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1)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앤 챔버와 베르나가 말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두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앤 챔버가 베르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설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도밍게즈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도밍게즈는 둘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앤 챔버의 베르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겠다는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앤 챔버가 진짜로 베르나를 데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대체 왜 데려가려고 하는지.
베르나는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앤 챔버를 보고 있었다.
눈물은 멎었지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더욱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왜 이 언니가 자신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앤 챔버도 베르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베르나가 아니라, 자신에 힘에 의해 묶여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힐베르타가 보였다.
힐을 또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앤 챔버는 베르나의 양어깨를 쓰다듬어 준 다음 몸을 일으켜 도밍게즈를 쳐다보았다.
“소령님. 확신시켜 드릴게요.”
앤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꺼냈다.
신호연결음 소리가 나자 앤 챔버는 전화기를 스피커폰 모드로 바꿨다.
신호음이 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여보세요?)
“저에요.”
(갑자기 무슨 일이 있니? 오늘 오기는 하는거니?)
“저 부탁이 있어요.”
(어머. 갑자기 왜 그래? 무서운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니?)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요. 인터뷰 대상인데, 여기에 두면 너무 위험해요.”
(아이?)
“네. 7살. 여자아이. 지금은 혼자지만, 나중에 누굴 추가로 더 데려와야 할 수도 있어요.”
(너무 갑작스럽구나. 앤. 그게 무슨 말인지 차근차근 말...)
“엄마.”
앤의 목소리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상대방도 느꼈다.
(.......... 진심이구나.)
“네. 진심이에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오늘 당장이라도요.” (오늘 당장이라. 7살이라고 했지? 아이 부모는?)
“없다고 봐도 되요. 양아버지가 있지만 나중에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앤 챔버는 나중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니 처리하라는 의미로 말했다.
(너무 갑작스럽구나. 하지만..... 우선 알겠다. 잠시만 기다려볼래? 엄마가 전화를 해볼게.)
“알겠어요. 부탁해요...... 엄마.”
앤 챔버가 말했다.
(너는 꼭 너 아쉬울 때만 엄마라고 하는구나. 그래. 조금만 기다려봐.)
전화가 끊어졌다.
앤은 통화를 마치고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령님.”
도밍게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앤 챔버의 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
“아이?”
밀러 국장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리고 그 내용에 조금 놀랐다.
신시아 챔버, 기프티드 앤 챔버의 양어머니이자 전담 요원인 신시아 챔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앤 챔버가 아이 한 명을 미국으로 데려오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네. 가능한가요?)
가능하냐고?
물론 가능하다. CIA의 국장 자리는 산도 옮길 수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산을 옮기지는 않는다. 산을 옮겼을 때 발생할 여파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산을 옮겨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니까.
“지금 당장이라..... 당장은 안 되는 것으로 할까?”
(어머. 못됐군요. 조카의 부탁을 들어 주지 않을 건가요?)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하지만 지금 급한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베네수엘라의 여자아이보다 조카와 조카사위 후보자니까.”
(언제부터 그가 조카사위 후보자가 된 거죠? 엄마인 나는 금시초문인데요?)
“가능성은 열어두자고. 우선 알겠네. 전화를 하라고 하지.”
밀러가 말했다.
***
전화를 끊고 다시 아이에게 다가가 뭔가 이야길 하고 있는 앤 챔버를 한규호는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췄다.
앤 챔버는 스페인어를 할 줄 안다. 그리고 그레이스 박사를 누를 수 있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그녀의 엄마라고 불렀던 전화상의 여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아마 그레이스를 눌렀던 힘으로, 권력으로, 아이를, 베르나를 데려가려고 하려는 것 같
았다.
앤 챔버, 그저 국무부의 인턴이라고, 그레이스 박사 일행의 이야기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한 스피커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단순히 스피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미국이 심어놓은 무언가일 가능성이 높다. 한규호를 탐색하기 위한 무언가.
그런데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
만약 미국정부가 한규호를 중요인물로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앤 챔버를 한규호 감시용으로 붙여놨다면 미국은 사람을 잘못 고른 것이다.
어둠속에 숨어 자신을 숨긴 채 은밀한 상태로 보고 듣고 해야 하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노출했다. 그것도 어린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위와 힘을 노출했다. 김훈 원장은 미국이 눈치 챘느냐고 물었다. 트레이시는 자신을 찾아와 경호 임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앤 챔버가 자신이 가진 권한을 노출했다. 아주 미숙하게.
한규호는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한규호에게서 그러한 의심을 사는지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아이를 달래러 자상한 말을 건내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군인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도밍게즈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도밍게즈의 눈에 감정이 스쳐갔다.
도밍게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하가 문을 열고 나갔다.
“시나리오 대로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시나리오 그대로입니다..”
도밍게즈는 여전히 앤 챔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앤 챔버는 전화를 받아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앤 챔버양. 전화를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방을 가득 채울 만큼 크게 울렸다. 앤 챔버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니까.
“가능한가요?”
앤 챔버는 인사치레는 건너뛰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서류 작업에 일주일은 필요합니다.)
남자도 바로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늦어요.”
(죄송합니다. 미스 챔버. 하지만 미성년인 아이는 여러모로 단계가 복잡합니다. 일주일도 최대한 무리하게 잡은 일정입니다.)
“....... 일주일 후에는 가능한가요?”
(일주일 후에는 가능합니다.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이의 이름하고 사진은 최대한 빠르게 보내 드리도록...”
(괜찮습니다. 여기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네. 부탁드립니다.”
앤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도밍게즈는 잠시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전화 통화를 그도 들었다. 그리고 최소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앤 챔버가 그에게 확신을 준 것이다.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확신을. 도밍게즈 입장에서도 아이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주일 간..... 부탁드립니다.”
앤 챔버가 말했다.
도밍게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지 안이라면 아무리 삼두사라고 해도 안전할 것이다.
앤 챔버는 다시 베르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베르나.”
베르나는 앤 챔버가 자신을 보며 말하자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가.... 일주일 후에 다시 데리러 올 거야. 그리고 그 동안, 저 아저씨가 베르나를 지켜 줄 거야.”
앤 챔버는 손으로 도밍게즈를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베르나의 시선이 도밍게즈에게 향했다.
자신에게 콜라를 따 줬던 무서워 보이는 얼굴의 군인아저씨의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계속 보다보니 조금 덜 무서운 것 같기도 했다.
“언니가... 꼭 다시 올 테니까. 그러니까.... 일주일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앤 챔버의 말에 다시 물기가 느껴졌다.
베르나는 무언가 말을 할까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앤 챔버는 두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 은으로 만들어진 묵주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는 그 반지를 베르나의 검지에 끼웠다. 앤 챔버의 새끼손가락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반지는 베르나의 검지에는 마치 맞춘 듯이 딱 맞았다.
앤 챔버의 큰 언니가 보고타로 가기 전날 앤 챔버에게 끼워주었던 반지였다.
베르나는 손을 들어 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껴보는 반지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에 베르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반지를 바라보는 베르나의 모습에 앤 챔버는 큰 언니가 반지를 끼워 주던 그날의 자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앤 챔버는 반지를 끼워 주던 그 날 엄마 같던 큰 언니가 힘들 때 힘이 되는 말이라고 해준 말을 베르나에게 해주었다.
“Sonrie, es un mal dia no una mala vida.”
(웃으렴. 그저 나쁜 날일 뿐이야. 나쁜 인생은 아니야.)
반지를 보고 있던 베르나는 앤 챔버를 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두 팔을 벌려 앤 챔버를 안아 주었다. 앤 챔버도 베르나의 작은 팔에 안겨서 베르나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밍게즈는 두 사람이 마침내 포옹을 풀고 손을 잡자 말했다.
“방금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한규호와 앤 챔버의 시선이 도밍게즈를 향했다.
“정오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앤 챔버의 눈이 커졌다.
***
그들은 다시 아고스토의 방에 모였다.
한규호에게 면박을 당한 그레이스와 아고스토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도밍게즈의 방위군이 철수한다는 말에 열린 대책회의에는 참가해야만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죠?”
그레이스가 새된 목소리로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명령이라니. 갑자기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도밍게즈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아고스토가 도밍게즈에게 말했다.
“아니 소령. 이건 말도 안 되는....”
“차관님에게 확인해보겠어요!”
아고스토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레이스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카롭게 소리치는 그레이스를 보면서도 도밍게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전화기를 꺼내면서 도밍게즈를, 그리고 한규호를 차례로 번갈아 노려보았다. 마치 이 상황이 너희 두 사람 때문이라는 듯이 원망스러운 눈빛이었다.
(여보세요?)
스피커폰 모드로 된 전화기에서 산타나 차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관님. 저 그레이스입니다.”
(네. 박사님.)
“차관님. 여기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요? 무슨 말씀이신지...)
“방위군이 철수한다고 합니다.”
(........ 역시....)
“역시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차관님은 알고 계셨나요?”
(장관.....께서 어제 방위군을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장관님이요?”
(어제 인터뷰 이야기를 듣고 엄청 화를 내셨어요. 그래서 방위군을 철수시키라고 막 소리를 지르셨는데... 제가 말렸음에도.... 결국에는.... 그렇게....)
그레이스는 바렐라 장관을 떠올렸다. 돌아가라고, 내일 떠나라고 힘없이 말하던 바렐라 장관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물론 장관의 허락 없이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그녀의 잘못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자신들을 위협에 노출시킬 줄이야.
“어떻게... 어떻게 장관님이 그러실 수 있죠?”
(...... 믿지 말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장관님이... 그.....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정황이....)
“설마. 그럴 리가!”
장관이 범죄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말이 전화기 너머로 흘러 나왔다.
그 말을 들은 한규호는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도밍게즈도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아고스토는 입을 크게 벌리고 얼이 빠져 있었다.
(잠시만요. 저희도 지금 장관님께서 아직 출근도 안하시고 연락도 받지 않으셔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는 상태에요. 그러니 우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차관이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레이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끊기자 도밍게즈가 일행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는 명령대로 철수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