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6) >
16년 전
라 그레시아(La Grecia)
안티오키아, 콜롬비아
“질! 뛰면 위험해!”
올해로 일곱 살을 맞이한 라나 아마도르(Lana Amador)는 앞에서 뛰어가는 막내 여동생 질베르타(Gilberta)에게 소리쳤다.
올해 네 살인 질베르타는 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까르르 웃으며 들판을 뛰어갔다.
라나는 신나서 달려가는 막내 여동생을 열심히 쫒아가고 있었지만, 질베르타는 네 살치곤 뜀박질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질! 언니 말 안 들려? 자꾸 그러면 혼난다!”
“아하하하. 싫어! 싫어! 나 잡아봐 언니!”
질베르타는 언니가 따라오는 게 좋은지 더 힘차게 달려 나갔다.
라나는 그동안 너무 동생의 어리광을 들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코카나무 농장에서 일하는 엄마는 항상 바빴다. 일 년에 네 번을 수확해야 하는 코카나무의 특성상, 농장일은 항상 많았고, 고된 노동에 힘들고 바쁜 그녀의 어머니는 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꼼꼼히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들은 아이들이 키웠다. 라나 자신도, 지금은 보고타로 돈 벌러 떠난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엄마를 대신해 그녀를 돌보았다.
라나는 언니들이 무서웠다. 언니들은 그녀를 엄하게 키웠고, 조금만 잘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다. 특히 언니들의 허락 없이 집을 몰래 빠져나가면 엉덩이가 빨개질 때까지 얻어맞고는 했었다.
라나는 그런 언니들이 무서웠다. 조금 더 자상하게, 조금 덜 엄하게 대해주길 바랐다.
시간이 흐르고, 언니들이 이 마을의 다른 언니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라나가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질베르타의 양육을 맡게 됐다. 라나는 자신이 언니들에게 원했던 것처럼 질베르타를 다정하게 대했고 웬만해서는 혼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 안 듣는 질베르타를 보고 있으면 언니들처럼 엄하게 키울 것을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라나는 질베르타와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동생은 라나와는 다르게 어릴 적부터 힘이 좋았다. 먹기도 잘 먹고, 잠들기 전까지 지치지도 않고 뛰어 놀았다. 그 때문인지 이제 막 네 살이 되었는데 벌써 키가 라나의 코 밑까지 왔다. 엄마
는 질이 110cm나 된다고 하셨다. 이대로라면 내년에는 라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세 살 차이나 나는데 말이다.
라나는 갑자기 질베르타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감히 언니의 말을 무시해! 키만 크면 다야?
이대로 계속 두면 나중에는 아예 언니를 우습게 볼 지도 모른다.
라나는 여전히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질베르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뜀박질로는 동생을 따라 잡을 수는 없지만 라나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질베르타를 잡아서 앉혀놓고 혼을 낼 수 있었다.
라나는 그럴 수 있었다.
라나는 달음질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숨을 골라가며 멀어져가는 질베르타를 끌어 오려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 보고타로 돈 벌러 떠난 큰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라나. 절대로, 남들 앞에서는 보여주면 안 돼. 알겠어?)
큰 언니는 라나를 앉혀놓고 이 말을 몇 번 씩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엄마에게도?)
(엄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언니의 눈은 무서웠다. 원래 무서운 큰 언니이기는 했지만 그날 언니의 눈은 유독 무서웠다.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무서운 눈으로 말했었다.
***
2년 전.
라나가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날, 잠에서 깨어난 라나는 자신에게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라나는 침대에 누운 그대로 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문이 스스로 열렸다. 라나가 원하는 대로.
라나는 다시 문을 닫기를 바랐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라나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 ‘태중에서 모체를 통해 일정량의 트로파코캐인(tropacocaine)을 체내에 축적한 다음 출생 이후 1827일이 지난 후에 염동력(Telekinesis)이 발동한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다섯 살의 라나는 생전 처음
보고 듣는 어려운 단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대로 물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의지만으로. 단순히 의지 만으로.
라나는 신기했다. 새롭고 재미난 장난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래서 라나는 다시 문을 열고 닫았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너무 강하게 닫히는 바람에 문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큰 언니의 외침이 뒤따라왔다.
“라나!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
크게 소리치며 방으로 들어오던 큰 언니는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라나를 보고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 언니! 언니! 이거 봐라!”
라나는 손을 쓰지 않고 머리맡에 있는 컵을 움직여 언니에게로 보냈다. 언니는 천천히 허공을 날아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컵을 보고 움직이지 못하다가 눈앞에 와서야 손을 들어 그 컵을 잡았다.
컵에 작용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물리력이 약하게 느껴졌다.
언니는 공중에 붕 뜬 채로 자신에게 날아와 지금은 손에 들려있는 컵을 자세히 살폈다. 특별할 것 없는, 어젯밤 자신이 물을 따라 라나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던 평범한 그 컵이었다.
라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나 잘했지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언니를 보고 있었다.
언니는 컵을 내려놓고는 재빠르게 침대로 다가와 누워있던 라나의 어깨를 두 팔로 잡았다.
“네가 한 거야?”
칭찬해줄 줄 알았던 언니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라나는 덜컥 겁이 들었다. 혼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네가 한 거야? 지금? 저 컵?”
언니가 다시 무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라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언니의 눈이 무서워서, 그리고 왠지 모르게 슬퍼보여서, 언니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라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라나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언니는 동생의 눈물을 보고는 자신이 라나의 양어깨를 너무 강하게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라나가 자신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언니는 두 손의 힘을 풀고 라나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언니의 품에 안긴 라나는 알 수 없는 서글픔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항상 무섭고 엄하던 언니가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 손길이 따듯해서 한참을 울던 라나는 결국 울음을 그쳤다. 언니가 코에 대준 손수건에 코를 행하고 푼 라나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언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 주었다.
잠에서 깨어났고, 이상한 문장이 머리에 떠올랐고, 그래서 새로운 꼬리가 생긴 것처럼 물건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라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문장들도 언니에게 모두 다 이야기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언니는 라나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오. 성모 마리아시여’라고 말했다.
라나는 큰일났다라고 생각했다. 큰 언니가 성호를 그으며 마리아님을 찾을 때는 보통 라나가 큰 잘못을 했을 때였으니까. 예를 들어 허락 없이 ‘폐허의 언덕’에 올라가거나 한 경우에 말이다.
“라나.”
큰 언니가 무서운 말투로 말했다. 그 말투에 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절대로. 절대로, 남들 앞에서 보여주면 안 돼. 알겠지?”
라나는 언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 남들이 누구를 말하는 거지?
“엄마....에게도?”
“엄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언니의 표정이 너무 단호했다. 너무 단호해서 라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남들 앞에서 물건을 움직이거나 하면 안 돼. 그리고 언니에게 한 이야기도 절대로 해서는 안 돼. 절대로.” 라나가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언니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런 언니의 눈이, 라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이, 너무도 슬퍼서, 라나는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물을 참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라나는 언니의 말을 충실히 따라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생각만으로 물건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마저도.
하지만 언니가 도시로 떠나고, 라나는 그 비밀을 딱 한사람에게만 보여주었다. 바로 그녀의 사랑하는 막내 동생 질베르타에게만.
울고 떼쓰며 말 안 듣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질베르타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인형 한 쌍을 띄워서 결혼식 놀이를 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막내가 허공에서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신랑신부 인형에게 눈길을 빼앗긴 그날 이후, 라나의 비밀을 아는 사람
은 이 세상에 세 사람이 되었다. 큰 언니와 라나, 그리고 막내 질베르타.
라나는 질베르타에게 비밀을 지켜야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몇 번 위험한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예를 들어 어른들이 있는데서 인형을 들고 와 공중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하거나. 그런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들만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
대신 질베르타는 더욱 라나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오늘만 해도 이 폐허의 언덕으로 놀러가자고 한 시간을 울어대는 질베르타에게 져서 결국 여기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질베르타는 가만히 놀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들판을 천방지축으로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큰 언니는 폐허의 언덕이야기만 하면 질겁을 했고, 몰래 집을 빠져놔와 이쪽으로 오기만 해도 엉덩이가 빨개질 때까지 손바닥으로 맞았는데, 질베르타는 라나가 이곳
으로 데려와준 것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이리로 오라는 언니 말도 안듣고 있는 것이다.
라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텔레 어쩌구 하는 어려운 이름의 힘을 이용해 질베르타를 당겨오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만큼은 못 참아. 불러다 놓고 눈물이 쏙 빠질 때까지 혼을 내겠어. 절대로 막내 동생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오늘은 질베르타의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줄 생각이었다.
“질베르타아아!! 언니 화났어!”
라나가 질베르타를 그녀가 서있는 곳으로 당겨오기로 마음먹고 정신을 집중하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손이 질베르타를 살짝 들어 라나 쪽으로 빠른 속도로 데려왔다.
질베르타는 자신을 잡아끄는 무형의 힘에 잠깐 놀랐지만, 금세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가진 힘에 의해 자신이 뛰어다닌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끌려오면서 그녀는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즐거웠다.
“아하하하하”
그러나 질베르타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자신을 끌고 와 꼼짝 못하게 만든 언니가 바로 눈앞에서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질베르타!”
질베르타는 언니의 부름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항상 자신을 사랑스럽게 질이라고 부르는 언니가 이름을 전부 말한다는 것은 언니가 진짜 화났다는 의미였으니까.
“언니....”
“울어도 소용없어. 질베르타! 언니가 몇 번을 불렀어!”
“....어...언니....”
질베르타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라나는 이번에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울어도 소용없다고 했지!”
라나가 매서운 눈으로 크게 소리쳤다.
그 순간 라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염동력이 갑자기 작용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리고 눈 앞에 있던 질베르타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질베르타의 떨림이 염동력을 통해 라나에게 느껴졌다.
강력한, 아주 강력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질베르타의 등 뒤로 새빨간 핏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라나의 눈에 들어왔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