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73화 (74/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0)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두 분 다에게.”

앤 챔버가 말했다.

한규호는 앤 챔버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들을 다시 지키겠다고,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겠다고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앤 챔버는 마치 한규호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자신이 아직 대답하지 않은 것을 상기시킬까 하다가 앤 챔버가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보고 싶었기 때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 챔버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레이스 박사가 얼마나 이번 포럼을 위해 노력했는지, 정확히는 남미의 여성인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 사실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포럼이 취소되고, 이대로 마냥 손 놓고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레이스 박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으로 인터뷰를 만들려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였다.

“미스터 스즈키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렇다면 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내일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호텔 안에만 있도록 하겠습니다. 절대 허가 없이 이동하거나 외부로 연락을 취하지도 않도록 할게요.”

한규호는 아고스토가 왜 앤 챔버의 말을 들어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천성적으로 말에 에너지를 담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호소력 있는 말투. 앤 챔버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레이스 박사의 일행 중 한명으로 조용히 있을 때 목소리와 지금 상황을 주도하면서 의견을 제시하는 상황에서의 목소리도 다르게 느껴졌다.

한규호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한규호는 앤 챔버를 바라보며 속으로 물었다.

넌 누구지?

그러나 그는 그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시선을 도밍게즈에게 돌렸다.

“아까 말한 손님이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저희가 1층에.... 보호 중입니다.”

도밍게즈의 말에 한규호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억류를 보호라고 자연스럽게 고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군요. 그럼 그대로 잠시만 더 보호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도밍게즈의 답을 들은 한규호는 시선을 다시 앤 챔버에게 돌렸다.

“어떻게 된 거죠?”

앤 챔버는 대답 대신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님?”

앤 챔버가 그녀를 불렀다.

그레이스 박사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앤 챔버를 보았다. 앤 챔버도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는 눈싸움을 벌였다.

그레이스 박사도 앤 챔버가 갈등을 조절하고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망쳐버린 분위기를 그녀가 수습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정할 순 있어도 고맙지는 않았다. 그레이스 박사가 눈에는 아직 핏덩어리인 그녀가 지금 이렇게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자를 불렀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지금은 마음에 들고 아니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니까.

“인터뷰를 하나 진행할 생각이에요. 포럼은 취소되었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인터뷰를 하나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고스토 이사님이 아는 기자에게 접촉했고, 그를 통해 인터뷰 대상을 물

색할 생각이에요.”

한규호가 도밍게즈를 돌아보자 도밍게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1층에서 보호받고 있는 사람이 그 기자인 듯 했다.

“내일 출국 전까지 인터뷰가 가능하겠습니까?”

도밍게즈가 물었다.

“당신들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가능했을 것이요!”

아고스토가 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나 잘했지 하며 칭찬해 달라는 눈빛으로.

그레이스 박사는 눈을 감았다.

필요에 의해 같은 편이 되었지만, 상황파악 못하는 이 남자를 같은 편으로 둔 것이 잘한 짓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앤 챔버도 그런 아고스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열심히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저 남자가 의도를 가지고 판을 깨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인터뷰 내용은 무엇입니까?”

한규호는 그레이스 박사에게 물었다. 경험상 아고스토 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

그레이스 박사는 말이 없었다.

“박사님?”

앤 챔버가 그런 그녀를 채근했다.

그레이스 박사는 앤 챔버의 말을 듣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멈췄다.

인터뷰를 구상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한규호에게 인터뷰의 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고 모두의 앞에서 가족 중 인신매매 피해를 입은 어린아이에게 잔인한 질문을 던진 다음, 그 작은 아이가 말하는 끔찍한 이야기들을 녹화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뷰는..”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모른 채 아고스토가 입을 열었다. 저 멍청한 놈이 설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것일까? 눈치도 없이?

“이사님!”

그레이스 박사는 우선 날카롭게 아고스토를 불러 그의 입을 막았다. 손에 총이 있다면 당장 그 총으로 그의 입을 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매서운 눈으로 아고스토를 노려보았다. 아고스토는 갑작스런 그레이스 박사의 태도 변화에 어찌할 줄 모르고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작게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시선을 한규호에게 돌렸다. 그리고 차분하고,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 누군가를 만나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미스터 스즈키나 소령님의 지시에 따르겠어요. 그러나 제 분야의 업무에 대한 사소한 내용까지 보고를 하라는 말씀은 따르기 어렵습니다.”

그레이스는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를 차린 어투로 말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그래서 그 내용을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도록, 적의를 가지지 않도록.

한규호는 그레이스 박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 그 자체는 한규호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그레이스 박사의 영역이다.

“주제넘었군요. 사과드립니다.”

한규호가 순순히 그레이스 박사의 말을 받아들였다.

“아니에요....... 저도 아까...... 감정적이었던 부분은 사과드려요.”

그레이스 박사도 한규호에게 사과했다.

두 사람이 서로 사과하자 아고스토가 흩트려 놓은 분위기가 다시 자리를 잡아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규호가 도밍게즈에게 의견을 물었다.

도밍게즈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 도밍게즈는 스즈키라는 이 남자를 그저 말없고 조용한 아시아계 미국인 학자라고 생각했다. 딱히 경원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마음이 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청사 앞의 저격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여주는 모습에서 알 수 없는 호감을 느꼈다.

그레이스 박사의 감정적인 폭발에 아무런 미련 없이 경호 임무를 포기하겠다고 시원스럽게 말한 것도 맘에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방위군도 철수하겠다고 그의 편을 든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지금도 그렇다. 스즈키라는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의견을 물어오고 있다. 현장 실무자를 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군인이거나, 전직 군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동질감을, 호감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만나야 된다면, 이곳에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밍게즈 소령이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검문 검색을 철저히 한 다음, 저희 병력들이 임시 숙소로 사용하는 방에서 만나신다면.”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이 호텔에 머문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 몇 층에 있는지, 객실이 어디인지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편안하고 안락한 카라카스의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도밍게즈가 답했다.

대답을 들은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레이스 박사에게 말했다.

“우선 기자를 만나보도록 하시죠. 기본적으로 내일 출국한다는 예정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한규호를 독재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이후의 상황을 주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규호의 입지만 더 단단하게 다져 준 꼴이 되었다. 독재자의 권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같이 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아고스토는 멍청하게 판을 깨려고 하고 있고, 몰아내려 했던 독재자가 오히려 이해해주고 있다.

미움, 고마움, 안도감 그런 것들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감정에 일부분에는 앤 챔버에 대한 그것도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만나보자. 인터뷰가 진행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기자부터 만나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면서, 한규호는 그냥 안 된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중에 또 방법이 있을 것이다.

***

군인들이 임시 숙소로 쓰고 있는 아래층의 객실 문가에 기대서서 한규호는 객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객실 한 가운데 접객용 테이블 한쪽에는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 이사가, 그 맞은편에는 1층에서 ‘보호’받고 있던 기자가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에는 오직 그 네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기자는 도밍게즈 소령이 있는 곳에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도밍게즈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앤 챔버는 모친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방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한규호도 빠졌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따로 요청하지는 않았다. 한규호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지만 위험이 없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만 두고 나오는 것은 찜찜했다. 그레이스도 그런 한규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한규호가 스페인어

를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안심했는지, 더 이상의 요구 사항은 없었다.

그래서 그 네 사람만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기자는 낮은 목소리로 아고스토와 그레이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한규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기자가 영어에 능통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음에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한규호는 상관없었다.

생각은 단순하게, 행동은 확실하게.

저들이 무언가를 요청해 온다면 생각해보고 판단하면 된다. 되는 일이면 허가하고, 안 되는 일이면 거절하면 된다.

따르지 않으면? 그냥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떠날 것이다.

위험이 닥치면? 돌파하면 된다.

돌파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한규호에게 그런 것은 없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든 한규호에게는 상관없다.

한규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릴까 고민했지만 그러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그레이스 박사가 격하게 책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화가 난 눈으로 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 시선이 낯설지 않았다.

몇 시간 전, 자신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었으니까.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2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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