 최상층,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전화가 오지 않아서 그는 걱정에 차 있었다..
걱정.
몇 시간 전, 엘 오로에가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탄 차량이 호텔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예정된 것처럼 방위군은 철수했고, 그들은 밴을 빌려서 출발했다는 전화였다.
푸에르토는 엘 오로가 넘겨준 밴의 정보, 차량 번호 등을 그의 처형 팀에게 전달했다.
그때 미리 이야기를 해 두는 것이 좋았을 것을.
조금 더 확실하게 한둘은 꼭 살려 보내야 한다고 강조할 것을.
처형 팀이 그의 말을 가볍게 듣고 혹시나 박사 일행을 다 죽여 버리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었다.
처형 팀 팀장이자, 자신의 먼 친척동생인 살비아노는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었고, 과감하고 결단력도 있는 부하였지만, 총만 손에 들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단순한 멍청이였다.
그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떻게든 분쟁을 일으켜 싸움을 키우고, 그 한가운데에서 총질을 할 생각밖에 없는 살비아노에게 조금 더 확실하게 한두 명은 살려 보내라고 못박아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단순한 놈이면 분명 귀찮다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날뛸 것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든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충분이 습격이 끝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아직도 연락은 오질 않고 있었다. 젊은 여자를 따로 빼내서 재미라도 보고 있는 건가.
드디어 책상위에 있던 그의 전화가 울렸다. 푸에르토는 황급히 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그 전화는 그가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었다.
액정에 표시되는 발신자의 이름은 살비아노가 아닌 더블 티였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