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2)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앤 챔버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있었다.
도밍게즈 소령이 베르나를 데리고 떠나간 후, 스즈키는 특별히 자신이 지시하지 않는 한 각자의 방에 머물 것을 부탁했다. 명령에 가까운 부탁이었지만.
(방위군이나 베네수엘라 정부의 협력이 없다는 가정 하에, 체크인과 출국심사 시간을 감안한다면, 늦어도 16시 30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공항까지의 거리가 40km 남짓 되니 여유 있게 한 시간 반 전, 그러니 15시에는 출발해야 할 겁니다. 이동 수단은 제가 마
련할 테니, 여러분들은 각자의 방에서 대기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각자의 방에 계시다 제가 노크를 하면 그때 나오시면 됩니다.)
그 명령 같은 부탁을 충실히 따라 앤 챔버는 짐을 다 싸놓고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봤다. 2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출발까지 약 30분가량 남았다.
놀란 가슴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그녀는 안정을 되찾고자 늘 그랬던 것처럼 손을 들어 그녀의 목걸이에 걸린 묵주반지를 만지려 했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베르나에게 끼워 주었지.
베르나. 그리고 힐베르타.
그녀의 불안함은 자신의 안위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프티드다. 염동력을 가진 기프티드이고, 그 염동력은 그녀를 모든 위협에서 보호한다.
미국 정부가 그녀에게 진행한 숱한 실험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총탄이 날아와도 그녀를 비켜 간다.
비켜 간다.
비켜 갔다.
총탄이 비켜 갔다.
그래서 힐베르타가 대신 맞은 것이다.
염동력으로 옭죄어 놓은 힐베르타는 염동력에 의해서 비켜나간 총탄에 맞은 것이다.
어제도 그랬던 것일까?
그녀를 노렸던 총알이, 염동력에 의해 빗겨나가, 차문을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날려버린 것일까?
팔.
팔이 날아갔다.
폐허의 언덕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던 남자의 팔이 끊어져서 날아갔다.
힐베르타를 쏜 남자의 그 팔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날려버렸다.
도망가던 남자의 두 다리도 잘라 버렸다.
앤 챔버가, 아니 아직 라나 아마도르이던 시절의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두 남자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모든 것이 베르나의 얼굴을 보고 떠올랐다.
미국이 정보를 조작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린 것일까?
앤 챔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베르나. 베르나를.
베르나는 힐베르타가 아니다. 똑같이 생겼다 싶을 정도로 닮았지만.
베르나는 힐베르타가 아니다.
나는 왜 베르나를 구하려는 것일까? 동생을 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범죄조직에 의해 사형선고가 내려진 소녀에 대한 동정심?
앤 챔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답을 들었다.
아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다. 생명을 위협받는 아이를 구할 힘이 있는데, 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구할 수 있고, 아이는 생명을 지킨다.
아니. 아니. 그런 건 다 필요 없다.
구하고 싶다.
구할 수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 힐베르타를 구하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 당장 지금 눈앞에 있는 베르나만이라도 구하고 싶다.
힐베르타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레이스의 악마같은 생각에 암묵적인 동의를 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베르나를, 그 작은 소녀를 구할 수 있다.
그럴 힘이 있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행정력을,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다.
양엄마는 CIA 요원, 그것도 막강한 권한을 가진 CIA의 고위급 요원이다.
베르나. 그녀를 구할 것이다.
일주일 후 다시 이곳에 올 것이다. 염동력을 통한 완전보호 능력을 가진 기프티드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앤 챔버는 노크 소리에 거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스즈키가 서 있었다.
“갑시다.”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한규호는 일행을 데리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일행은 로비 소파에 앉아서 그들을 공항까지 데려다 줄 한규호가 마련해 놓았다는 교통수단, 택시를 기다렸다.
무엇을 타고 갈 것이냐는 앤 챔버의 질문에 한규호는 간단하게 택시라고 답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규호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한규호가 어떻게 택시를 수배했고 어떤 택시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알지 못했다.
일행은 각자의 이유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레이스와 아고스토는 궁금하긴 했지만 한규호에게 화가 나 있었고, 그래서 말을 걸지 않았다.
앤 챔버는 그때까지도 베르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도밍게즈 소령이 그녀를 잘 데려 갔을까? 믿어도 괜찮을까? 어디에서 보호할까? 그곳은 안전할까?
한규호는 택시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않고 확신하고 있는지, 여유롭게 책을 꺼내어 읽고 있었다. 앤 챔버는 흘깃 한규호가 보고 있는 책을 보았지만, 그녀가 알지 못하는 글자였다.
대략 10여분 정도가 흐른 후, 3시 5분이 막 지났을 때, 호텔 정문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가 아는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산타나 차관이었다.
“차관님!”
그레이스 박사가 차관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달려갔다. 시무룩해있던 아고스토도 그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되찾았다.
여전히 책을 든 자세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던 한규호의 시선이 산타나 차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입가에 알수 없는 웃음이 걸렸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산타나 차관이 그레이스 박사를 두 팔로 안아 주면서 말했다.
“차관님. 정말로요.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갑자기 방위군이 철수하고, 그걸 장관님이 지시하셨다는 말씀은 지금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레이스는 헤어진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차관을 보자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관님이 연락 두절이에요.”
차관이 약간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장관님이요?”
“네. 아마.....”
산타나 차관이 말을 아꼈다.
“무슨 일이죠? 설마 실종되신 건가요?”
“실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관님이 그 범죄조직들과 손을 잡고 있다면, 아마 무언가 준비를 하기 위해서 몸을 숨기신 것이 아닌가 우려됩니다.”
차관이 말했다.
“준비.....라니...요?”
“... 박사님 일행을 해꼬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산타나 차관의 말에 그레이스는 충격을 받았다. 장관이? 바렐라 교수가?
“설마! 설마요!”
“그레이스 박사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이곳은 예전의 베네수엘라가 아니에요. 장관님도 예전의 장관님이 아니고요.”
“.......”
그레이스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노신사가, 온화하고 자상하던 노신사가 이렇게 될 줄이야.
“공항까지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무리 범죄조직이라고 해도 환한 대낮에 현직 차관을 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산타나가 자상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 그레이스는 결국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지옥 같은 이곳에서, 오직 믿을 사람이라고는 산타나 차관 한 사람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스의 눈물을 보고 산타나 차관은 그녀를 다시 가볍게 안고 등을 토닥였다.
“다 괜찮을 거예요. 시간이 급하니 빨리 가도록 하죠.”
산타나 차관의 말에 그레이스는 눈물을 닦으며 눈앞에 있는 그녀의 친우(親友)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같이 할 친우를.
그레이스 박사의 감격에 찬 시선을 마주한 산타나 차관은 박사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웃어 보인 후 아직 소파에 앉아 있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죠. 짐도 많고 하니 차를 두 대 준비했어요. 그레이스 박사님은 제 차에 타시고, 세 분은 준비된 다른 차량에 탑승하도록 하세요. 우선 짐부터 실으라고 하죠.”
산타나 차관은 그레이스 박사의 손을 잡고 호텔 직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관이 도착했을 때부터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총지배인 앙헬과 직원들이 차관의 눈짓을 보고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아고스토와 앤 챔버도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규호였다.
“거절합니다.”
시종일관 소파에 앉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던 한규호가 말했다.
그리 크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 한마디에 로비에 있던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차관님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로비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산타나 차관이 한규호에게 물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차관님의 차량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실례인가요!”
차관 대신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그레이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한규호는 그레이스가 소리치자 살짝 웃었다. 예상대로였다.
“택시가 올 겁니다. 우린 그걸 타고 갑니다. 제 지시에 따르도록 하세요.”
한규호가 말했다.
그레이스는 감히 차관 앞에서 건방지게 구는 스즈키에게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것도 참고 있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감히 경호원 주제에 한 나라의 차관에게 이런 실례를 저지르다니!
앤 챔버에게 기세가 눌린 후 참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저 건방진 놈에게 무언가 말하지 않고서는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쌍욕을 퍼붓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차관의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스 박사가 시선을 돌리자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듯이 웃어 보이는 산타나 차관이 보였다.
“미스터 스즈키. 무슨 말씀이시죠? 택시가 올 거라고요?”
그레이스 박사를 제지한 차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규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공항까지 우릴 태워다 줄 택시죠.”
한규호의 말을 들은 산타나 차관은 JW 메리어트 카라카스의 총지배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받은 총지배인 앙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동양인 남자는 택시를 요청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였다.
앙헬을 통해 확인한 차관은 다시 한규호를 보면서 물었다.
“택시를 불렀다고요?”
“불렀습니다.” “카르텔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항까지 당신들을 태워줄 택시가 있다고요? 어디서 불렀나요? 어느 회사의 택시죠?”
산타나 차관의 웃음이 비웃음으로 변했다.
그 비웃음을 본 한규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개인 택시라 할 수 있겠군요. 지금 막 도착했네요.”
차관은 한규호의 시선이 호텔 정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한규호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려 정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짧은 머리의 건장한 남자 한 명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복을 입은 도밍게즈 소령이었다.
***
하루 전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저희를 신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저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한규호가 반문했다.
“.....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부대를 잘 훈련시키셨더군요. 믿음직한 군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당신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군요.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범죄조직이야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내부의 쥐라던가.”
쥐, 정보를 외부로 흘리는 쥐가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그런 의미를 한규호는 전달했다.
“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규호가 되물었다.
도밍게즈는 한규호의 눈을 말없이 십여 초 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의 쥐는 생각 외로 커다란 쥐일 수도 있습니다.”
도밍게즈가 말했다.
“예를 들어 차관이라든가?”
한규호가 말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