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8) >
2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CIA 요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완은 괌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완이 기억하는 그녀와의 첫 번째 만남.
괌 미군기지 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완을 찾아온 젊은 여자. 금발의 벽안, 전형적인 백인 미녀가 완에게 찾아왔을 때, 완은 그녀가 CIA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완은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군복을 입은 군인, 그리고 간호사와 의사들도 완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은 자신의 신원을 포함한 어떠한 정보도 내어놓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도 어떠한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그녀가 괌에 있는 미 공군기지 내 병원에서 깨어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먼저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더군다나 지원받을 수 있는 조직도 없이 홀로인 상황이다. 그런 판단으로 완은 아무런 행동 없이 그저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녀를 만난 순간 완은 그녀가 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적의.
지금까지 완을 찾아온 사람들의 눈에 담겨있던 의문과는 다른 적의가 그녀의 눈에 담겨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금발 미녀는 자신을 적대하고 있었다.
이 적대감을 발산하고 있는 백인미녀가 지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완은 판단했다.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그는, 규호는 괜찮은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담긴 적의가 반가웠던 그 순간을 완은 떠올렸다.
지금도 그녀는 당시와 마찬가지로 적의를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은 그 적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면 이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완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완의 여유 있는 태도와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를 두 번째로 본 그날, 괌 공군기지 내 병원에서 그녀를 만난 그 날도 그녀는 자신의 눈을 보며 저렇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면 한규호가 떠올랐다.
전화를 걸어 완벽한 응급처치 준비를 ‘부탁’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업고 나타나 구조요원부터 찾던 그가 떠올랐다.
그녀를 맡기고 뒤도 보지 않고 돌아서던 그의 등이 떠올랐다.
그녀가 죽으면 자신도 죽이겠다고 말하던 한규호의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그녀의 웃음이 싫었다.
트레이시는 그 마음을 꾹 억누르고 말했다.
“증인보호 프로그램은 아시겠죠?”
“네.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증인보호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것을 제공해 드릴 수 있어요.” 완은 트레이시의 말을 들었음에도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저 트레이시가 지긋지긋해하는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 시민권이 포함된 새 신분, 새 집, 새로운 직장이 제공될 거예요. 우리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프로그램과 달라요. 상상하는 것 이상 풍요로운 생활도 영위할 수 있어요. 그리고 24시간 완벽한 신변보호도 제공됩니다. 경찰이나 FBI가 아니라 우리가 직
접 당신을 보호 할 거예요. 당신에 대한 정보는 봉인되고 그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을 겁니다. 의회를 포함해서요. 당신이 불법적인 일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 말에 완은 쿡 하고 웃었다.
트레이시는 그 웃음은 참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우습죠?”
“어머. 미안해요. 기분을 상하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완은 트레이시의 날카로운 어투를 여유 있게 받았다.
“그저 궁금해서요. 불법적인 일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불법적인 행동이니까요.”
트레이시는 그녀가 일반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총상을 입은 채로 독립 요원의, 그것도 한규호의 등에 업혀 왔다는 것 자체부터 일반적인 등장은 아니었다.
괌에서 치료를 받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자신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았고, 항상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CIA의 안가에서, 적진 한가운데에서 CIA 요원과 심리적 줄다리기를 이토록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일반인일 수는 없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감정을 짧은 순간이나마 노출한 것을 후회했다.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본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면책 범위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가요? 그것도 미스 제인 도우가 하는데 따라 달렸어요.”
트레이시는 복잡하고 지리한 심리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저 거래 조건을 바로 테이블에 올려놓고, 약간의 조율을 거친 다음 이 만남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트레이시 본인이 결정했다는 사실이.
트레이시는 이제 지시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결정하고, 그녀가 행동하고, 그저 단 한 사람에게만 결과를 보고했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완이 물었다.
“그 남자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트레이시는 자신의 이야기에 대답 없이 찻잔을 드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그 남자요?’ 하며 쓸데없는 반문을 했으면 적잖이 실망했을 것이다. 이미 그 남자가 누구인지 서로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 어쩌면 안심했을는지도 모른다.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 없이 찻잔을 들어 생각할 시간을, 트레이시에게는 조바심을 안겨줄 시간을 벌었다. 의도한 행동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행동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여자가 일반인 일리가 없다.
완은 다시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트레이시는 솔직히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여자다.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에서 깃들어 있는 여성성이 극대화되어 표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것을 말씀드려야 하죠?”
완이 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국적이 어디인지, 하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정보는 지금 아무런 가치가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 그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고, 어떻게 그와 같이 행동하게 됐고, 왜 그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CIA요원에게 죽인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된 것인지를 말해’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트레이시는 애써 참았다.
“아는 모든 것.”
트레이시가 말했다.
“아는 모든 것이라.... 광범위하네요.” 완이 말했다.
“언제 만났고,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떻게 그와 같이 오게 된 것인지. 간단히 말해 첫 만남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다 이야기해주는 조건이에요.”
완은 빙긋 웃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다니.
“제가 대답을 거부하면 저는 계속 이 상태로 ‘보호’ 받게 되나요?”
완이 물었다.
“계속 ‘보호’ 받지는 못할 거예요.”
그녀의 가치는 그녀가 한규호와의 연결 고리라는 것에 있다. 그런데 그녀가 한규호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면 그 가치는 사라진다.
CIA는 그녀를 ‘보호’할 이유가 없다. ‘이용’할 것이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카드를 모두 꺼냈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홈그라운드에서 트레이시가 먼저 베팅을 끝냈다. 이제 상대방의 선택을 기다릴 뿐이었다.
콜(call)인지, 드랍(drop)인지.
완도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것을 알았다. 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금발의 CIA 요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를 원하는 것은 CIA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일까?
규호. 괌에서 그를 떠올리면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면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가 떠올랐다.
악의를 담아 소리쳐 그를 떠나보낸 다음, 눈을 감고, 두 팔을 가슴에 모으고, 밤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때를. 체념과 차단된 시각과, 부질없는 희망과 차단할 수 없는 청각이 뒤섞인 상태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그 시간을 떠 올렸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그녀의 심장 박동이 살짝 빨라졌다.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움직였다.
죽음을 기다리던 상황에서 들려온 그의 발소리, 환청이라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 그리고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 환각이라 생각했던 그의 걸어오는 모습.
그녀의 얼굴을 두 팔로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그가 했던 말들.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냐고 물었지.)
(데려갈 수 있다고 내가 말했지)
(데려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와야지. 같이 가야 하니까.)
다 찢어진 방수천으로 급조한 임시 텐트에서, 그의 품에 안겨 온기를 느끼며 그녀가 했던 말.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도와줄 수 있나요)
(도와줄 수 있어)
(미국으로 가도 될까요)
(가도 괜찮아.)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몇 번을 다시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 날로부터 몇 주가 지났지만, 마치 몇 시간 일처럼 생생했다.
그의 목소리. 그의 얼굴. 그의 표정. 그의 눈.
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트레이시도 완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미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조금 전까지 여유를 가장해 협상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짓던 미소와는 달리,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미소라는 것을 트레이시는 알 수 있었다.
“이야기하면······.”
완이 말했다.
“그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미국의 시민권이 포함된 새 신분, 새집, 새 직장, 그리고 당신들이 제공하는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나요?”
완은 생각했다.
왜 나는 미국으로 가려고 했을까?
미국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녀가 가진 정보를 활용해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식양이니까.
그리고 다시 규호를 생각했다. 완이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아파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완이 입을 열었다.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현재 저에게 있어서 저 자신보다 소중한 유일한 사람이에요. 그에 대한 정보를 넘겨서, 그를 팔아서 제 삶을 유지할 생각은 없어요.”
미소가 완의 모든 얼굴을 덮었다.
완은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채우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남자를 이렇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마음을 고백하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저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트레이시는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담고 한규호에 대한 정보 제공을 거부하는 완을 보면서, 그녀를 통해서 한규호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목숨을 걸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8)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