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5) >
3일차
프란시스코 파하르도 도심 고속도로(Autopista Francisco Fajardo)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도밍게즈가 운전하는 15인용 밴은 도심고속도로를 통해 카라카스 외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차량 조수석에는 한규호가 그 뒤에는 앤 챔버와 아고스토가, 맨 뒷자리에는 눈을 감은 그레이스 박사가 앉아 있었다.
이틀 전, 그들은 이 고속도로를 타고 카라카스로 들어왔다. 같은 고속도로를, 같은 사람들이 타고 가고 있었지만 카라카스를 떠나는 그들의 분위기는 이틀 전과 180도 달랐다.
“오늘은 길이 덜 막히는군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도밍게즈가 말했다. 그 말에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한규호 바로 뒤에 앉은 앤 챔버가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베르나는 개인 짐을 가지러 집으로 갔습니다.”
앤 챔버의 얼굴이 경직됐다. 아직 안전한 곳에 도착한 것이 아니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부대원들이 같이 갔으니까요.”
앤 챔버의 굳은 얼굴을 룸미러로 본 도밍게즈가 말했다.
그 말에 앤 챔버는 일순 마음이 놓였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스즈키가 도밍게즈와 그의 군대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자신도 도밍게즈 소령의 부대가 부패하고, 무능한 일반적인 남미의 군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반면에 한규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도밍게즈의 부하라면 괜찮겠지. 아무리 삼두사가 막나가는 놈들이라고 해도 방위군이 지키고 있는 아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차량은 막힘없이 서쪽으로 달려 인터체인지를 거쳐 카라카스-라과이라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30km 정도 남았습니다. 대략 30분 정도면 공항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도밍게즈의 말에 한규호는 시계를 보았다. 차관 때문에 10여분 지체했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에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방해가 없다면 말이다.
한규호는 눈을 감았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해결하면 된다.
잘 수 있을 때 자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
베네수엘라의 관문항만 라과이라 항과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을 카라카스와 연결하는 카라카스-라과이라 고속도로에는 두 개의 터널이 있다.
카라카스를 빠져나와 북서쪽으로 달리다보면 카라카스 시와 바르가스 주의 경계 구역에서 만나는 첫 번째 터널, 안데스 산맥의 북쪽 지류를 관통하는 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바로 우측으로 휘는 급한 경사가 나타난다.
한때 라 만차 네그라라는 정체불명의 물질에 의한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2km의 길이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운전자들은 갑자기 늘어난 광량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그 상황에서 충분히 속도를 줄이지 못하면 터널 출구를 나오자마자 만나게 되는 우측으로 굽은 길에서 차량의 무게중심이 좌측으로 쏠렸다.
무게중심이 쏠린 차량의 바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질, 라 만차 네그라를 밟게 되면 차량은 그대로 미끄러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그 뒤를 따르는 다른 차량들과 얽혀 다중충돌이 발생하곤 했다.
최악의 상황은 중앙분리대를 타고 넘어가는 경우다. 빠른 속도를 제어하지 못한 차량들이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 마주오던 차량을 덮쳐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베네수엘라가 아직 안정적이던 90년대부터 해마다 몇 번 씩 나오곤 했었다. 라 만차 네그라가 자취를 감추고, 교통사고 정도 가지고는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방송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곳은 지금도 여전히 종종 사고가 발생하는 위험한 장소였다.
항만과 공항을 오가는 컨테이너 운반 트렉터 운전자들은 이 구간을 ‘죽음의 검은 길’이라고 불렀다.
무사히 ‘죽음의 검은 길’을 빠져나오면 두 번째 터널이 운전자를 반겼다. 500m 정도에 불과한 두 번째 터널 출구를 트럭 운전자들은 '성모 마리아 포인트'라고 불렸다.
공항 쪽으로, 즉 죽음의 검은 길을 빠져 나온 운전자들은 무사히 빠져나온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카라카스 쪽으로, 이제 죽음의 검은 길로 가야 하는 운전자들은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성모 마리아 포인트로 불리고 있었
다.
사고 위험이 대폭 감소한 지금에서도, 처음 트럭을 운전하는 초보 기사들에게 선참 기사들이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이 성모 마리아 포인트에서 꼭 육성으로 마리아님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운전자들에게는 위험한 구간이었다.
도밍게즈가 운전하는 15인승 밴은 주 경계에 위치한 첫 번째 터널을 향해 막 진입하고 있었다. 이제 이 터널만 지나서 죽음의 검은 길과 성모마리아 포인트만 지나면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차량이 터널에 진입하자 한규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차량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도밍게즈는 오는 내내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스즈키가 갑자기 몸을 돌려 후방을 확인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무슨 일입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추격자가 있군요.”
한규호가 답했다.
그 말에 도밍게즈는 룸미러를 보았다. 20~30여 미터 후방에 뒤따르는 미니 밴 한 대가 보였다.
“미니 밴 말입니까?”
도밍게즈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하며 말했다.
그는 스즈키의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교통량이 예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해도 공항과 항만을 수도와 연결하는 이 도로의 특성상 여전히 수 많은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다른 차량이 뒤에 따라붙었다고 해서 무조건 추격자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무기 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도밍게즈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일었다.
과민반응이다. 악몽이라도 꾸었는지, 갑자기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
실력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도밍게즈는 약간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미스터 스즈키. 무슨 문제라도 있...”
“총 3대입니다. 토요타 시에나, 그리고 그 뒤에 혼다 오딧세이 구형 모델 두 대.”
한규호가 말을 끊었다.
3대라고? 도밍게즈가 확인 했을 때는 분명히 한 대 뿐이었는데.
도밍게즈는 다시 룸미러를 통해 후방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단 한 대의 차량 밖에 보이질 않았다.
도밍게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측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그리고 왼쪽 사이드 미러를 통해 한 대의 미니밴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오는 다른 차량의 모습이 보였다.
어떠한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조등을 끄고, 앞 차에 바싹 붙어 있는 두 대의 차량이 보였다.
도밍게즈는 차량이 거기 있다는 것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스즈키 처럼 차종을 판별할 수는 없었다.
“추적자가.....확실합니까?”
도밍게즈는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며 물었다. 한규호는 대답 대신 뒤에 앉아 있는 일행에게 말했다.
“다들 몸을 숙여요. 최대한 바닥에 밀착할 수 있도록.”
한규호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모두들은 몸을 최대한 낮췄다.
특히 맨 뒤에 앉아 있던 그레이스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버렸다.
맨 뒤에 앉아 있는 그녀가 가장 공포에 질리는 것은 당연했다.
“조수석. 기관단총이 보입니다.”
탑승객들이 몸을 낮추는 것을 확인한 한규호는 다시 뒤를 보며 말했다.
도밍게즈는 다시 룸미러와 사이드 미러로 뒤를 살폈다. 그러나 터널 내의 부족한 광량과 차량의 짙은 틴팅필름 때문에 총은커녕 조수석에 사람이 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아니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데 이 사람은 대체 뭘 어떻게 보는 거지?
“확실합니까?”
도밍게즈가 의문을 품고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도밍게즈는 운전을 하느라 여전히 전면을 보고 있었지만 조수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씨에나에 최소 5명. 총기를 들고 있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오딧세이의 조수석에도 총을 든 사람이 보입니다.”
한규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도밍게즈가 짧게 외쳤다. 스즈키의 목소리에서 진실이라는 향기가 강하게 풍겨왔다. 그를 믿어야 한다고 도밍게즈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젠장.”
도밍게즈는 유능한 군인이었고, 그래서 이동할 때에 습격이 있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에 대한 대비도 해놓았다.
그의 부하들이 카라카스 시내 예상 이동경로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었고, 은밀하게 도밍게즈를 따라다니는 경호차량도 배치해 놓았다.
문제는 경호 범위였다.
아무리 작전 중이 아니라고 해도 카라카스시를 방위하는 5방위군이 사전 협의 없이 주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그리고 주 경계선만 넘어가면 공항까지는 금방이라는 생각에 부하들의 경호 범위을 주 경계까지로 제한한 것이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주 경계를 넘어서자 마자, 경호 차량이 떨어지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밴이 따라 붙은 것이다. 그것도 3대나.
애초에 이쪽의 상황과 형편을 훤히 아는 자들이 타이밍을 지금으로 맞춰 잡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무기 있습니까?”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도밍게즈는 왼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 홀스터에 들어있던 권총을 한규호에게 건넸다.
한규호는 권총을 받아 살폈다. 잘 손질된 오스트리아제 글록 17이었다.
그는 탄창을 꺼내 장탄수를 확인했다. 17발들이 탄창에는 풀메탈자켓(FMJ) 9mm 탄환이 장전되어 있었다.
“앞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 곳이 있습니까?”
한규호가 탄창을 다시 끼우고 안전장치를 풀면서 물었다.
“터널을 빠져나가자마자 우측으로 급하게 꺾이는 도로가 나옵니다.”
도밍게즈는 죽음의 검은 길을 떠올렸다.
필연적으로 속도를 줄여야만 하는 그곳에서 속도를 줄이면, 뒤따르던 차량들이 덮쳐 올 생각인 듯 했다. 전방 저 멀리 빛의 벽이 나타났다. 터널 출구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도밍게즈가 무의식적으로 높인 속도 때문에 먼지 가득한 터널 공기가 차안으로 굉음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어쩔 생각입니까!”
도밍게즈가 시끄러운 풍절음을 이겨내기 위해 소리쳐 물었다.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밴이 따라오는 상황에서 권총 한 자루를 들고, 그것도 달리는 차량 안에서 스즈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권총의 유효사격거리는 30미터 내외. 그것도 고정되어 있는 목표에, 고정된 상태로 사격을 했을 때 이야기다.
지금은?
달리는 차량에서 달려오는 차량을 향해 사격을 한다? 그저 총알 낭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도밍게즈는 권총 안전장치를 풀고 창문을 여는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입니까!”
도밍게즈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그의 질문에 데한 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출구를 나가면 최대한 속도를 줄이지 않도록 해주시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내밀어 조수석 문 위쪽, A필러를 잡았다.
도밍게즈는 곁눈질로 한규호가 A필러를 잡는 것을 보았다.
뭘 하려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게 미친 짓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하얀 빛의 벽이 점점 커지면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대체 뭘 어쩔 생각입니까? 무모한 짓 하지 마시오!”
도밍게즈가 더 크게 소리쳤다.
A필러를 오른 손으로 잡고 있던 한규호는 대답 없이 정면만을, 점점 다가오는 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15인승 밴이 거대한 차체를 이끌고 빛의 벽을 통과해 눈부신 밖으로 빠져 나가는 바로 그 순간.
한규호는 A필러를 잡고 있던 오른손에 힘을 주어 등을 바깥으로 가슴을 안쪽으로 향하며 머리부터 몸을 창밖으로 빼냈다.
그리고 유리창을 내린 조수석 창턱에 걸터앉아 아직 터널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미니밴 방향으로 왼 팔을 뻗었다.
그 손에는 도밍게즈의 글록이 쥐어져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