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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83화 (84/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0) >

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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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한 시간 반 정도로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인터뷰는 두 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아고스토와 그레이스는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원하는 영상을 얻기 위해 달래고, 때로는 겁박하고, 화내고를 반복하면서 베르나를 괴롭혔다.

추악한 두 늙은이가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는 것은 한규호에게도, 앤 챔버에게도, 도밍게즈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면 말이지. 혹시 말이야. 그... 양아버지에게서 그런 일은 없었니?”

“네? 어떤...... 그런 일이요?”

아고스토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예를 들어 뭐... 밤에 침대로 부른다든가. 말이지.”

도밍게즈의 얼굴에 분노가 드러났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얼굴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한규호는 도밍게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엄청난 분노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분노의 시작이 아고스토의 질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밤에 양아버지가 침대로 불렀냐고 물었소.”

도밍게즈는 시선을 아고스토에게 고정한 채로 말했다. 그 끔찍한 질문을 번역해 주었다.

“거기까지.”

도밍게즈의 말을 들은 한규호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났으니, 인터뷰는 거기까지. 이제 그만.”

한규호가 낮게 착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미스터 스즈키.”

아고스토가 한규호에 말에 항변했다. 아직 부족했다. 생각해보면 인터뷰 시간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아직 만족스러운 답변이나 영상이 나왔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자극적인, 자극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고스토.”

한규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고스토는 그 목소리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한규호가 말했다. 말하면서 한규호는 내심 아고스토가 반발해주길 바랐다.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달려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평생을 눈치로 살아온 아고스토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본능이 맹수에게 덤벼들지 말 것을 명했다.

“미스터 스즈키.”

대신 그레이스가 입을 열었다.

“인터뷰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합의했을 텐데요.”

그레이스는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 목소리와 눈매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고 표독스러웠다. 마치 암표범을 연상시키는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한규호는 그레이스와 눈을 맞췄다. 호랑이가 암표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암표범은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그리고는 눈싸움을 벌였다.

죽여 버릴까?

한규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죽일까? 한규호는 군인이었고, 그리고 군인이 아닌 지금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위협하는 일을 해왔다.

그는 사람의 목숨이 절대적으로 소중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눈앞의 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쯤이야.

미국인? 살인죄? 체포?

한규호는 그런 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짐승을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커져 갔다.

겁도 없이 호랑이의 눈을 보던 암표범은 그 눈 속에 담긴 살기를 느꼈다.

평생을 일반인으로 살아온 그녀가 느낄 정도로 한규호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녀에게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고스토처럼 비굴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자리를 비켜준다는 듯이.

한규호는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객실 문이 닫히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베르나, 인터뷰라는 이름의 고문을 당하던 한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가.”

한규호가 아고스토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고스토가 재빨리 촬영용으로 사용했던 캠코더와 핸드폰을 챙겨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그 공간에는 한규호와 도밍게즈, 그리고 주사를 맞고 있는 앤 챔버와 베르나만이 남았다.

“어떻게 됩니까?”

한규호가 베르나를 쳐다보면서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죽을 겁니다. 십중팔구.”

도밍게즈가 답했다.

한규호는 인터뷰가 끝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고, 도밍게즈는 아이가 죽는다고 답했다.

“인터뷰가 나가지 않으면?”

“인터뷰가 나가고 나가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외신을 챙겨보는 놈들도 아니고.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놈들에겐 충분합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챔버 양.”

한규호가 앤 챔버를 불렀다.

챔버는 한규호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 시선을 아이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챔버 양.”

한규호가 더 크게 불렀다. 그제야 앤 챔버의 시선이 한규호에게 향했다.

“들었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한규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소령님!” 앤이 한규호의 말을 끊고 도밍게즈를 불렀다.

“말씀하시죠.”

“이 아이를...... 베르나를...... 지켜 주실 수 있나요?”

“보호 말씀입니까?”

“네. 이 아이는...... 위험한 상황이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죠?”

“그렇습니다.”

“그럼.... 잠시만 보호해 주실 수 있나요? 일주일 아니, 며칠만이라도.”

“.........”

도밍게즈는 지금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이 아가씨는 그저 싸구려 동정심으로 아이에 대한 보호를 입에 담는 것일까?

도밍게즈는 화가 났다.

아이가 인터뷰 대상인 줄 알았으면 못하게 했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런데 저 죽이고 싶은 연놈들은 그 사실을 숨긴 채 그저 인터뷰라는 사실만을 강조했다. 덕분에 이제 저 아이는 성인을 맞이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확률이 굉장히 높아졌다.

그런데, 앤 챔버는 저 아이를 보호해 달라고 한다. 일주일? 며칠만? 그러면? 그 다음에는?

도밍게즈는 더욱 화가 났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도밍게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한규호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연상되는 목소리였다. 억누르고 있던 도밍게즈의 분노가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제가 데려갈 거예요.”

앤 챔버가 나직하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어지는 앤 챔버의 말을 들은 도밍게즈는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미국 정부에서 베르나와 가족들을 전부 미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베르나 자신이 원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긴 했지만.

도밍게즈는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23세의 아가씨를 보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할 수 있어요.”

앤 챔버가 답했다.

“현실적으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죽어요! 이대로 두면!”

앤 챔버가 말했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대로 두면 베르나라는 이름의 7살 소녀는 죽는다.

앤 챔버는 인터뷰 내용을 다 들었다.

베르나의 모친은 베르나를 두고 떠났다. 그녀를 맡은 양부는 그녀를 학대했고, 제대로 키우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 이유는 베르나가 단지 언니들처럼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앤 챔버는 그런 베르나를, 힐베르타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동정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앤 챔버는 동생을 구하고 싶었다. 그녀의 동생을 다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제발... 며칠, 단 며칠만이라도 그녀를 지켜 주세요.”

앤 챔버가 도밍게즈에게 말했다.

도밍게즈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말을 쉽게 하지 마십시오.”

“쉽게 한 말이 아니에요!”

“쉽게 한 말이 아니라고?”

도밍게즈가 소리쳤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민가의 어린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그것도 며칠 만에?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으라고? 보호하라고? 어떻게 보호하라는 말이지? 애를 데려가서 기지에 가둬두면 되나? 아니면 우리 집? 홈스테이라도 시켜

주면 아이가 안전할까? 아이를 사지에 몰아넣고서는 이제는 지켜 달라니. 웃기지 마! 당신네 저 악마 같은 일행이 아이의 인터뷰를 찍겠다는 생각을 한 그 때부터 아이는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 거야! 하루에 몇 명씩 죽어나가는 거리의 아이들처럼 저 아이도 곧 죽을 거라

고!”

도밍게즈는 일행을 만나고 억눌러온 분노를 표출했다.

항상 한 발자국 뒤에 서서 그저 관망만 해야 했던 그가 드디어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도밍게즈의 분노 대부분은 그레이스와 아고스토를 향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격노를 받아내야 하는 사람은 그의 눈앞에 있는 앤 챔버였다.

현역 군인의 분노가 해일처럼 앤 챔버를 덮쳤다.

그러나 앤 챔버는 굴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간절한 눈으로 도밍게즈를 보고 있었다.

“소령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앤 챔버는 그렇게 말하고,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아이가 더 놀라지 않도록.

“안녕? 언니는 라나 아마도르라고 해.”

앤 챔버가 스페인어로 베르나에게 말했다. 베르나는 갑작스러운 인사에 눈이 살짝 커졌다.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앤 챔버가 베르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이의 손은 차가웠다. 낯선 환경,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 그녀를 괴롭게 한 인터뷰, 그리고 격한 말싸움 같은 것들이 그녀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앤 챔버는 베르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등에 난 식은 땀이 앤 챔버의 손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언니가 물어볼 게 있어.”

앤 챔버의 질문에 베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나는....지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아니?”

베르나는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고 말했다.

“......아저씨들이 싫어하겠죠?”

그 말에 앤 챔버는 눈물이 왈칵 터졌다.

가난한 아이는, 힘들게 자란 아이는 철이 빨리 든다. 베르나는, 아직까지 한창 부모의 사랑 속에 커야 할 나이인 베르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목숨이 위험한 자신의 상황을.

“응..... 아마도. 그래서 괜찮으면 언니가 안전한 곳으로 베르나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베르나는 앤 챔버의 눈을, 눈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있었다.  베르나는 의아했다.

왜 울지?

나 때문에 우는 건가?

“안전한.... 곳이요?

“응. 안전한 곳. 안전한 나라.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우리 베르나를 해칠 수 없는 그런 곳으로.”

베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배고프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알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베르나는 자아를 가지게 된 이후 단 하루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빠도.... 같이 가야 되나요?”

베르나가 물었다.

“아니. 아빠는 안 가. 베르나랑, 베르나가 원하는 사람만 갈 거야.”

“원하는...... 사람?”

베르나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내가 안전한 곳으로 간다고 하면 같이 가고 싶어 할 사람은 누가 있을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친했던 바로 위 언니는 얼마 전 그녀를 떠나갔다.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베르나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앤 챔버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나중에 생각나면 그때 데려와도 되니까. 그럼 베르나는 이 언니와 같이 먼저 갈래?”

“......... 모르겠......어요....”

베르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곳에 와서 자신에게 초코바를 준 저 아저씨와 자신을 데려간다는 이 언니는 무섭지 않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따라 간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지만 베르나도 하나는 알고 있었다.

양아버지가 기다리는 집보다는 괜찮을 것이라고.

그곳은 지옥이었고,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못했으니까.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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