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68화 (69/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5) + 올리는 글 >

2일차

앰베서더 스위트 호텔 카라카스

(Ambassador Suites Hotel Caracas)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끝난 게 아니라고?”

푸에르토가 물었다.

“그래. 형제들도 알다시피 오토바이 습격으로 의뢰받은 건 끝났지. 근데 그 놈들이 내 구역을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어.”

더블 티가 말했다.

그의 말에 푸에르토와 엘 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키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양키도 아니고, 같은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동포들 아니던가. 그런데 그 동포들이 민감한 이야기를 들쑤셔서 국제 사회로 끌고 나가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서쪽 바리오를 관장하는 더블 티 입장에서는 가장 큰 밥그릇 중 하나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게 되는 것이 탐탁치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죽이지 말라는 의뢰는 이미 완수한 거고, 그러면 이제는 죽여도 상관없는 것 아니겠어?”

엘 오로는 그렇게 말하는 더블 티의 선글라스를 바라보았다.

민머리 끝까지 문신으로 뒤덮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내뱉고 있는 이 사내가 30년 전에는 빈민을 구제하겠다고 바리오로 뛰어든 사회복지 전공 대학생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면 어쩌겠다는 건데? 뭐. 사실 그렇잖아. 그 연놈들이 그렇게 멍청하게 다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미국 정부 놈들과 관련이 있으니까 저렇게 겁도 없이 날뛰는 것 아니겠어? 더군다나 방위군 개새끼들이 지키고 있으니 호텔에 시카리오(암살자)를 보내봤자 소용도 없을 테고.”

셋 중에서 가장 배운 것도 없고 단순 무식하다고 취급받는 푸에르토가 꽤나 이치에 맞게 머리를 굴려 말했다.

“푸에르토 형제의 분석이 정확하군요. 하지만 더블 티 형제의 우려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신매매라. 저 사람들은 참 흉측한 단어를 쓴단 말이죠. 우리 표현대로 인력 송출이라고 합시다. 인력송출사업은 단순히 더블 티 형제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푸에르토 형제도 전부 관여되어 있는 사업이니 우리 삼두사 공통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로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더블 티는 오로, 그들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또한 이재(理財)에 밝다고 평가받는 오로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더블 티 형제에게 계획이라도?”

오로가 더블 티에게 물었다.

“뭐 마음 같아선 싹 다 죽여서 고속도로에 걸어놓고 싶지만.... 푸에르토 형제의 말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적어도 네 명이 전부 다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뭐 그런 정도?”

더블 티는 은근슬쩍 푸에르토를 칭찬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혹시 VB를 고용한 것도 더블 티 형제입니까?”

오로가 더블 티에게 물었다.

그 말에 더블 티의 표정이 순간 잠시 경직되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더블 티를 주시하고 있던 오로는 그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걸 알아챌 수 있었다.

“VB가 누군데?”

아무것도 모르는 푸에트로가 물었다.

“VB는 FARC(콜롬비아 무장혁명반군) 출신 용병입니다. FARC가 몰락한 다음 여기저기서 돈 되는 일은 다 하면서 다니죠. 근데 그가 최근에 이곳 카라카스에서 의뢰를 받았다더군요.”

“....... 나는 모르겠는데.”

더블 티는 태연한 표정으로 우선 부인했다. 하지만 선글라스 뒤의 그의 눈은 그의 뇌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로가 알아챘을까? 셋 중에서 돈과 정보, 그리고 권력에 가장 가까운 그가 알아챘다면 어디까지 알아챘을까?

“그렇습니까? 쓸데없는 의문을 가졌군요. 더블 티 형제를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신뢰는 소중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그게?”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푸에르토의 질문에 오로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설명했다. “오늘 오전, 그러니까 더블 티 형제의 식구들이 오토바이로 양키들을 습격하기 전에 그들을 향한 저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더블 티 형제가 이런 말씀을 하시니 혹시 연관이 있어서 그랬나 여쭤 본거죠.”

설명을 마친 오로가 더블 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죠 형제여. 누구보다도 전 이 삼두사라는 체제가 서로를 신뢰하면서 탄탄하게 유지되길 바랍니다. 그게 제가 사소한 이익에 욕심을 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물어 본 것입니다. 사과드리죠.”

그렇게 말하며 오로는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를 표했다.

“아니. 사과할 것 없어. 형제들끼리는 사과하는 것 아니지.”

더블 티는 한 손을 들어 그의 사과를 받으며 오로를 제일 먼저 없애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맞소. 맞아요. 그렇군요.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아고스토는 전화기를 붙들고 열의에 차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 아고스토의 모습을 그레이스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알겠어요. 로비에서 전화를 하시오. 내가 내려가겠소.”

아고스토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얼굴 가득 승자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떻게 되었나요?”

그 웃음을 보고도 그레이스 박사는 답을 요구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려 간다는 확답을 어서 듣고 싶었다.

“잘 되었습니다. 한 시간 안으로 이쪽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풀리려는 긴장의 끈을 다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제 겨우 한 단계만 진행됐을 뿐이다.

“뭐라던가요? 그 기자가?”

“인터뷰하기에 적합한 아이를 찾을 수 있답니다.”

“그 아일 데리고 같이 오는 건가요?”

“아니. 우선 먼저 자기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레이스 박사는 불안함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당장 아이를 데려와서 의자에 앉혀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유엔 대사와 정치인들과 언론이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끌어낸 다음 동영상을 찍고 싶었다. 마치 당첨된 복권을 최대한 빨리 현금화 하고 싶은 것처럼.

“.....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걱정마시오 박사. 이건 다 끝난 일과 다름없어요. 나만 믿어요.”

아고스토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오른손으로 탕탕 치면서 호기롭게 말했다.

당신이니까 더 믿을 수 없는 거야.

그레이스 박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좋아요. 다시 정리해 볼게요. 그 기자가 그러면 10살 정도의 여자아이, 적어도 가족 중 한명은 실종되거나 인신매매 당한 경험을 가진 아이를 확보할 수 있다고 확답한 건가요?”

그레이스는 아고스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맞아요. 그런 아이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게 그 기자의 말이요.”

그레이스 박사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남미 남자들 특유의 과장과 허풍이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다는 거죠?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는데?”

“기자 말로는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고.”

“안전? 누구의 안전이죠? 아이? 아니면 기자?”

“....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뭐 둘 다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그레이스 박사님. 음식을 하려면 우선 재료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 배가 고프다고 재료를 다 뱃속에 넣고 불 속에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진정하시죠. 걱정마세요. 이 아고스토를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능글맞게 말하며 웃는 아고스토의 모습에서 그레이스 박사의 불안함은 더욱 짙어져갔다.

집안일은 내팽개치고, 그저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낼 생각 밖에 없는 자신의 남자 친족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알겠어요. 이사님만 믿겠어요.”

그레이스는 다른 남미의 여자들처럼 우선은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다. 믿어주고, 칭찬해주고, 기다리다 기대에 배신당하는 다른 남미 여자들처럼.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녀도 지금 그를 닦달한다고 해서 얻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 그럼 한 시간 안에 온다고 했으니, 전 기자님을 맞을 준비를 좀 해야겠군요.”

아고스토는 침실로 걸어 들어가면서 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혹시 그레이스가 따라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

앤 챔버는 양어머니와의 긴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친절한 말투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 그랬구나 하며 추임새를 넣어주던 양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아직 남아있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딩동

그 순간 그녀의 객실에 차임벨이 울렸다.

앤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 객실 문 방범경으로 밖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레이스 박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박사님 어쩐 일이세요?”

앤 챔버는 문을 열고 그레이스 박사를 안으로 들였다.

“챔버 양 잠깐 괜찮을까요?”

그레이스 박사는 거실로 들어오며 챔버에게 말했다.

“네. 괜찮아요. 박사님.”

그레이스 박사는 앤 챔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지 몇 시간이 지났건만 그녀는 옷을 갈아입지도, 샤워를 하지도 않았다.

뭘 했을까? 그녀는?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부탁이 있어요.”

거실 소파에 앉은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부탁....이라뇨?”

그레이스 박사는 아고스토에게 했던 이야기를 앤 챔버에게도 전했다. 인터뷰를 하고, 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국제적 여론을 상기시키겠다는 이야기를.

아고스토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엔 본회의장에서의 화려한 연설 모습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남미에 차별 받고 억압 받고 피해 받는 여성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길게 했다.

철학자에게는 철학자의 대화법으로, 돼지에게는 돼지의 대화법으로 말해야 하니까.

앤 챔버는 그레이스 박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내일 떠나지 못할 지도 몰라요. 만약 인터뷰가 내일 진행된다면 말이죠.”

그레이스 박사는 긴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그.... 미스터 스즈키가.....”

앤 챔버는 내일 떠난다는 스즈키의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그레이스 박사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있다가 기자가 오면 일정을 맞춰 보고 인터뷰가 내일 진행될 것 같으면 우리는 내일 떠나지 않겠다고 이야기할거예요.”

“우리.....?”

“나와 아고스토 이사요.”

앤 챔버는 아고스토의 이름을 듣자 육중한 몸에, 기름진 얼굴. 그리고 자신의 몸을 훑어보던 그의 뱀 같은 눈이 떠올랐다.

“챔버 양도 우리 편에 섰으면 좋겠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본론을 말했다.

그녀는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스즈키라는 독재자가 상황을 통제하겠다고 독재를 선언하고 나선 현 상황에서 그녀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민주주의 혁명을 계획하고 있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앤 챔버는 말을 아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챔버 양.”

그레이스 박사가 앤의 손을 잡았다.

“네? 네... 박사님.”

“무서웠어요.”

“네?”

앤은 순간적으로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총격을 당하고, 습격을 당하고, 그런 상황이,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 너무나 무서웠어요. 마치 당장 무슨 일이라도 있을 것처럼 느껴져서, 당장 목숨의 위협을 받으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앤 챔버는 그레이스 박사의 눈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당장 내일 떠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때 안도감이 들었어요. 어서 빨리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레이스 박사의 눈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나도... 챔버 양과 똑같아요.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무서워요. 그런데.... 무서워도,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챔버 양. 챔버 양은 미국에 3살 때 입양됐다고 했죠?”

앤 챔버는 갑자기 날아온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미안해요. 민감한 이야기인데. 하지만 들어줘요. 챔버 양은 3살 이전의 기억이 있나요? 미국인이 되기 이전의 기억 말이에요. 나는 있어요. 나는 볼리비아 그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어요. 만약 우리 가족이 침몰할지도 모르는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그레이스 박사가 되어 있을까요? 아니에요. 아마 내가 원하지도 않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낳고 굶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을 거예요. 챔버 양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챔버 양이 입양되지 않았다면 챔버 양도 그 아이들처럼 거리에서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앤 챔버는 진실을 담고 있던 그레이스 박사의 눈에 다른 기운이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신념이라는 이름의 광기가.

“우리는 미국이라는 안전한 시스템에서 보호받고 성장했어요. 대학을 나오고, 직업을 가지고, 자동차를 끌면서 금요일 밤의 파티와 토요일 아침의 늦잠을 즐길 수 있었어요. 그래요.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지만, 단지 태어난 곳을 탈출하지 못하는 다른 여성들은 그저 상품처럼 팔려나가고 있어요. 사람이! 상품처럼 값이 매겨져서!”

그레이스의 눈에 깃든 광기는 이제 완전히 그녀의 눈을 잠식했다. 앤 챔버는 그녀가 스스로의 신념에 취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우리의 의무에요. 챔버 양. 우리가 그들을 구해야 해요. 우리들이. 우리 남미의 피를 타고난 여자들이!”

앤 챔버는 그레이스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앤 챔버의 손을 힘주어 강하게 잡고 있었다.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우리는 절대 호텔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니까요. 그저 인터뷰 할 시간까지 여기에 더 머물 수 있도록 나와 아고스토 이사를 지지해 주세요.”

“박사님.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앤 챔버는 주저했다.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챔버 양.”

그레이스 박사의 목소리가 한톤 낮게 바뀌었다. “네?”

“챔버 양은 국무부의 인턴이죠?”

눈빛도 날카롭게 바뀌었다.

“네?”

“국무부에서 계속 일 하고 싶지 않나요?”

부탁도 협박으로 바뀌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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