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9)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아고스토의 침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갔던 그레이스 박사와 앤 챔버가 거실로 나왔다.
한규호는 그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이전과 바뀌었음을 알았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 그에게 날카롭게 소리치던 그레이스 박사의 표정에는 힘이 빠져있었다. 반면에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는 앤 챔버의 걸음걸이에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방에서 나온 그레이스 박사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힘없이 소파에 앉았다. 방에 들어가기 전의 표독스럽고 앙칼진 분위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서 마치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미스터 스즈키.”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던 한규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앤 챔버를 돌아보았다. 발걸음만큼 당당한 눈동자가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한규호는 베네수엘라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흥미를 느꼈다. 그저 말없이 그레이스 박사를 따라다니는 앤 챔버에게 처음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한규호는 말하라는 의미로 앤 챔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먼저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 박사님과 저는 미스터 스즈키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말씀은 철회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한규호는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앤 챔버가 이런 말을 할 권한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그레이스 박사를 어떻게 설득했을까?
그레이스 박사는 소파에 앉아서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한규호의 시선이 아고스토 이사에게로 향했다. 아고스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앤 챔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고스토 이사님. 이사님도 안전을 위해서 스즈키 씨에게 협조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앤 챔버가 아고스토에게 말했다.
아고스토는 시선을 그레이스 박사에게 돌렸다가 다시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황임을 아고스토도 알 수 있었다.
“이사님. 부탁드려요. 제발요.”
다시 앤 챔버가 간청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고스토는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보고 싶던 표정이었다. 비록 고대하던 침대 위는 아니었지만.
“챔버 양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요.”
아고스토는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를 돌아보았다.
“당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고스토의 말에 한규호는 속으로 픽 하고 실소했다.
재미있는 양반이군.
아고스토는 앤 챔버에게는 호의를, 자신에게는 자존심을 내세웠다.
한규호는 아고스토가 알량하게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원하신다면 경호대상에서 제외시켜 주겠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기로 했다. 일행에서 유치한 사람은 아고스토 하나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앤 챔버가 미소를 지으며 아고스토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아고스토는 그 미소를 보고 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만족감이 들었다.
“미스터 스즈키, 그리고 도밍게즈 소령님.”
앤 챔버가 두 사람을 불렀다.
“말씀하신 것처럼 경호와 관련해서는 두 분의 지시를 전적으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마음을 풀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앤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밍게즈 소령이 먼저 앤 챔버에게 말했다.
남미의 여자는 강하다. 게으른 천성을 타고 나는 남미 남자들을 대신해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고, 가정을 지킨다. 어린 나이에 입양되어 스페인어를 할 줄도 모르는 미국인 아가씨에게서 남미 여성의 강인함이 느껴졌다. 역시 남미의 핏줄은 핏줄인가?
도밍게즈 소령과 달리 한규호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앤 챔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2일차
모란역 인근 포장마차
성남 경기도 대한민국
김형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번에 비워 버렸다.
그의 앞에는 양념을 발라 구운 꼼장어가 안주로 놓여 있었지만 김형원은 거기엔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김형원은 그 날을 떠올렸다.
김훈과 한규호 둘이 태청무역 사장실에서 독대를 나누던 그 날. 자신과 유만호가 사무실 밖에서 무기력하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그 날을.
김형원은 그 날의 상황을 몇 번씩 되돌려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서 회상하고 또 회상했다. 그리고 지금 술잔을 앞에 두고 그날의 상황을, 기억을 또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한규호가 나왔다. 사장실에서 나온 한규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 무표정 속에 깔려 있는 분노를 김형원은 느낄 수 있었다.
걸어 나온 한규호는 발을 멈추고 김형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김형원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김형원은 비어있는 자신의 잔에 다시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몇 잔째인지도 모를 소주를 안주도 없이 계속 밀어 넣자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주는 금세 다시 식도를 타고 역겨움으로 올라왔다. 김형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아냈다.
김형원은 다시 그날을 회상했다.
한규호가 그렇게 나가고, 그와 유만호는 사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김훈의 얼굴을 보았다.
한규호와 김훈. 두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김훈의 얼굴을 보니 일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김훈은 아무것도 모르는 유만호가 한규호를 자극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유만호가 이성을 잃고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나서야 나섰다.
미국이 눈치 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 하나로 김훈은 한규호의 집중을 끌어낼 수 있었다. 온전히 한규호가 김훈 자신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김형원은 김훈이 한규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작전 때만 해도 그렇다.
김훈은 ‘식양’이라는 정보를 숨겼다. 한규호 뿐만 아니라 김형원에게도. 김훈은 철저히 한규호를 외부인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다. 국정원이, 정보위원회가 의뢰하는 모든 작전은 김형원을 통해서 진행됐고, 김훈은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독립 요원 한규호에
대해서 김형원에게 물어보거나 떠 본 적도,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질문했다. 미국이 눈치 챘느냐는 질문을.
알고 있던 것일까? 알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김형원도 오랜 시간 한규호와 함께 여러 번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그 숨겨진 진실을, 한규호의 능력을 김훈은 어떻게 알았을까? 알았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김형원은 다시 소주잔을 채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천히 마셨다. 그렇다고 역겨움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천천히 술을 식도를 통해 위로 흘려 보냈다.
위에서 빠르게 흡수된 알콜이 혈관을 타고 빠르게 그의 온 몸을 휘저었다.
생각하자. 조금만 더 생각하자.
김훈은 한규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르는 척, 관심이 없는 척 방치했다. 그러다 이번에 행동을 취한 것이다.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한규호를 방치했을까? 그리고 왜 이제 움직였을까?
모르겠다. 방치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평생을 정보기관에서 일 해온 저 늙은 여우가 무슨 생각으로 한규호를 놔두고 관망만 했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움직였을까? 이 질문에는 단서가 있다.
미국이 눈치 챘느냐는 질문.
미국이 한규호에 대해서 눈치를 챈 후 움직임을 보이고,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김훈이 이제는 움직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가설이 하나 더 나온다.
김훈은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닐까? 모르고 있다가 한규호에 대한 미국의 움직임을 보고, 그제야 한규호를 의심하고 확보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자신이 쓸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미국을 상대할 때 협상용 카드로 쓰면 된다는 판단으로?
김형원은 여러 번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항상 여기에서 생각이 막혔다. 김훈이 왜 움직였는지에 대해서 판단하기에 정보가 부족했다.
그 늙은 여우의 대가리를 쪼개서라도 정보를 얻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원은 다시 소주잔을 채웠다.
눈앞에 안주를 두고도 젓가락 한번 대지 않고 계속 소주잔만 기울이는 김형원을 포장마차 주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김형원은 주인의 우려 섞인 눈빛을 알아채지 못한 듯 다시 소주잔을 비웠다.
다음은? 김훈과 한규호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건 한규호의 표정과 행동에서 유추가 가능했다.
김훈은 한규호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떻게?
길들이려 했을 것이다. 카드로 쓰기 위해서 그를 조직으로, 김훈의 영역 안으로 거둬들이려 했을 것이다.
어떻게?
압박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 유만호가 멍청하게 날뛰어도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생 해왔던 것처럼, 항상 잘 통해 왔을 방법으로 한규호를 압박했을 것이다.
무엇으로? 돈? 가족? 사회적인 위치?
“... 병신 같으니.”
김형원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김형원의 욕설을 들은 포장마차 주인의 걱정이 조금 더 커졌다.
늑대.
김훈은 한규호를 늑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늑대를 길들일 수 있을까?
늑대를 새끼 때부터 기르면 함께 살 수 있게 길들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러나 늑대는 야생성을 쉬이 버리지 않는다. 새끼 때부터 키워도 주인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목덜미를 물어버리는 것이 늑대의 습성이자 본능이다.
김훈은 자신이라면 개와 같은 종(種, species)으로서의 늑대를, 한규호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많은 개들을 성공적으로 길들이고 기른 경험을 바탕으로 늑대도, 한규호도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형원은 다시 소주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그러나 병에 남아있는 양은 빈 잔을 가득 채우기엔 부족했다.
김형원은 잠시 고민했다. 한 병을 더 시킬까? 아니면 이쯤에서 마무리할까. 우선 눈앞의, 약 반 정도 밖에 차지 않은 소주잔을 비우고 생각하자.
그는 잔을 들었다. 그러나 입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김훈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늑대가 아니다. 무리를 이뤄서 살아가는 늑대 따위가 아니었다.
한규호는 호랑이다.
성체가 되면 어미를, 무리를 떠나 홀로 사냥하며 살아가는 수컷 호랑이다.
수컷 호랑이는 길들일 수 없다.
절대로 길들일 수 없다.
김형원은 손에 든 잔을 비웠다.
“한 병 더.”
김형원이 포장마차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잠시 김형원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소주 한 병을 김형원 앞에 놓았다.
김형원은 병을 따서 빈 잔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들어올렸다.
김훈은 중국 이야기를 했다. 김형원과 유만호가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 들었던 말이 중국에서 연락을 해왔다는 말이었다.
여자. 한규호가 데려와 미국에게 넘겨줬다는 그 여자 이야기였을 것이다.
한규호가 여자를 구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전을 위해서? 정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 조국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포석으로?
다 좆까는 소리다.
한규호는, 김형원이 아는 한규호는 그 순간의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호랑이다.
홀로 존재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럴 힘이 있다.
그리고 김훈이, 호랑이를 늑대로 잘못 본 동태눈을 가진 그 늙은 여우가.
호랑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것도 제대로.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