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81화 (82/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8) >

3일차

CIA 국장 전용기

랭리 공군기지 서측 100마일 상공, 버지니아 州

염동력을 통한 완전보호 능력.

총알이든, 화살이든, 칼이든 간에, 그녀를 해할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오는 모든 것들을 그녀의 염동력이 막아냈다.

아주 미세한 궤도 수정만으로 그녀의 몸을 빗겨갔다.

조금씩 강도를 올려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가볍게 던진 테니스공은 그녀의 팔에 닿았지만, 약하게 던져진 다트는 그녀의 몸에 닿을 수 없었다. 테니스공은 다트로, 칼로, 화살로 바뀌었고 종국에는 총알까지 그녀를 향해 발사되었다.

실험 결과, 약간이나마 그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그녀에 염동력에 의해 접근을 차단당했다.

투사체만이 염동력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콤포지션 C-4의 폭발력도 그녀를 피해갔다.

전기도 그녀를 비켜갔다.

탄저균과 같은 고위험군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어도 그녀는 멀쩡했다.

염산과 같은 유해성 액체도, 화염과 복사열 같은 기체도 그녀를 비켜갔다.

마치 그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작은 구(球)가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그러한 능력이 불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감기에 걸렸고, 약한 락토스 과민증(Lactose Intolerance)을 보유하고 있으며,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었다.

그 말은 그녀는 늙어갈 것이고 결국 자연적으로 생명이 다하는 날이 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녀의 능력이 파악되자, 그제야 미스터리가 풀렸다. 용병들이 그녀의 동생을 살해했고, 라나 아마도르를 살해하려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염동력이 살해 시도를 막아낸 것이다.

단순히 막아내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닐 것이라는 가설도 세워졌다.

염동력이 단순히 방어적 보호적 기능만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 용병들을 종이처럼 찢어놓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아니 그렇게 밖에 설명이 안되는 현장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염동력이 공격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 자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앤 챔버는 자신이 용병들을 살해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막내 동생 힐베르타를 따라가다 길을 잃었고, 배고픔에 헤매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어찌저찌 미국인에게 구출되어 미국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신과 의료진들은 강한 충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된 상황을 만들고, 진실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그 상황을 바로 잡지 않았다. 아니. 더욱 그렇게 믿게 만들었다. CIA는 그쪽 분야에 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녀는 미국이 보유한 두 번째 기프티드였다.

그리고 그 소중한 기프티드를 세 번째 기프티드 후보에게 보냈다.

혹여나, 기프티드 사이의 접촉에서 무언가 느끼거나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

그녀를 국무부 인턴의 신분으로, 한규호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녀는 일행에 합류했다.

결과는?  앤 챔버는 그녀의 양어머니에게 특별한 것이 없다고 했다.

기프티드 간 단순 접촉에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한규호가 기프티드가 아닌 걸까?

한규호는 기프티드가 확실하다. 밀러 국장 그 스스로가 확인 했다. 남은 것은 조건이 무언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신시아 챔버, 그녀의 양어머니는 국장에게 앤 챔버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걱정? 앤 챔버에게 실험해 보지 않은 유일한 무기는 핵뿐이었다. 카라카스에서 핵폭발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를 위험하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핵폭발이 일어나도, 그녀는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착륙합니다.)

기장이 기내 방송을 통해 랭리 곧 공군기지에 착륙한다고 보고했다.

밀러 국장은 눈을 감았다.

즐거운 날이다.

이런 나날들을 위해 그가 살고 있는 것이다.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허름하지만 그나마 깨끗한 옷을 입은 소녀가 도밍게즈의 방 거실로 들어왔다.

잠깐 딴 생각을 하던 앤 챔버는 들어오는 소녀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두 팔은 자연스럽게 올라가 그녀의 입을 가렸고, 그녀의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열렸다.

힐베르타, 16년 전 헤어진 막내 여동생과 똑같은 소녀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에게서 플래시백 현상이 나타났다.

플래시백(Flashback) 또는 involuntary recurrent memory라고 불리는 심리현상,

어떠한 단서를 통해서 과거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다시 그때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소녀의 얼굴을 통해서 앤 챔버는 그날로 돌아갔다.

폐허의 언덕

힐베르타

총알

핏물

어른

들꽃

산등성이

능선

침대

인형 언니

엄마

마을

비행기

무릎쏴 자세

떨어져 나간 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시간 순서와는 상관없이 뒤죽박죽되면서 그녀의 머릿속에서 마구 튀어 올랐다.

앤 챔버의 뇌는 상반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을 현실처럼 끝도 없이 재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한 화학물질을 계속 분비했다.

그러나 재생이 더욱 빨랐다. 진정시키려는 노력보다 재생에 따른 충격의 강도가 너무 컸다.

폭주하는 기억, 폭주하는 기억에 의해 요동치는 신체를 내부 화학물질만으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뇌는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의식을 끊어 버린 것이다.

한규호는 앤 챔버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앤 챔버의 몸이 무너지는 순간 양 팔로 그녀를 안았다.

“의료진을!”

한규호가 도밍게즈에게 빠르게 말했다.

도밍게즈도 주저하지 않고 무전기를 들어 호텔에서 대기 중인 의료진을 호출했다.

의료진이 오기 전까지 한규호는 내기를 이용해 앤 챔버의 몸을 살폈다.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빠른 것 말고는 특별한 이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규호는 그녀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저 앞에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소녀

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지? 왜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의료진이 도착하고, 앤 챔버를 옆방으로 옮겼다.

한규호는 그들과 함게 이동했고, 의료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의료진은 몇 가지 검사를 통해 위급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병원에 갈 필요까지는 없고 안정 상태를 유지하면서 추이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혈당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 식사가 언제였나요?”

그녀에게 수액을 놓으면서 의사가 물었다.

한규호는 알 수 없었다. 첫날 저녁을 제외하고는 같이 식사하지 않았으니.

그때 앤 챔버의 입에서 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렸다는 신호였다.

“정신이 들어요? 내 말 들려요?”

의사가 스페인어로 물었다.

그 말에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죠?”

의사가 물었다.

“....카라카스요.” “제 손가락 보이십니까? 몇 개입니까?”

“....... 세 개요.”

앤 챔버가 말했다.

“좋아요. 다행이네요. 마지막 식사는 언제였죠?”

의사가 다시 물었다.

의사에 질문에 앤 챔버는 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언제 먹었지? 어제는? 어제 저녁은 안 먹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워 밥 생각이 없었다. 점심은? 점심도. 습격 이후에 진정되지 않아서. 아침도 먹지 않았다. 아침 일찍 찾아와 사진과 현상수배 전단과 실종된 베네수엘라 측 인사에 대해 설명하던 아고스토 덕

분에.

“........ 그제 저녁.....”

앤 챔버의 말에 의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일단 수액을 놓고 있으니, 이거 다 맞으면 식사부터 하시죠. 아마 저혈당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의사가 말했다.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규호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앤 챔버에게 또 다른 의문점을 찾았다.

5살에 입양되어 스페인어를 하지 못한다던 앤 챔버는 자연스러운 스페인어로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앤 챔버와 한규호가 나간 지 대략 10여분이 흘렀다.

그레이스 박사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눈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으니까.

그래서 내심 도밍게즈도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밍게즈는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은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나가달라고 요청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첫째 날, 아니 적어도 둘째 날 습격 전의 일행의 리더였던 자신의 입지라면 그런 요청이 먹힐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즈키는 계속 도밍게즈의 의견을 물으면서 그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반면에 자신의 입지는 줄어들었으니, 그녀의 말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그레이스 박사가 이제부터 아이에게 할 질문들은 사실적인 질문들이었다. 다시 말해 굉장히 잔인한 질문들이었다. 한규호나 앤 챔버는 스페인어를 모르니 문제가 없을 것이다. 도밍게즈는 알아들을 수 있겠지만 딱히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레이스 박사의 계

산이었다.

하지만 보험을 들어 두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이사님. 여기 질문지입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아고스토에게 질문지를 건넸다.

“제...제가 질문하나요?”

아고스토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지금 이 자리의 인터뷰를 만드신 것은 전부 이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공적을 가로챌 수는 없죠.”

그레이스 박사가 차분한 미소로 답했다.

아고스토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어떻게 하면 이 인터뷰 영상에서 자신이 돋보일까, 그 영상을 바탕으로 어떻게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까. 유엔 본부에서 할 연설에서 어떤 말을 할까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처럼 개인적인 욕심을 내지 않고, 자신에게 이런 영광스런 자리

를 양보하고 있는 것이다.

아고스토는 그레이스 박사의 마음씀씀이에 깊은 감사와 더불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번 인터뷰를 성공시키고, 그래서 남미의 인권을 개선하는 것이다. 내가 하원에 들어가거나 하는 부분들은 전부 부수적인 것들이지. 나는 이번 인터뷰를 꼭 성공시켜 보이겠어. 아고스토는 굳게 결심하면서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맡겨만 주십시오.”

그레이스는 아고스토의 눈에 담긴 감동과 열의를 보았다. 그의 멍청함이 고맙게 느껴졌다.

아고스토는 아이에게 눈을 맞췄다.

“안녕? 아저씨는 아고스토라고 해. 이름이 뭐니?”

아고스토가 물었다.

아이는 답이 없었다. 그저 눈을 깔고 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고스토는 당황했다.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낸다고 했는데, 아이는 거기에 전혀 반응이 없었다.

“저기요. 꼬마 아가씨? 이 아저씨에게 우리 꼬마 아가씨 이름 좀 알려 줄래요?”

아고스토가 다시 물었다. 평소에 새서미스트리트라도 많이 봐둘 것을. 쿠키 몬스터가 어떤 어투로 말했더라?

아이가 고개를 들다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고스토와 눈이 마주지차 흠칫하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아고스토는 답답했다.

왜 아이가 말을 안 하는 거지? 인터뷰를 하겠다고 온 것 아니었어?

그는 원망 섞인 눈으로 까레라를 바라보았다.

까레라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아이에게 다가가려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앤 챔버와 한 손에 수액병을 높이 들고 있는 한규호가 들어왔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8)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