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75화 (76/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2)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다시 아고스토의 방에 모인 다섯 사람, 그레이스, 아고스토, 앤 챔버, 한규호, 그리고 도밍게즈 소령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고스토는 자신도 모르게 한규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표정한 한규호의 얼굴에서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을 꺼낸 것은 도밍게즈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인터뷰 시간은 최소 한 시간, 더 길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도밍게즈가 아고스토를 보며 말했다. 그 시선이 곱지 않았다.

아고스토는 그 시선을 보며 찔끔했다.

“내일 마이애미 행 비행기의 이륙 시간은 오후 6시입니다. 그 말은 공항에 4시, 아무리 늦어도 5시까지는 도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곳에서 공항까지 거리는 약 40km 정도이고, 교통상황을 감안한다면 한 시간 삼십 분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출발 마지노선은 3시 30분입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도밍게즈 소령의 말에 아고스토는 왜 자신에게만 뭐라고 하는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고스토와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랬다.

오늘 그들을 만난 기자는 인터뷰는 주선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약속할 수는 없다. 최대한 오전 중에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하겠다. 하지만 오전 중이라고 확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터뷰 대상자가 호텔에 도착하면, 인터뷰는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 단 둘이서 진행한다. 앤 챔버는 거기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관하게 되고, 한규호는 인터뷰에서 배제된다.

만약에 인터뷰가 늦어지거나 길어지게 되면 하루를 더 보내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하루를 더 있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저는..... 부탁드리고 싶어요. 꼭 인터뷰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제발 대승적 차원에서 봐 줬으면 좋겠어요,”

그레이스 박사는 허공을 주시하며 말했다. 한규호는 그녀가 하는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레이스 박사는 절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인터뷰를 제외하고, 아니, 출국 전까지 나머지 사항들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지시를 따르도록 할게요. 움직이는 것도, 밥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모두 다.”

여전히 허공을 주시하는 그녀의 시선에 감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한규호는 그 시선에 묻은 감정이 고까움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그저 인터뷰를 하고 싶을 뿐이다.

한규호는 도밍게즈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시선으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도밍게즈도 한규호가 자신의 의견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견을 꼭 말해야 한다면 당연히 인터뷰고 뭐고 상관없이 당장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모르는, 오직 도밍게즈만 아는 사실이 있었다. 호텔로 찾아온 기자가 개자식이라는 사실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베네수엘라 대표 일간지 엘 나씨오날(El Nacional)의 기자였던 살바도르 까레라가 엘 나씨오날을 그만두고 이름도 모르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유가 범죄조직과의 유착 때문이라는 것을, 기자라는 직위를 이용해 돈과 권력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것을, 지금 이 방 안에서 도밍게즈만 알고 있었다.

“제가 어떤 의견을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밍게즈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 이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은 스즈키, 그가 유일했다.

한규호는 도밍게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 박사에게 물었다.

“그 기자는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오!” 그레이스 대신 아고스토가 외쳤다.

“베네수엘라 최대 일간지인 엘 나씨오날의 기자였다가, 친정부 성향을 강요하는 편집장과 싸우고 회사를 그만 둘 정도로 신념을 가진 이 시대의 참 기자요!”

아고스토가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도밍게즈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가 들 정도였다.

한규호도 후회했다.

아고스토가 이렇게 날뛰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애초에 서열을 확실하게 정해 놓았어야 했는데. 이 어설픈 정치꾼은 자신이 말할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날뛰고 있었다. 처음 한 두 번은 귀엽다 넘어가도, 계속 반복되니 처음에 분위기를 잡

아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한규호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고 시선을 돌려 앤 챔버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앤 챔버는 한규호의 질문에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저는....”

한규호는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언뜻 보이는 반지를 보았다. 어린애 손가락에나 들어갈 정도의, 손가락에 가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반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저는....”

앤 챔버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한 앤 챔버를 보면서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민주주의 혁명은 실패했다. 스즈키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다. 그레이스, 아고스토, 그리고 앤 챔버가 남겠다는 의견을 제시해도 스즈키가 떠나버린다고 말하면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여론이란 중요했다. 앤 챔버가 만약 자신에 편에 선다면, 하루를 더 지체하더라도 인터뷰를 진행하겠다는 의견을 말한다면, 스즈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저는. 가능하다면 인터뷰를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앤 챔버가 말했다.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힘들게 만든 기회인데.... 그냥 이대로 이렇게 끝나는 건....”

앤 챔버는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해야 스즈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됐다.

“호텔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그러니까.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하루를 더 머무르는 것은..... 미스터 스즈키가 결정하시면 그대로 따른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규호는 그 말을 듣고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령님.”

한규호가 도밍게즈에게 물었다.

“하루 일정이 더 연장된다면 방위군은 호위 임무를 계속 하실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애초에 1주일 기한이었고, 여유를 두고 여러분들이 도착하신 날부터 10일간을 작전 기간으로 예정해 놓았습니다.”

“호텔과 항공편은 어떻게 됩니까?”

“그 부분은 차관님 소관입니다. 만약 모레 떠나신다고 한다면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앤 챔버와 독대 이후 처음으로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그녀가 편을 들어준 덕에 분위기가 그레이스 박사가 원하는 쪽으로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그레이스 박사는 재빠르게 고마운 마음을 지웠다.

자신에게 전화를 건네주던 그 표정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건방진 표정은 절대로.

모두의 시선이 한규호에게 모였다. 특히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였다.

“우선은 알겠습니다. 인터뷰 시간이 된다면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으로 하지요. 다만 거기에는 저도, 그리고 도밍게즈 소령도 참석합니다.”

한규호는 도밍게즈를 보면서 물었다. “소령님. 배석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도밍게즈 소령은 어깨를 으쓱하며 문제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니. 미스터 스즈키!”

아고스토가 입을 열었다.

“아직 말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제 말이 끝나도 아무 말 하지 마시고.”

한규호가 아고스토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고스토는 눈치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성장도, 이민도, 미국에서 불법 체류기간 동안에도, 그리고 영주권을 획득하고, 시민권으로 변경하고, 중고차 사업을 시작하면서 돈을 벌고, 번 돈을 기반으로 커뮤니티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는 모든 과정을 그의 눈

치 하나로 해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눈치가 지금은 입 닥치고 있어야 할 때라고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스즈키의 눈빛이 맹수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인터뷰가 늦어지면 취소합니다. 내일은 무조건 출발합니다.”

한규호가 말했다. 도밍게즈와 앤 챔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

2일차

베네수엘라 연방정부 건물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여성부의 바렐라 장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산타나 차관이 가져온 소식에 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러니까.”

장관은 그 자세 그대로 두 눈을 감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겠다? 호텔로 불러서?”

차관은 장관의 목소리에 담겨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분노? 체념? 확실한 것은 절대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차관의 대답에 장관은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은 그 자세 그대로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장관의 입이 열렸다.

“..... 미친.....년.”

산타나 차관은 장관의 입에서 이런 상스러운 말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남미 인권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학계에서 존경받는 노교수의 입에서 미친년이라는 단어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장관은 손을 내렸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고 산타나 차관을 바라보았다.

“안된다고 말 하시오.”

“이미.... 말 했습니다만....”

산타나 차관은 장관이 요 몇 달 동안 많이 늙었다고 생각했다. 한때, 베네수엘라 중앙 방송국 앙케이트에서 가장 섹시한 60대에도 들었던 노신사는 이제 완전히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지시를 듣지 않겠다면 보호도 할 수 없다고 전해! 방위군을 철수시켜! 그러고 나서 인터뷰를 하든, 바리오를 찾아가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산타나 차관은 격하게 소리치는 장관을 그저 아무런 반응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격하게 소리친 장관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산타나 차관은 말없이 계속 기다렸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오. 내일 떠나기만 한다면......”

장관은 힘없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방위군은?”

차관이 물었다. 감정적으로 외치기는 했지만 장관은 분명 방위군을 철수시키라고 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놔두시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산타나 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

2일차

CIA 위장기업 Dover American Insurance Co.

시애틀, 워싱턴 주, 미국

층 전체가 보안구역으로 설정된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본사 건물 28층, 그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경영감사 부사장실에서 밀러 국장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애틀에서 약속된 18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랭리로 가야 할 때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실 그는 어서 빨리 랭리로 가야 했다. 대통령 보고도 있었고, 하원 국방위 회의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 다른 곳에서 녹화된 한규호의 클로즈업 영상을, 그리고 영상 분석 자료도 빨리 봐야 했다.

현재 CIA의 최고 수장에게 있어서 기프티드라는 존재와 한규호, 임시 인식코드 스튜(stew)보다 더 시급한 사안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알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 방에 실제 주인,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경영감사 부사장이 들어왔다.

“아직 안 가셨네요? 시간 괜찮아요?”

초등학교 교사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백인 중년 여성, 트레이시가 선택을 하던 그 순간에 네일 밀러 국장과 동석했던 중년 여성이 국장을 보며 말했다.

국장은 시계를 봤다.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기는 했다.

“뭐라고 하던가?”

“마지막 저격은 취소하셨던데요?”

중년 여성이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말했다.

오늘 계획된 세 가지 작전, 오전의 저격,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서의 습격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마지막, 오늘 밤에 예정된 저격, 한규호의 호텔 객실을 저격한다는 작전을 밀러 국장은 취소시켰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프티드임이 확실하니까.

“뭐라고 했나?”

밀러 국장이 다시 물었다.

중년 여성은 국장의 채근에 입술을 삐쭉거리고는 투덜거렸다.

“항상 그렇게 본인이 할 말만 하면 안 피곤해요? 그러다 나중에 국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친구가 하나도.... 알겠어요. 참나. 어린애처럼 보채긴.”

중년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그 특유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고 했어요. 뭔가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밀러 국장은 약간 실망했다.

“다른 것은?”

“우리 미스터 스튜는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 정도?”

밀러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시애틀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참으로 정 없는 사람이에요.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 위험한 곳에 그 애를 보내놓고서는?”

중년 여성이 일어서는 밀러 국장에게 투덜거렸다. 밀러 국장은 그 말에 중년 여성을 바라보았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나?”

밀러 국장이 매서운 눈으로 물었다.

“어머. 참 진짜 무슨 농담을 못해요. 그냥 하는 말이에요. 아니. 위험하기는 하지. 사람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곳에 딸을 보낸 내 마음은 어떤지 알기나 하는지. 참나.”

국장에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 ‘기프티드’의 진실을 아는 CIA의 기밀전담 특수 요원.

그리고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의 경영감사 부사장인 신시아 챔버(Cynthia Chamber)는 그렇게 투덜 거렸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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