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78화 (79/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5) >

3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언제나처럼 숙면했고, 그가 원한 시간인 6시 30분에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원하는 대로 신체를 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능력은 오직 육체적인 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한 능력이 정신적인 특이점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직감이 있기는 했지만, 직감은 신체가 위험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각성이 일어나는 행위일 뿐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규호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악의가 신경을 콕콕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이런 느낌은 항상 끝이 좋지 않았다.

“흠.......”

한규호는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잠시 생각했다.

9시에 인터뷰를 하고, 시간은 두 시간 정도 잡고. 좀 여유 있게 11시 반에 끝난다 치면 여기서 점심을 먹고 출발해도 되겠군. 시간은 충분하니까.

변수가 있다면 어떠한 게 있을까?

인터뷰가 취소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변수가 될 수 없다.

방위군. 방위군에 대한 변수는 어떠할까?

한규호는 어제 자신을 찾아온 도밍게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방위군은 충분히 변수가 될 요소였다.

베네수엘라 정부, 장관과 차관은?

그들을 노리는 마피아들, 속칭 삼두사. 그들은 어떻게 움직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 망할 놈의 CIA들, 또는 관련 있는 누군가들. 과연 얌전히 집에 가게 둘 것인가?

한규호는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변수가 될 수 있는 사항들을 하나하나 체크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지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들이었다.

한규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일이 터지면 그때 생각하면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누군가를 지키고 구해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다. 여차하면 그 혼자 몸을 빼내면 된다. 그는 그럴 수 있다.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한 질책? 그런 것은 한규호에게 검토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규호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다.

할 수 있어서, 해야 해서가 아니라.

“이제 겨우 3일인데, 한 달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군.”

한규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

조식을 챙겨먹은 한규호는 인터뷰 장소로 예정된 도밍게즈 소령의 방으로 향했다.

아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이미 그곳에는 방주인인 도밍게즈를 비롯해 모든 일행이 자리해 있었다.

한규호의 눈에 부산을 떨고 있는 아고스토가 먼저 들어왔다.

그는 카메라 앵글을 잡는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자신이 잘 나오는 지점을 찾고 있겠지.

그레이스 박사는 인터뷰 질문지로 보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것을 보니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오셨어요?”

들어오는 한규호를 보고 앤 챔버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방주인인 도밍게즈 소령도 그에게 인사했다.

한규호도 그 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앤 챔버의 인사에 잠시 행동을 멈추었던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한규호도 그들을 무시했다.

한규호는 아무 말 없이 빈 소파에 가서 앉았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괜히 인터뷰를 참관한다고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어로 진행될 것이 뻔한 인터뷰에 자신이 있어봤자 알아들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알아듣는다 해도 그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몽니를 부리는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가 괘씸해서, 그래서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는 마음에 인터뷰에 참석하겠다고 말한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뭐. 조금 지켜보고 있다가 나가면 되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꼰 다리를 까닥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여유 있게 보고 있었다.

그때 도밍게즈의 부하 중 하나가 도밍게즈에게 다가와 뭐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도밍게즈는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자 일행이 도착했습니다.”

한규호는 시계를 보았다. 8시 20분이 막 지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어쩌면 오늘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겠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세요!”

그레이스 박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도착했다는 도밍게즈 소령의 말에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는 더 분주해졌다.

더 좋은 앵글을 찾기 위해, 더 적나라한 질문을 찾기 위해, 그 둘의 마음은 급해졌다.

한규호는 그 둘을 보면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른 대사를 한국말로 소리 내어 읊조렸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그 말을 들은 앤 챔버는 궁금증을 담은 눈으로 한규호를 돌아보았다.

***

“뭐라고요?”

그레이스 박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아고스토가 참기자라고 말한 까레라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에 까레라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 오늘 인터뷰를 할 소녀의 초등학교 담임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당당한 표정으로 그레이스 박사의 매서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1층에서 검문검색을 하고,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있는 층에 올라와 다시 한 번 검문검색을 마친 그들이 도밍게즈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까레라와 처음 보는 여자가 인터뷰를 하기 전에 그레이스 박사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담임선생이라는 눈앞의 이 여자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10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레이스 박사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으로 담임교사라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레이스의 눈빛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어떻게 해보라는 의미로 까레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까레라는 어깨를 으쓱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10만 달러. 환율 시장이 무너진 현재 베네수엘라 볼리바르로 환전하면 이 호텔 층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을 담임이라는 여자가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학생이라는 소녀의 몸값으로 말이다.

“편집장!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소!”

아고스토가 까레라에게 항의했다.

분명 까레라 그 자신은 대가를 받기로 했다.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요청한다’는 각서까지 받아 간 그였다.

“저에게 말씀하셔도······.”

까레라가 어색한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레이스는 그 웃음 띤 얼굴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레이스는 다시 담임교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죠? 법적 보호자도 아닌 당신이?”

“보호자인지 아닌지를 박사님이 판단할 사항은 아니죠.”

담임교사는 그레이스 박사의 힐난에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으면 10만 달러를 지불하세요.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요.”

담임교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기자라는 개자식은 인터뷰 대상을 물색하고 주선하면서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요구했고, 담임교사라는 미친년은 인터뷰를 허락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했다.

그냥 다 때려 치고 싶었다.

이 미친 나라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이 미친 나라의 미친 연놈들은 그저 어떻게든 뜯어먹으려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상황이 어떠한지는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여자가 뭔가를 요구하고 있겠지. 어제 저 기자라는 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레이스 박사가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죽일 듯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규호는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시작한 게임이다. 참관인인 자신이 해결해 줄 이유가 없다. 하고 싶지도 않고.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몇 번은 죽이고도 남았을 눈빛을 쏘아대던 그레이스 박사가 자신의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표책(checkbook)을 꺼냈다. 그리고 펜을 꺼내며 여자에게 말했다.

“이름!”

그레이스 박사의 갑작스런 행동에 담임교사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무표정하게 10만 달러를 요구하던 얼굴의 가면이 순간적으로 깨졌다.

“이름을 말하라고 이 창녀 같은 년아!”

그레이스 박사가 강하게 소리쳤다. 담임교사는 그 소리에 놀라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스 박사는 스펠링 확인도 없이 그 이름을 수취인 란에 적었다. 그리고 금액란에 변조가 불가능하도록 정확히 10,000이라는 숫자를 쓰고, 바로 밑에다가 Ten Thousand라고 적었다. 그리고 수표를 찢어 낸 다음 담임교사 앞에 내밀었다.

“여기. 1만 달러가 있어. 이거라도 받고 꺼지든가, 아니면 그냥 꺼지든가 결정해. 5초 주겠어!”

그 모습은 존경받는 여성학자 루시아 그레이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남미 출신 불법 체류 가정의 장녀로, 거친 라티노 커뮤니티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거리의 10대 소녀 루시아 로야(Loya)의 모습이었다.

몇십 년이 지난 오늘 이곳 베네수엘라에서 잊고 싶던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담임교사는 수취인 란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수표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손을 뻗을 뻔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1만 달러는 큰돈이지만, 더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이 그녀의 팔을 멈추게 만들었다.

“10만 달러, 그 밑으로는······.”

“그럼 꺼져 이 창녀야.”

그레이스 박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수표를 구겨버린 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그런 그레이스 박사의 모습에 놀라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오직 한규호만이 놀라지 않았다.

사람은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다. 특히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면 이성이나 도덕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부터 제일 먼저 버려 버린다. 지금 저 담임교사가 그렇고, 그레이스 박사가 그랬다.

지옥 같은 곳을 많이 다녀본 한규호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담임교사의 시선이 바닥에 굴러 떨어진 수표로 향했다.

1만 달러. 아껴 쓴다면 2~3년은 충분히 버텨 낼 수 있는 금액이다.

물론 까레라와 일정부분 나누기는 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많은 돈이기는 했다.

그녀는 까레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까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는 몸을 굽혀 땅에 떨어진 수표를 집어 들었다. 혹시나 찢어진 부분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구겨진 수표를 폈다.

시티 은행의 로고, 그리고 그레이스 박사의 이름과 계좌번호, 자신의 이름, 금액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다는 확인을 마친 후 그녀는 수표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모두가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됐군요. 아이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까레라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규호의 눈에 까레라가 참기자라고 열변을 토하던 아고스토의 망연자실한 표정과 신뢰하기 어렵다던 도밍게즈의 쓴웃음을 짓는 표정이 들어왔다.

***

문을 나간 까레라는 금세 다시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손은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110cm는 넘었을까 싶을 정도로 작고 왜소한 아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까레라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한규호는 그 아이를 보자 순간적으로 얼굴에 경멸이 드러났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레이스와 아고스토를 노려보았다. 경멸은 분노로 바뀌었다.

아이였구나. 인터뷰 대상이!

그레이스와 아고스토는, 특히 그레이스는 한규호가 자신에게 분노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모른 채 아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빛이 바랬지만 그래도 깔끔해 보이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 색 치마를 입은 소녀, 얼굴에는 가난이 묻어있고, 눈은 공포에 물들어 있는 왜소한 소녀는 그레이스가 인터뷰를 계획했을 당시부터 상상했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입에 담던 까레라의 비열한 얼굴, 10만 달러를 요구하던 담임이라던 여자의 뻔뻔한 표정, 자신을 핍박하던 스즈키, 주제도 모르고 자신에게 대들던 앤 챔버, 눈치도 없이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고 날뛰던 아고스토를 모두 잊어버릴 만큼 완벽한 소녀

였다.

떨리고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베네수엘라의 참혹한 현실을, 가족들이 인신매매 범죄에 희생당한 이야기를 진술하는 영상이 뉴욕의 UN 본부에서 상영되고 그 영상을 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악!”

그런 그녀의 생각은 옆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방해 받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의 행복한 상상을 깨버린 소리의 근원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앤 챔버가 서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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