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1)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그레이스 박사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에 앞에 앉아 있는 기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이 개자식이 한 말이 믿기질 않았다.
“다시 말해 봐요.”
그레이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Reporte24라는 인터넷 신문의 편집장인 살바도르 까레라(Salvador Carrera)는 그레이스 박사의 그런 눈빛과 외침을 여유 있게 받아 넘기고 있었다.
“증인보호프로그램. 새 신분, 시민권, 새 집, 새 직장, 그리고 FBI의 완벽한 보호. 다시 한 번 더 말해드릴까요?”
뻔뻔하게 다시 말하는 그 모습에 그레이스 박사는 화가 났다. 그 화난 표정을 보며 까레라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처음 전화가 왔을 때, 미국에서 한 번 만난 적 있는 허풍선이 정치꾼 지망생이 카라카스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까레라는 그저 여자나 소개시켜 주고 술이나 얻어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허풍선이와 통화가 되고, 그들이 인터뷰를, 그것도 가족 중 인신매매 피해를 입은 어린아이와의 인터뷰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수고비는 꼭 달러로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베네수엘라 제 5 방위군, 그것도 카라카스에서 가장 기강이 잡혀있다는 도밍게즈의 특수부대가 호텔을 지키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방위군의 ‘보호’를 받은 까레라 편집장은 그레이스 박사 일행을 만나기 위해 상당히 엄격한 검문검색을 받았고, 그 와중에 자신
이 어쩌면 복권에 당첨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1등 당첨금을 수령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지옥 같은 조국에서 떠날 수 있는 당첨금을.
아고스토도 놀란 눈으로 까레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알던 까레라는, 물론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속물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착하고, 겸손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베네수엘라 최대의 일간지인 엘 나씨오날(El Nacional)의 기자로 있다가 정부의 마이크 노릇을 하는 편집장과 한 판 붙고 사표를 던지고 나온 신념 있는 기자였다. 그런데, 카라카스에서 만난 지금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예전의 그 까레라가 아니었다.
인터뷰 대상을 거래대 위에 올려놓고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물건값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까레라 편집장.... 그거 농담이겠지요? 그렇죠?”
아고스토가 까레라에게 말했다. 아고스토 본인이 컨택한 인물인데,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일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조금 전, 그가 방을 들어왔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7살 소녀. 7남매의 막내. 둘째 언니는 실종, 넷째 언니는 돈 번다고 외국으로 나갔고, 바로 윗언니는 양아버지라는 사람에 의해서 얼마 전 정식으로 팔렸다고 했다.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그레이스 박사에게, 아니, 아고스토가 하원의원이 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인터뷰이였다.
그런데 까레라가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을 위한 일인데 조건을 이야기하다니!
“농담이라.... 제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까레라의 안광이 빛났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그레이스는 아고스토처럼 순진하지는 않았다. 기자가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아마도 돈, 그것도 미국 달러로. 적절한 금액은 생각해놓고 있었다. 대략 1000달러 정도를.
그런데 지금 이 개자식은 아이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도 안 되는 값을 부르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고 장사를 하겠다는 심보도 괘씸한데, 부르는 가격은 더 괘씸했다. 그레이스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말이 안 됩니까?”
까레라가 그레이스에게 말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말이 안 됩니까? 시장에서는 썩은 고기를 팔고, 청년은 마약을 팔고, 소녀는 몸을 팔고, 아비는 자식을 파는 이 지옥에서 말이 되는 건 뭐고 안 되는 건 뭡니까?”
까레라가 말했다.
“당신들도 팔 수 있어요. 보셨나요? 그레이스 박사님 사진이 떡하니 박힌 현상수배 전단을?”
“편집장!”
아고스토가 책상을 쳤다. 그러나 까레라는 그런 아고스토의 행동에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편집장! 우리는 베네수엘라를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우리의 숭고한 의지에 침을 뱉고 있는 겁니다. 조건을 말하고 조율하고 할 사항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고스토가 열변을 토했다.
한규호는 그런 아고스토를 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싸구려지만 정치인의 기질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까레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나도 당신처럼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까레라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당신처럼 미국 시민권이 있고 방위군이 경호하는 안전한 호텔에 숨어서 베네수엘라를 위한 숭고한 의지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단 말이죠. 문제는 나는 언제 목이 잘려나갈지 모르는 카라카스의 신문쟁이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까레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꼈다.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증인보호프로그램, 정식 명칭 ‘미 연방정부 증인보호프로그램(United States Federal Witness Protection Program)’을 두 사람은 약속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CIA가 붙여준 저 남자라면 도와줄 수 있을까? CIA 요원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라면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앤 챔버도 떠올렸다. 앤 챔버는 국무부의 단순한 인턴이 아니라 차관보와 커넥션
이 있는 인물인데, 그녀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레이스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그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준다고 해도 그들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일은 나의 일이다. 신념 따윈 없는 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박사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알겠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까레라의 눈이 커졌다.
“알겠어요. 증인보호프로그램 요청을 하도록 하죠.”
그레이스 박사가 다시 말했다.
“요청을.... 한다는 말씀은...?”
까레라가 물었다.
“증인보호 프로그램이라는 것은 단순히 비자 같은 게 아니에요. 준비과정에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절차도 복잡해요. 며칠 사이에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실 테죠?”
그레이스가 말했다. 이미 당겨진 화살이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
아고스토는 옆에서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 박사를 보고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에게 저런 권한이 있었던가 생각하면서.
까레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청(solicitar)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 요청이라는 것은 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이 아닌데.....”
“나옵니다.”
의심하는 까레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스 박사가 말을 잘랐다.
“요청하면 허가가 나옵니다.” 그레이스 박사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을.....”
그레이스 박사가 또 말을 잘랐다.
“미국과 베네수엘라 사이의 외교관계는 박살이 났어요. 양국 정부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번 방문을 성사시킨 사람이 나예요. 나를 지키고 있는 저 사람들이 누구죠? 카라카스 방위군 아닌가요?”
까레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베네수엘라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5방위군, 그것도 도밍게즈의 군인들이다.
“믿어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단순한 대학 교수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전권을 부여받은 전권대사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레이스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까레라는 그 단호함에 기가 눌렸다.
“그....그렇지만.”
까레라는 말을 더듬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레이스 박사의 단호한 태도에 어느 순간 기세가 넘어갔다.
“그렇지만... 아무런 서류도 없이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믿지 못하겠다면 나가세요.”
그레이스 박사가 또 말을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을 뻗어 직접 문을 가리키며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세요. 믿지 못하겠다면. 당신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그레이스는 화가 났다.
인터뷰 대상을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한 몫 챙기려는 저 쓰레기 기자 놈에게 화가 났다. 경호원 주제에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스즈키라는 아시아 놈에게도 화가 났다. 조금 일찍 결혼했다면 딸 나이 정도 밖에 안됐을 앤 챔버가 자신을 무시하고 차관보를 끌어들
인 것에도 화가 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돌아가라고만 말하는 여성부 장관에게도 화가 났고, 귀한 손님이 습격당했는데도 평소와 같이 돌아가는 이 쓰레기 같은 도시에도 화가 났다.
그녀는 화가 났다.
“나가. 필요 없어. 당신만이 인터뷰 대상을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웃기는군. 뭐라고 했지? 시장에서는 썩은 고기를 팔고, 청년은 마약을 팔고, 소녀는 몸을 팔고, 아비는 자식을 팔고, 그런데 못 팔게 뭐냐고? 우리도 팔 수 있다고?”
그레이스는 매섭게 소리쳤다. 그동안 쌓였던 화를 다 까레라에게 쏟아냈다.
“어디서 감히 미국 정부의 전권대리인을 협박해! 당장 꺼져 이 쓰레기 자식! 네 놈은 두 번 다시 미국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이 쓰레기야!”
한규호는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스페인어로 소리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 입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스튜어디스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국 텍사스 A&M 대학 인권문제 연구소 공동 소장, 미국 국무부 남미협력센터 고문, 유엔인권위원회 상임 위원에 어울리는 품격과 언행을 갖추고 있던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광기에 미쳐 날뛰는 마녀가 되어 있었다. 같은 사람 안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한규호는 완을 떠올렸다. 그녀도 다른 인격을 나타냈다. 저 미쳐 날뛰는 그레이스 박사와는 정반대로.
아고스토도 그레이스 박사가 폭발하자 놀랐다. 그녀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나 아고스토의 정치 본능은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나설 때라고 그를 부추겼다. 상황이 꼬였을 때, 상황을 해결하는 중재자로써 인자한 아고스토가 나설 때라고 그의 싸구려 정치
본능이 그를 움직였다.
“자. 자. 진정하시고. 박사님. 우선 진정하세요. 박사님.”
아고스토가 그레이스 박사를 말렸다. 허락 없이 그레이스 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거리며 진정시켰다. 그 손에 그레이스 박사의 브래지어 후크가 느껴졌다.
“박사님. 진정하시죠. 제가. 제가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고스토는 씩씩거리며 까레라를 노려보고 있는 그레이스 박사를 잡아 끌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시선을 까레라로 돌렸다.
“까레라 편집장.”
까레라는 아고스토가 자신을 부르자 놀란 눈빛으로 아고스토를 바라보았다.
“편집장. 정말 실망이요.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인 줄 몰랐소. 하지만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드리도록 하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오.”
아고스토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드캅 굿캅은 고전이다. 고전은 언제나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고 굿캅에는 나 아고스토가 어울린다. 정치인은 언제나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표를 줄 유권자가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더더욱. “...........”
까레라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소. 할 수 있겠소?”
아고스토가 답을 채근했다.
***
앤 챔버는 자신의 침실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앉아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그녀의 양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도, 다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삼촌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말이지. 몇 번이나 우리 앤이 괜찮은지 묻더라니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양어머니의 목소리에 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딸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니?)
양어머니가 물었다.
한숨을 쉬고 앤은 첫 번째 통화와 두 번째 통화 사이에서 있던 일들을 양어머니에게 말했다. 일행들이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반응했고,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를. 그 이야기를 들은 양어머니는 앤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 그냥.”
(괜찮아. 엄마에게 말해보렴.)
“그냥. 그레이스 박사님이 원하는 대로 인터뷰 하나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엄마는 걱정인 것이, 인터뷰를 한다면 당장 내일 비행기를 못 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말이지.)
“...... 삼촌은 뭐라고 하셨어요?”
(삼촌은 그저 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 엄마는 걱정이 되어서. 괜찮겠니? 하루 더 있게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위험한 것은 아니지?)
앤은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양어머니의 질문에 울컥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느꼈다. 위험하지 않느냐고? 당연히 위험하다.
“위험하지 않아요.”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하지 않다. 그게 앤 챔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래. 앤이 그렇다면야. 앤. 몸조심해야 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양어머니와의 전화는 끝났다.
앤 챔버는 전화기를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자신도 침대에 누워버렸다.
위험하다의 정의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위험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위험하지 않은 것일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위험한 것일까?
지금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으니 위험하지 않은 것일까?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면 위험하지 않은 것일까?
머다이나(Medina)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위험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앤 챔버는 손을 뻗어 목 옆으로 흘러내려 있는 목걸이를 잡았다. 쇄골 라인에 딱 맞는 길이의 프린세스 목걸이에는 펜던트 대신 은으로 된 묵주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성인의 새끼손가락에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묵주 반지였다.
앤은 엄지와 검지로 그 반지를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Sonrie, es un mal dia no una mala vida.”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