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4)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산타나 차관은 도밍게즈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도밍게즈는 벌써 여러 번 죽었을 것이다.
방위군을 철수시켰는데, 왜 그가 지금 이곳에 있단 말인가?
“소령! 뭐죠 당신?”
산타나 차관이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고 날카롭게 나왔다.
“보시다시피. 택시 기사, 아니 카풀 기사입니다 오늘은.”
도밍게즈는 차관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대비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명령을 어기겠다는 건가요?”
산타나 차관의 목소리가 한결 낮아지고, 조금 더 작아졌다.
그러나 그 눈빛은 어느 때 보다 날카로웠다.
“명령? 무슨 명령 말입니까? 철수명령이라면 이미 이행했습니다만.”
“그런데 왜 지금 여기 나타난....”
“제 부대는 주요 작전이 끝나면 필수 인력만 남겨두고 3일간 휴가를 줍니다. 우리는 주요 작전을 끝냈고, 그리고 저도 규칙에 따라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오롯이 저의 자유시간이고.”
도밍게즈는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자유 시간을 활용해 최근에 사귄 친구를 배웅하러 왔습니다. 뭔가 문제라도?”
도밍게즈의 말이 끝나자 한규호는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인이 그 새로 사귄 친구라는 의미로.
“제가 여기 온 게 뭔가 불편하십니까? 차관님은? 그럴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도밍게즈가 산타나 차관에게 물었다.
차관은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그저 도밍게즈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친구를 태워다준다는 걸 뭐라 할 순 없다.
한참을 노려보던 차관이 결국 고개를 돌렸다. 대신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박사님은 제 차로 가시죠.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도밍게즈와 한규호는 빙긋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시나리오대로 행동하는지. 그런 의미의 웃음이었다.
“안됩니다.”
이번에는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산타나 차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현장 책임자의 권한으로 일행이 떨어지는 것은 금지합니다. 박사님은 저희와 같이 이동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얼마나 크게 소리 질렀는지 천정이 높은 고풍스런 로비에 그레이스 박사의 목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질문도, 이의도 받지 않습니다.”
한규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레이스는 얼굴이 벌게져서 한규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자식을 어떻게든 박살을 내고 싶었다. 총이 있다면 바로 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기.. 그... 인원이 많으니 차를 나눠 타는 것이 좋지 않겠소? 짐도 있고 하니.”
눈치만 보고 있던 아고스토가 말했다. 편을 들자면 그는 그레이스 박사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밴을 준비했습니다. 15인승으로.”
도밍게즈가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산타나 차관에게 돌리고 잘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제 개인 차량입니다.”
산타나 차관은 도밍게즈를 노려보았다.
망할 놈의 자식.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무식한 군인 주제에 감히 나에게 이런 모욕을 안기다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이런 창피를 주다니.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베네수엘라 독립전쟁부터 내려오던 유서 깊은 군인 명가의 후손이라고 해도,
이 손으로 박살을 내 줄 것이다.
산타나 차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레이스 박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가시죠. 박사님. 저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어요.”
그레이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어서 빨리 이 예의도 모르는 놈들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사실 한규호는 그녀가 차관과 간다해도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박사를 보내지 않으려는 것은 그녀를 열 받게 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였다.
한규호의 의도대로 그레이스는 열 받았다. 아주 많이.
그녀는 몸을 돌려 삿대질을 하며 한규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달려들며 소리 질렀다.
“당신이 뭔데 된다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건방진 놈. 고작 경호원 주제에 어딜 감히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데!”
한규호는 소리 지르며 다가오는 그레이스 박사가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멈추세요!”
한규호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그레이스 박사가 행동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하세요.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모두의 시선이 앤 챔버에게 모였다.
“약속드리죠. 앞으로 박사님의 남은 일생 동안 평생 커뮤니티 컬리지(community college : 지역사회 대학, 지역 주민들에게 직업·기술 교육 또는 평생교육을 제공하는 하급 교육기관)에서 기초 심리학 강의만 하시게 될 거에요.”
그레이스의 분노는 이제 앤 챔버에게로 향했다.
저 어린년이!
“뭐라고!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소리 지르지 마요! 시끄러우니까.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장 차관님의 차를 타고 떠나세요.”
한규호는 앤 챔버가 가진 권력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두 사람의 독대에서 앤 챔버가 그레이스에게 자신이 가진 권력의 실체를 확인시켜주었을 것이다.
그레이스는 앤 챔버를 노려보았다. 앤 챔버도 그레이스를 노려보았다.
살아온 날의 차이가 7500일이 훌쩍 넘은 두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의 관심 속에서 펼쳐진 대결에서 패자는 그레이스 박사였다. 그녀는 먼저 시선을 내렸다. 그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불타고 있었지만 그녀는 진 것이다.
“그럼 가시죠.”
눈싸움에서 이긴 앤 챔버가 자신의 캐리어를 밀면서 한규호와 도밍게즈에게 말했다. 한규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캐리어에 손을 뻗었다.
짐을 옮기기 위해 기다리던 도어맨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총지배인 앙헬을 돌아보았다.
앙헬은 잠시 생각하다가 눈짓으로 도밍게즈를 가리켰다. 그제야 도어맨들은 일행의 짐을 옮기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한규호는 캐리어를 들고 로비 정문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뚫어지게 쏘아 보는 산타나 차관에게 씩 웃은 후에 소리 내지 않고 입술을 움직여 한국어로 말했다.
(다 뽀록났어 이 아줌마야.)
***
3일차
로잘 플라자 쇼핑몰(Rosal Plaza Shopping Mall)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로잘 플라자 쇼핑몰 바로 옆에 위치한 커피숍 라스 니에바스(Las Nieves)는 건장한 사람들에 의해 점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대머리 끝까지 문신으로 도배된 남자가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를 마시고 있었다.
JW 매리어트 호텔에서 공항에 가려면 프란시스코 파하르도 도심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했고, 프란시스코 파하르도 도심고속도로를 타려면 로잘 플라자 쇼핑몰 근처 인터체인지를 거쳐 가야 한다. 그래서 더블 티와 그의 충성스런 기사들은 이곳에서 그레이스 박사 일행
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온몸을 문신으로 덮은 대머리의 남자. 더블 티는 직접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차관이 탄 차량이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일행이 탄 차량이 따를 것이다.
차관의 차량은 그냥 보내고, 그 다음 차량에게 총질을 하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안에 있는 사람을 전부 죽이고, 차량을 털어 가면, 카라카스에서 흔한 또 다른 차량강도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뉴스에도 안 나올 정도로 시시한 일상이다.
차관은 방위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방위군을 철수시킨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장관의 위치를 더블 티에게 알려주었다. 장관은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정부(情婦)의 집을 찾았다. 한때 장관의 대학 제자였던 그의 정부는 장관보다 30살이나 어렸지만, 장관을 아주
잘 위로해주었다. 물론 장관은 그런 그녀에게 집과 호화스러운 생활을 제공했고.
장관이 마련해준 두 사람의 보금자리에서 장관을 납치했다. 장관의 옛 제자는 당연히 살려둘 수 없었다. 강도가 들어와 젊은 여주인을 강간한 다음 살해한다. 역시 흔한 일상이었다.
납치해온 장관은 카티아 농장 한 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잘 부패하도록 세밀하게 토막 쳐 묻어 놓았으니 농장의 작물을 키워내기 위한 훌륭한 양분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더블 티와 산타나.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빈민 문제에 관심을 가진 청소년이었고, 바리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소 그 곳에 뛰어들었으며, 똑같이 현실의 벽을 절감해야 했고, 그리고 이 상태로는 베네수엘라를 영원히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런 두 남녀가 손을 잡은 것은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더블 티는 어둠에서, 산타나는 빛의 영역에서, 베네수엘라를 바꾸기 위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협업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20ml의 리스트레토를 담았던 에스프레소 잔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슬슬 준비를 할 시간이다. 준비를 한다고 해서 더블 티가 현장에 가서 직접 총을 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기사들이 그 일을 수행할 것이고, 군주는 그 기사들을 통솔할 뿐이다.
그는 다시 책을 꺼내들었다. 하도 봐서 표지가 다 해진 ‘군주론’이 그의 손에 들렸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읽고 싶었다.
그 순간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 ‘울게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커피숍에 울려 퍼졌다. 더블 티의 시선이 책에서 그의 휴대 전화로 옮겨졌다.
그의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적었다. 화면에는 REINA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스페인어로 여왕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더블 티는 손을 흔들어 수하들을 물린 후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상황이 변했어.)
산타나 차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변했다?”
(도밍게즈가 그들을 데려갔어.) 도밍게즈? 도밍게즈라.
가리발도 몬타노 도밍게즈(Garibaldo Montano Dominguez).
스페인령 아메리칸 독립전쟁에서 시몬 볼리바르를 도와 남미의 독립을 이끌어 낸 도밍게즈 장군의 후손이며, 대대로 베네수엘라에서 군인 가문으로 무명이 높은 도밍게즈 가문의 4남.
가문의 위명을 이용해 충분히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음에도, 올곧은 성격 때문에 소령에 머물며 지방을 전전하고 있던 그가 군의 요직이며 베네수엘라 방위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5방위군의 특수 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베네수엘라 경제가 몰락하고 나서
였다.
그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제대로 된 군대를 조직하고 이끌어 부패한 정치인들의 하찮은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가 그들을 데려갔다? 힘들게 도밍게즈의 정예부대를 철수시켰는데, 그가 직접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갔다?
상황이 변했다. 그것도 아주 좋지 않은 쪽으로,
“어디로?”
(몰라. 도밍게즈가 끌고 온 밴을 타고 떠났어.)
“밴? 차량 번호는?”
(차량 번호는 알아서 뭐하게?)
“이대로 보내려고?”
(이대로 안 보내면! 그레이스 그년만 살려서 보낼 자신이 있어? 그년만 살려서 공항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줄 방법이 있어서 그런 정신 나간 말을 하는 거야?)
산타나 차관이 전화기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더블 티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혼 좀 내줄까?
더블 티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도 죽지 않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잠깐 생각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년은 살아야 해. 살아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해. 우리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라면.)
산타나 차관이 더블 티의 심기를 건드리고 살아남은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우선 철수해. 상황을 지켜보자고.)
차관이 말했다.
“흐음.... 그냥 보내기는 좀 아쉽고.”
(아쉽다고 해도 뭘 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귀한 분들이 멀리까지 오셨는데.”
더블 티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부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념엽서라도 한 장 받아가야지.”
더블 티의 눈짓을 받은 부하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