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70화 (71/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7) >

2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차에서 내린 트레이시는 CIA의 미국 내 안전가옥 중 하나로 걸어갔다.

체스터필드 카운티 공항 북서쪽에 위치한 평범한 백인 중산층 거주지인 이곳에 CIA의 안전가옥이 있다는 사실을 마을 주민 누구도 몰랐다.

그저 은퇴한 법대 교수가 거주하고 있고, 그가 자문을 하고 있는 로펌의 직원들이 드나든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했다. 은퇴한 노교수는 젠틀했고, 로펌 직원들은 친절했으니까.

사무용 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트레이시 테일러는 그 집을 드나드는 로펌의 변호사들 중 한명처럼 보이는데 손색이 없었다.

트레이시는 누가 봐도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Bar Exam)을 패스한 후 로펌에 갓 들어간 아름다운 신입 변호사처럼 보였다.

금발, 벽안, 몸의 라인을 기품 있게 드러내는 비싼 투피스 정장은 관능과 단아함이라는 상반된 매력을 동시에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트레이시 테일러는 마당 잔디를 깎고 있는 교수의 손자에게 인사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제대군인인 손자는 트레이시가 밝은 미소와 함께 건넨 인사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서 오세요. 요즘 자주 찾아오시네요.”

손자가 환한 미소로 트레이시를 맞이했다.

어린 시절 방황하다 즉흥적으로 입대한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20대 초반을 보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정신을 차렸고, 제대 이후 미군이 제대 군인에게 주는 장학금 제도를 활용해 대학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설정을 가진 청년, 아니 CIA

의 현장요원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며 그녀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그러게요. 저희들이 교수님을 너무 귀찮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트레이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할아버지는 말로는 귀찮다 하셔도 자기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기쁘신 것 같은데요. 손자인 제가 보기에는.”

트레이시는 특이 사항이 없냐는 질문을 했고, 상주 요원은 아무 이상 없다고 답했다.

만약 무언가 변동 사항이 있었다면 손자역을 맡은 요원은 할아버지 건강이 많이 좋지 않으신데, 이제 그만 좀 편히 쉬시게 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답을 했을 것이다.

트레이시는 웃음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다행이네요. 교수님의 건강에 대해서는 저희 로펌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답니다.”

“들어가 보세요.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세요.”

손자가 트레이시에게 어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트레이시는 인상 좋은 손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짤그랑

문이 열리자 문에 달려 있던 종들이 은은하게 울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오셨는가.”

그 소리를 들은 집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퇴한 노교수. 나이는 75살이나 되었지만 아직 자전거와 골프를 즐기고, 법조계에 아직 영향력이 남아있는 노교수라는 설정을 가진 노인, 아니 실제로 시카고 로욜라 대학에서 국제법 전공 교수이면서 또한 CIA의 요원인 노교수가 트레이시를 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자꾸 귀찮게 해드려 죄송해요.”

“괜찮소. 서재에서 이야기하지.” 노교수가 말하고 앞장섰다.

트레이시는 교수를 따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내려가 서재 겸 음악감상실로 사용하는 지하실로 향했다.

트레이시는 이 안전가옥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일반 요원이었을 때는, 이러한 안전가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국 영토 내에, 주택가에 안전가옥이 있을 것이라고는 말이다.

CIA는 법령에 의해 미국 영토 내에서 활동이 제한된다. 트레이시가 일반 요원이었다면 그녀는 절대로 미국 영토 내에 있는 안전가옥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안전가옥은 트레이시의 입장이, 지위가 변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트레이시는 들고 온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보통 소파보다 더 낮고 푹신한 소파는 치마를 입은 그녀에게는 불편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부터 이 장소에서 중요한 논의가 진행된다.

소파에 앉은 트레이시는 서재를 둘러 보았다. 방음처리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공간, 한쪽에는 책이, 다른 한쪽에는 오래된 LP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이 공간은 안락했지만, 트레이시는 중압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면서 잠시 회상에 잠겼다.

선택해야 했던 그날을.

***

19일 전.

CIA 위장기업 Dover American Insurance Co.

시애틀, 워싱턴 주, 미국

“뭘 얻게 되나요.”

“진실. 그리고 권한.”

“진실?”

“오직 5명만이 아는 진실.”

“....5명?”

“나, 그리고 지금 이 사람. 기밀보호 위원장, 대통령. 현직, 그리고 전직.”

그녀는 직감했다.

그녀가 현장 최고 책임자의 권한을 갖고 치타공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그 순간,

한규호를 다시 만난 그 순간,

그와 헤어져 오키나와에서 괌을 거쳐 랭리로, 그리고 시애틀에 도착한 그 순간에

그녀에게 커다란 변화가 찾아올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단순히 권한과 지위의 변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이었다.

“선택할 수 있나요?”

트레이시가 입을 열었다.

“........”

국장은 말이 없었다.

“기밀보호위원장과 전현직 대통령만이 아는 진실에 접근할지 말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나요?”

트레이시가 국장을 주시하면서 물었다.

좋은 눈이군.

밀러 국장은 트레이시의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공포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 선택할 수 있네.” 그리고 받아들일 것이고. 국장은 생각했다.

“테일러 요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요?”

옆에 앉아 있던 중년여성이 트레이시를 배려하는 듯 물었다.

“제 위에는 몇 명이나 있나요?”

트레이시는 중년여성의 배려를 거절했다.

“나. 그리고 대통령. 현직만.”

국장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중년여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녀도 내 위에 서 있는 것 아닌가요 하는 의미로.

“그녀에게 도움은 받아도 지시는 받지 않네.”

국장이 말했다.

중년여성은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시에게 웃어 보였다. 몇 번을 봐도 초등학교의 친절한 선생님이 떠오르는 미소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트레이시가 물었다.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적으로는 질문을 받지 않지만 이번에는 들어주기로 했다.

“그 남자랑 관계있나요? ‘한’이랑?”

국장은 확신했다. 트레이시는 받아들일 것이다.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시는 국장의 끄덕임을 보고 말했다.

“말로 해주세요. 그랑 관계있나요?”

“관계있네.”

“하겠어요.”

국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시는 답했다.

***

2일차

CIA 안전가옥

체스터필드, 버지니아

트레이시는 방음처리 된 서재 겸 청음실에 앉아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자신의 선택을 회상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녀는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진실, 그리고 지위와 권한.

기프티드(Gifted). 그 거짓말 같은 진실 앞에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추수감사절의 가족의 단란한 저녁 식사와 바하마의 휴가 같은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트레이시 테일러는 그런 사람이었다. 치어리더 대신 여자 축구부를 선택한 트레이시는 100번의 선택 기회가 있어도 100번의 같은 선택을 할 사람이었다.

그녀는 진실을 받아들인 후 2주 동안 그녀의 짐을 챙기긴커녕 그녀의 새 집에도 한발도 들이지 못했다. 진실의 영역에 들어간 트레이시는 시애틀에서 오키나와로, 그리고 한국을 거쳐 괌에 들렀다가 다시 시애틀에서 이 곳 버지니아 주 체스터필드 카운티의 안전가옥

으로 향했다.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그녀의 짐은 컨테이너에 봉인된 채로 타코마 항의 정부 전용 컨테이너 장치장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편함 같은 것은 없었다. 전용기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녀를 수행하는 전담팀이 그녀를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잠 잘 곳부터 그날 그녀가 갈아입을 속옷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곳으로 가라는 국장의 명령을 받았고. 트레이시는 그녀를 수행하는 전담팀에게 단 한마디만 하면 됐다.  체스터필드.

수행팀이 비행계획을 짜고, 호텔을 예약하고, 차량을 수배한다. 트레이시는 그저 이용만 하면 된다.

정보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장기말처럼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던 하급요원 트레이시 테일러가 이제는 그녀만을 위한 전용기와 전담 수행팀을 가지게 되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트레이시는 회상과 상념에서 깨어났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찻잔이 올라간 쟁반을 든 노인, 현재 이 집의 명목상의 주인인 노교수가 찻잔을 트레이시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노인의 차 대접에 트레이시는 약간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금세 그 생각을 지웠다.

CIA에서 정보와 권한은 성별, 나이, 지위 등 모든 것을 초월한다. 이제 그 상황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찻잔을 든 노인은 트레이시의 불편함은 관심도 없다는 듯,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노인이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트레이시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차를 그리 즐기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밀크티의 향이 그녀의 코 끝을 부드럽게 감쌌다. 좋은 차를 쓴 것 같았다.

“차가 괜찮네요. 드셔 보세요.”

트레이시는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노인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차를 권했다.

그러자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괜찮네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한 모금 차를 마시고서는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말이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먼저 입을 연 것은 트레이시였다.

“그러네요. 두 번째인가요?”

상대방이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세 번째 보는 거예요.”

트레이시가 답했다.

“그런가요? 저는 두 번째라고 기억하는데.”

그 말에 트레이시는 살짝 웃었다.

“세 번째가 맞아요. 그 쪽은 기억을 못하겠지만.”

상대방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트레이시가 말을 돌렸다.

“뭐.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힘들지는 않았어요.”

상대방이 말했다.

“여기는 어떤가요?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감옥 치고는.... 쾌적하고 안락하네요.”

상대방이 답했다.

“감옥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상대방은 찻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갔다.

트레이시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가볍게 입술에 대고 소리 내지 않고 차를 마시는 그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은 기품 있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트레이시를 보며 말했다.

“오고 가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감옥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말하는 모습, 말의 억양과 어조, 사용하는 단어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보호받고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 말에 상대방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 살짝 가리고 웃었다.

“보호가 필요 없다면 보내 줄 수 있나요?”

상대방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트레이시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과 목소리와 표정이 조화를 이룬 얼굴에 미소가 더해지면서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쪽에게 달린 것 같은데요?”

“저에게요?”

“네. 당신에게요. 미스 제인 도우.”

트레이시의 말에 완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찻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트레이시는 그녀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괌에서 정신을 차린 그녀와 두 번째 대면했을 때, 그때 지었던 그 미소를 지금 다시 보자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정신을 잃은 그녀를 업고 있던 한규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미소에서 한규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트레이시는 그녀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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