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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82화 (83/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9)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방으로 들어온 한규호는 앤 챔버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근처 기둥에 적당히 수액 병을 걸었다.

앤 챔버는 의자에 앉아서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힐베르타가, 그녀의 막내 동생이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힐베르타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앤 챔버, 전 라나 아마도르도 안다.

저 아이가 힐베르타일리가 없다는 것을.

16년 전 그녀의 막내 동생은 그녀의 눈앞에서 죽었으니까. 동생을 구속하고 있던 자신의 염동력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총을 맞고 죽어버렸으니까.

과거는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주님의 영역이고, 힐베르타는 그 과거 안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앤 챔버는 소녀의 얼굴을 보면서 힐베르타가 16년 정도 잠들어 있다가 다시 깨어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베르타, 사랑하는 막내 동생이었으면.

그래서 앤 챔버는 그녀에게서, 그 작은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그 둘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도 아고스토와 마찬가지로 까레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상황을 해결하라는 의미로.

까레라는 그 시선에 응답해 아이에게 다가가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본 한규호는 도밍게즈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는군요.”

도밍게즈가 작게 말했다.

한규호는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그레이스와 아고스토가 질문을 던졌고, 아이가 말을 하지 않자 카레라인지 뭔지 하는 저 놈이 아이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귓속말을 들은 아이의 얼굴표정이 확연하게 겁에 질렸다. 한규호는 아이의 그 표정을 보고서 까레라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아이에게 해줄 말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규호의 시선은 비열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까레라를 계속 따라갔다.

까레라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아고스토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좋아요. 이름이 뭐죠?”

아이는 그 질문에 작게 속삭였다.

그 속삭임이 너무 작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응? 안 들리는데? 뭐라고?”

아고스토가 귀를 가까이 가져가기 위해 머리를 아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아이는 화들짝 놀라 잔뜩 움츠렸다가 이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레이스가 다시 화난 표정으로 까레라를 바라보았다.

까레라가 그 눈빛을 받고 다시 아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만.”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았다.

“거기. 당신. 당신은 나가.”

한규호가 까레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까레라는 순간적으로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뭐지?

갑자기 튀어나온 저 원숭이는?

저 원숭이가 지금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가?

“응? 영어를 모르나? 나가라고 말 좀 해줘요.”

한규호가 도밍게즈에게 말했다.

“꺼져.”

도밍게즈가 스페인어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까레라는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자신 편을 들어줘야 할 그레이스 박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언짢은 얼굴로 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안 들리나 보군. 직접 내보내야 하나?”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두 번 말 안 해. 꺼져.”

도밍게즈가 다시 말했다.

까레라는 잠시 눈치를 보다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여전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안고서 까레라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레이스는 한규호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나갔어.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런 눈빛으로.

한규호는 그런 그레이스 박사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울고 있던 아이도 울음을 멈추고 한규호를 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음료와 간단한 과자가 있는 호텔 미니바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스니커즈 하나를 꺼내 들고 아이가 있는 소파로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천천히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미소를 보이며 그가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 중 하나를 말했다.

“Hola(안녕)?”

앤 챔버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규호의 얼굴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가 생각 외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자 한규호는 조금 더 부드럽게 웃으면서 한 손에 들고 있는 초코바를 아이의 눈 높일까지 들어 올린 다음 천천히 껍질을 벗겨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 우선 이거 먹을까?”

한규호가 말했다.

뒤에 서 있던 도밍게즈가 바로 스페인어로 통역했다.  아이는 한규호의 손에 들린 초코바를 바라보았다. 검은 초코바 뒤로 한규호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왼손으로 아이의 오른쪽 손을 잡고, 초코바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초코바를 손에 들고 한규호를 바라보다 다시 초코바를 보고는 입으로 가져가서 작게 한 입 깨물었다. 입 안에서 초코와 캐러멜의 달콤함이 퍼져나갔다.

치익. 탁!

어느새 다가온 도밍게즈가 콜라 캔을 따서 아이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이것도 마시렴 하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콜라 캔을 보고, 도밍게즈에게 시선을 맞추고 작은 목소리로 gracias(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두 손에 든 초코바를 조금 베어 물어 입에 넣었다.

앤 챔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가장 무뚝뚝하고,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두 남자가 아이를 달래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앤 챔버에게도 초코바를 내밀었다.

앤 챔버는 얼떨결에 초코바를 받았다.

“저 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아침밥도 못 먹었을 거요. 아마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앤 챔버는 다시 아이를 돌아보았다. 조그만 손으로 초코바를 들고,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거리고 있는 아이가 아침밥을 먹고 왔는지 아닌지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오직 스즈키, 이 남자만이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앤 챔버는 천천히 스니커즈의 포장지를 벗겼다. 초코와 캐러멜, 땅콩과 유지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미국 간식.

앤 챔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달고, 칼로리도 높아서. 그런데, 한입 입에 물자 유난히 맛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인지 앤 챔버는 알 수 없었다.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 이사도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 인생경험을 쌓았다고 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고 찾아왔을 아이가 아침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전혀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인터뷰에 허락도 없이 개입한 저 건방진 경호원에 대한 화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레이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고, 그 영상을 담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달달한 초코바는 아이의 기력을 채움과 동시에 기분도 좋게 만들어주었다. 어른들에 둘러싸여서 바닥만 보고 있던 어린아이에게 초코바와 콜라 한 캔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베르나(Verna)이고, 올해 7살이며, 서부 바리오에 위치한 el Amparo에 살고, 지역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올해부터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렇구나. 학교는 재미있니?”

아고스토가 자상한 할아버지의 말투로 물었다.

“.....네.”

베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아고스토는 그녀의 끄덕임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착한 어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앤 챔버는 그녀의 머뭇거리는 대답에서 숨어있는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그녀의 양어머니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야기할 때, 고개를 끄덕이던 자신의 모습이 베르나에게서 보였다.

“그래. 학교란 참 좋은 곳이란다. 이 아저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요. 아저씨는 어릴 적에......?”

아고스토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그레이스가 그런 그에게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아고스토는 질문지를 보고 첫 번째 질문을 했다.

“험험. 우리가 베르나 아가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에요. 대답해줄 수 있죠?”

베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베르나는 언니가 몇 명이야?”

아고스토가 느끼한 말투로 물었다.

“...... 지금요? 아니면 예전에....?” 그 말에 아고스토가 웃었다. 아주 좋은 답변이다.

“지금과 예전이 달라?”

“...........”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럼 쉽게 물어볼게. 지금 집에서 같이 사는 언니는 몇 명인지 말해줄 수 있겠니?”

“지금은..... 없어요.”

베르나가 말했다. 그레이스 박사에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렇구나. 원래 언니들이 없니?”

아고스토가 물었다.

“원래는..... 네 명........”

“근데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베르나는 말이 없었다.

“아저씨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언니들은 어디로 갔어? 이제는 같이 안살아?”

아고스토가 다시 물었다.

베르나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자리인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어젯밤에 갑자기 찾아온 선생님이 아침 일찍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다녀오면 맛있는 걸 사준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있는 옷 중에 제일 깨끗한 것을 입고, 아침부터 이곳

으로 온 것이었다. 선생님을 보고 처음에는 화를 내던 아빠도 선생님과 잠시 얘기를 하더니 기분이 좋아져 선생님을 따라갔다 오라고 했다.

그런데 언니들의 이야기를 물을 줄은 몰랐다.

베르나는 7살에 불과했지만, 언니들이 왜 집에 없는지 알고 있었다. 왜 그들이 그러한 이야기를 묻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분명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베르나가 사는 동네를 지배하는 무서운 아저씨들은 베르나가 이런 이

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은 아이를 빨리 철 들게 한다.

“베르나. 과자 먹을래? 감자칩 먹을래?”

아고스토는 아이가 말이 없자 한규호와 도밍게즈가 했던 것처럼 먹을 것으로 달래보려는 생각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베르나는 고개를 저었다.

베르나는 그냥 7살 어린이가 아니었으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도밍게즈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서 드러나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한규호는 스페인어를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로 어떠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한규호는 개입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인터뷰는 그레이스 박사에게 맡기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외의 사항은 모두 한규호의 지시에 따르고.

인터뷰 방식이나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인터뷰 내용을 숨기고 진행한 그레이스 박사의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목적을 위해 비열하고 무리한 수단을 쓰는 그레이스를 단죄해야 한다면 따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한규호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냥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앤 챔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이를 데려와 인터뷰를 한다는 이야기를 그레이스로부터 직접 들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앤 챔버는 그저 그레이스 박사가 얼마나 간절한지만을 생각했고, 그래서 인터뷰 대상이 될 아이의 심정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앤 챔버는 이번 인터뷰에, 이 잘못된 행위에 공동정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를 불러다 놓고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두 사람의 남녀의 추악함에서 자신 또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힐베르타. 앤 챔버는 다시 한 번 힐베르타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고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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