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76화 (77/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3)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규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두 팔로 머리를 받친 상태로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 화면에는 여전히 텔레노벨라가 방영되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잊기 위해서인지 텔레노벨라는 더욱 사랑에 집착하고 있었다. 사랑, 배신, 불륜,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자극적인 음악과 버무려져 영상으로 흘러나왔다.

한규호의 시선은 티비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앤 챔버에 대한 생각이었다.

앤 챔버와 그레이스 박사가 이야기를 나눈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그저 국무부의 인턴이라고 하는 23세의 젊은 여자가 평생을 학계에서 치열하게 싸워온 여자를 어떻게 굴복시킬 수 있었을까?

언변? 무력?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답은 하나뿐이다.

권력.

앤 챔버는 그레이스 박사의 입을 닫게 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만이 있던 그 시간에 그 권력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레이스 박사는 꼬리를 말았을 것이다.

한규호는 그 권력이 자신과 연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트레이시가 그를 이번 방문에 끌어들인 이유는 단순히 경호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어떠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관찰을 통한 정보수집 같은.

그렇다면 앤 챔버는 CIA 요원인 것일까? 그래서 그 지위를 활용해 그레이스 박사를 압박했을까?

한규호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요원의 냄새가 나질 않는다. 피 냄새든, 아니면 요원 특유의 비열한 냄새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요원이라 하더라도 그레이스 박사가 CIA 요원이라는 지위에 눌릴 사람일까? 학계에서 평생을 백인 주류와 싸워온 저 여자가?

한규호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내일이면 이 일정도 끝이 난다. 그때까지 이 호텔에서 다른 이들을 한 발자국도 내보내지 않는다면 별 일은 없을 것이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한규호의 상념을 깨웠다. 한규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티비를 끄고 거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도밍게즈 소령이 서 있었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들어오시죠.”

한규호가 그를 안으로 들였다.

도밍게즈가 거실로 들어오자 한규호는 그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한규호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차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밍게즈가 말했다.

“내일 떠난다는 약속만 한다면 인터뷰는 진행해도 좋다는 전언입니다.”

“그렇습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조금 전 그가 자신의 편에 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괜찮은 군인에게 뭔가 대접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럼 감사히.”

도밍게즈가 말했다.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니바로 가서 적당히 마실 것을 챙겨 그의 앞에 놓았다.

“조금 전에는 감사했습니다.”

한규호가 도밍게즈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인사에 도밍게즈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규호는 도밍게즈가 마음에 들었다. 한규호 그 자신이 군인 출신이라서, 그래서 기강이 잘 잡혀있는 도밍게즈나 그의 부하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아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한규호가 병뚜껑을 따며 슬쩍 말했다.

까레라인지 뭔지 하는 기자에 대해서 아고스토가 소리칠 때, 도밍게즈의 표정이 살짝 변하는 것을 한규호는 알아챘다.

도밍게즈도 한규호가 그 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음료수를 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까레라 기자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언가 알고 계십니까?”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우선 그 자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같이 어째서 당시에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가 미쳐 날뛰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니.

“인터뷰를 취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도밍게즈는 한규호의 어법이 마음에 들었다. 왜 그 당시 그걸 말하지 않았냐는 식의 대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런 무익한 말 대신 바로 실무진으로써의 자신의 의견에 대해 묻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밍게즈는 대답 대신 한규호에게 물었다.

“흠.....”

질문을 받은 한규호는 생각했다.

“시간이 늦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방위군께서 호텔을 경호해 주고 있으니까요.”

“저희를 신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저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한규호가 반문했다. 그 질문에 도밍게즈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한규호는 살짝 웃었다.

솔직한 친구로군.

“부대를 잘 훈련시키셨더군요. 믿음직한 군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 또한 당신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군요.”

한규호가 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범죄조직이야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조심해야 할 부분들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내부의 쥐라던가.”

한규호는 민감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방의 호감을 얻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말을 조심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직접적으로 말했다.

쥐, 정보를 외부로 흘리는 쥐가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그런 의미를 한규호는 전달했다.

“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규호가 되물었다.

도밍게즈는 한규호의 눈을 말없이 십여 초 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2일차

라과이라 항(Puerto de La Guaira)

바르가스 주(州),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관문항만이자, 베네수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물동량을 처리하는 라과이라 항은 해가 졌음에도 하역 작업이 한참이었다. 2000TEU 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선석에는 차이나-코스코 쉬핑의 4000TEU급 선박이 열심히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하

고 있었다.

항구 정문 앞에 위치한 12층 빌딩의 최상층에서 레니 페레아, 일명 푸에르토 카르텔의 수장은 쌍안경을 들고 그 하역작업을 보고 있었다.

남미,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로 라과이라 항을 연결하는 컨테이너 항로가 속속 중단하는 가운데 중국의 해운회사인 차이나-코스코 쉬핑은 여전히 항로를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선복량(Space)을 늘릴 계획도 있다고 했다.

경제위기는 기존의 시장을 무너트렸고, 암시장과 밀수 산업의 폭발적인 확장을 가져왔다. 라과이라 항만을 지배하는 엘 푸에르토 카르텔, 그리고 푸에르토에게 있어서는 황금기를 맞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수입할 물건도, 수출할 물건도 그에게는 너무 많았다.

그런데 항로가 줄어들면서 기항수가 감소했다. 위기가 찾아온 상황에서 차이나-코스코 쉬핑은 여전히 꾸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푸에르토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오늘 들어오는 물건은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제조용 나사로 위장되어 있는 화학 약품은 하역 후에 콜롬비아로 넘어가게 된다. 콜롬비아에서 그 화학 약품은 마약을 생산하는데 쓰이고, 거기서 만들어진 마약은 다시 라과이라 항

을 통해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푸에르토가 소유한 회사 ‘라과이라 로지스틱스 컴퍼니’라는 이름의 NVOCC(무선박운송인, 복합운송주선업)가 이 일을 처리해서 벌어들이는 돈은 막대했다. 물류가 돈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눈치 챈 푸에르토 삼촌의 혜안은 놀라웠다.

물론 푸에르토의 회사는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처리했다. 마약과 총기는 물론 국제조약에 의거해 거래가 금지되어있는 모든 물건들을 수출하고 수입했다. 세계자연보전연맹이 위기(Endangered)등급을 분류해 놓은 안데스산고양이(Leopardus jacobitus)만 해도 백

여 마리가 이 항구를 통해 해외로 반출됐다.

밀수의 프레임은 바뀌었다. 예전처럼 사람을 동원하고, 땅굴을 파고, 잠수함을 이용하는 방식은 구닥다리가 되었다.

회사를 만들고, 서류를 조작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했다. 문제가 생기면 회사를 닫고, 다른 회사를 만들면 된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미국 법인은 세무당국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푸에르토는 그저 앉아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제위기가 그에게는 축복이었다.

“보스. 전화가 왔습니다.”

쌍안경을 통해 한참 하역 작업을 지켜보던 푸에르토에게 부하 중 하나가 다가와 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 표시된 번호는 엘 오로의 번호였다.

만나고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푸에르토는 쌍안경을 내려놓고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부하들에게 손짓을 하자, 사무실을 채우고 있던 부하와 직원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사무실을 나갔다.

100평이 넘는 사무실에는 푸에르토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푸에르토 형제. 잘 들어가셨는지요.)

엘 오로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엘 오로 형제.”

푸에르토가 물었다.

(상담할 게 있어서요. 괜찮으신가요?)

푸에르토는 이 자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다. 셋 중 가장 배운 게 많고, 음험한 자식이 바로 전화를 걸어온 엘 오로니까.

“상담이라니? 무슨 말이지?”

(미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 내일 오후 비행기로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잘 되었군.”

(근데 아마 더블 티 형제는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다르다니? 무슨 말이지?”

(더블 티 형제는 어떻게든 피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리하게 움직일 것 같아서 걱정이 되는군요.)

푸에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블 티. 푸에르토 그 자신과는 달리 대학까지 나온 사회운동가였다가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인 남자.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향후 베네수엘라의 정치권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하는 남자.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을 동

시에 가지고 있는 그 미친놈이라면 뭔가 하고 싶어 할는지도 모른다.

“뭐. 더블 티 형제가 움직인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 우리는 평등한 사이지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지시 받는 수직 관계가 아니니까.”

(형제의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입니다. 그 수평적 관계에 금이 갈까 봐 말이죠.)

푸에르토는 그 소리에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들어본 개소리였다. 수평적 관계는 금이 갈 수 밖에 없다. 그 시점이 언제인가를 모를 뿐이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관계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푸에르토 형제. 형제는 인프라를 가지고 있죠. 항만과 공항, 저는 돈과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블 티 형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냄새 나는 바리오와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좀비들뿐이지.”

(외부의 시선도 그렇습니다. 수평적 관계라고 해도, 보통 푸에르토 형제를 첫 번째, 저를 그 다음으로 놓고, 더블 티 형제를 마지막으로 보고 있죠. 하지만 저는 이게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지?”

(더블 티 형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바리오와 부하들이 아니라 민중이니까요.)

“민중?”

(그렇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민중이고, 그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민심입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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