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2) >
2일차
JW 매리어트 카라카스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한 번의 저격, 한 번의 폭발 그리고 한 번의 습격.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할 일들이 반나절 만에 연달아 발생했다.
짧은 시간 동안 일반인들은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고스토 이사의 방에 모여 있었다.
아고스토 이사는 첫 날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호텔 객실은 금연이었지만 매캐한 담배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음에도 그 누구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그들에게 너무 힘든 날이었다. 물론 아고스토에게도 힘든 날이었다. 그는 일행 중 유일하게 피를 뒤집어 쓴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한규호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일행 모두 그런 그를 사소한 것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다.
아고스토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레이스 박사는 소파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앤 챔버가 그녀의 손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럴 계획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이곳 호텔까지 의도치 않게 동행하게 된 산타나 차관은 창가에 서있는 한규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저격에 대비해 창문을 가린 두꺼운 암막 커튼의 틈 사이로 창 밖 도심을 보고 있었다.
서울이었다면, 아니 그냥 상식적인 수준의 치안력을 가진 도시였다면 저격과 폭발, 오토바이를 이용한 습격사건은 하루 종일 생방송 뉴스로 나올 만큼 큰 사건이겠지만, 이곳 카라카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규호는 커튼의 미세한 틈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고 있지만 산타나 차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차관이 어떠한 말을 할지도 알 것 같았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도밍게즈 소령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행을 안전하게 호텔까지 호위한 도밍게즈 소령이 도착하자마자 호텔의 안전상황을 다시 점검하겠다고 말하고 그들을 플로어에 남겨놓고 나간 지 대략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소령. 상황은 어떤가요?”
차관이 소령에게 물었다.
“현재까지 특별한 위험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고 EOD(폭발물 처리반)를 긴급 호출했습니다.”
그의 말에 차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레이스 박사에게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박사님. 호텔은 엄중 경호되고 있고, 이 안에만 계신다면 안전은 문제될 것이 없을 거예요.”
“......감사드립니다. 차관님.”
차관의 위로에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의 말을 전하는 그레이스 박사의 얼굴은 복잡 미묘해 보였다.
차관은 박사의 감사를 미소로 받았다. 그리고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한규호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방금까지 보였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미스터 스즈키. 이야기를 좀 해야 할 것 같군요.”
창가에 기댄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대로 도밍게즈 소령까지 모두 모이자 차관이 말을 걸어왔다.
“말씀하시지요.”
한규호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말했다.
“누구죠? 당신은? 인류학 박사 노아 스즈키가 맞나요?”
한규호를 바라보는 차관의 시선이 매서웠다.
“아닙니다.”
그녀의 질문에 한규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한규호는 차관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했다. 그 시선은 한규호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름이 무엇인지, 정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목적으로 가짜 신분을 가지고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등등을. 그러나 한규호는 자신이 먼저 주절주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군가요?”
차관이 물었다.
“그는..... 미국 정부에서 저에게 붙여준 특별 경호.... 원....이에요.”
그레이스 박사가 한규호 대신 답했다. 아고스토는 그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 박사와 한규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서......”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차관은 그레이스 박사의 말을 들었음에도 시선을 계속 한규호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한규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신과 적의가 담겨 있었다.
“불쾌하네요. 아무리 이번 포럼의 준비와 진행을 민간단체 주관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우리 베네수엘라는 정부차원에서, 차관인 저와 장관님이 움직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외교적 결례라고 생각되는군요.”
차관은 한규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차관의 말이, 시선이 향한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변명을 했던 그레이스 박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차관의 적의는 한규호에게 향해 있다는 것이다.
“..... 차관님.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레이스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한규호가 그레이스 박사의 말을 끊었다.
“...... 뭐라구요?”
차관이 당황해 말을 받았다.
“연방정부 청사 앞에서 현직 차관이 있는데도 저격사건이 있었습니다. 대낮에 주방위군이 호위하는 행렬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들을 전적으로 믿고 그레이스 박사님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보냈어야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한규호가 차관을 보면서 말했다.
“미스터 스즈키!”
그레이스 박사가 한규호에게 말했다. 그러나 한규호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말씀이 상당히 거슬리는군요. 뭐 좋습니다. 결례라고 하셨습니까? 미국 정부에 직접 항의를 하시죠.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금 단순히 화내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한규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금 차관님이 하셔야 하는 말씀은 왜 내가 모르는 경호 인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 아닐까요? 결례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지금 그런 눈으로 보면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시는게 더 결례라고 생각됩니다만.”
한규호는 창가에 기대 팔장을 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문장에 담긴 신랄함을 그 방안에 있던 모두는 느낄 수 있었다.
“........”
차관은 분노를 삼키며 한규호를 집어삼키듯 노려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님.”
한규호는 차관과의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시선을 그레이스 박사에게 돌렸다. 그레이스 박사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바뀌었을 경우 저의 통제에 따른다는 서약서를 작성하신것을 기억하십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그레이스 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상황은 제가 통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고스토 이사님, 챔버 양도 우선 제 말을 따라 주시길 바랍니다.”
아고스토와 앤 챔버는 대답 대신 그레이스 박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레이스 박사의 표정에서 한규호의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됐다.
“제 임무는 여러분들의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하는 것입니다. 안전을 위한 임시 현장책임자의 권한으로, 베네수엘라의 정부의 권고대로 내일 바로 출국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공항으로 떠나기 전까지 호텔 밖으로, 아니 이 층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한규호는 일행을 돌아보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시선을 도밍게즈 소령에게 돌렸다.
“소령님. 호텔 경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소령님과 주 방위군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협의하실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도밍게즈 소령은 그런 한규호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
2일차
CIA 위장기업 Dover American Insurance Co.
시애틀, 워싱턴 주, 미국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상황요원의 목소리가 네일 밀러 국장의 귀에 들렸다.
전면을 가득 메운 화면에는 JW 매리어트 호텔 로비로 줄지어 들어서는 차량의 행렬이 비쳐지고 있었다. 차량 행렬이 멈추자 군용차량에서 군인들이 뛰어나와 리무진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형성했다.
UAV가 원거리에서 촬영하는 영상임에도 화질은 긴장된 군인의 표정이 보일 듯 선명했다.
리무진에서 몇몇 사람들이 나오고, 군인들이 사람의 벽을 만들어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은 아무도 없는 호텔 현관만을 비추고 있었다.
“작전 종료입니다”
옆 자리에 서 있던 팀장이 국장에게 말했다.
국장이 헤드셋을 벗어 팀장에게 건넸다. 팀장은 국장의 헤드셋을 받아 손에 들고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말했다.
“1차 접촉이 끝났습니다. 바로 분석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팀장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카라카스 광역 경비임무를 맡고 있는 베네수엘라 제5 방위군의 현황과 위급상황에서의 대응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저격과 폭발, 습격 같은 예상치 못한 긴급하고 돌발적인 준전시 상황에서의 방위군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방위군은 팀장의 예상보다 더 체계가 잘 잡혀있는 모습을 보였다. 저격 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빠르게 은폐한 후 방어태세를 취했고, 저격 지점이 밝혀졌을 때의 대응도 빨랐다. 긴급 탈출상황에서 차량의 탑승과 긴급이동 과정은 물론 습격상황에서도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보
이질 않았다.
무엇보다 지휘관. 혼란한 상황에서도 지휘권을 확보하고, 병사들에게 적확한 지시를 내렸다. 혼란에 빠진 경호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몸을 날렸고, 피습과정에서 직접 리무진을 몰면서 경호 대상에 집중하는 판단력과 결단력을 보였다.
한 개인의 역량으로 집단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같은 인물이 주요 요직, 수도방위사령부의 특수임무부대의 지휘관 자리에 있다는 것, 유능한 자가 능력에 걸맞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베네수엘라 군부가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분석 작업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당장 이 정도를 알아낸 것만 해도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아니. 그 전에. 처음 저격 장면 다시 띄워 봐.”
국장이 처음 저격 당시의 영상을 다시 보길 원했다.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번 작전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생겨서는 안 될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야기한 정체불명의 요소가 있다는 부분이었다.
“영상 띄웁니다.”
상황요원이 말했다.
화면이 켜지고 차관과 그레이스 박사가 연방정부 청사 앞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들어왔다. 엘 프로페서의 저격이 시작되기 직전 모습이었다.
직후 저격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잠깐 보이고, 금방 지휘체계를 복구한 방위군이 나름대로 지향사격 자세를 취하며 빠르게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까지 채 3분이 되지 않는 영상이 화면에서 재생됐다.
“다시.”
국장이 말했다
영상이 다시 시작됐다. 이야기를 나누고, 저격이 발생하고, 그리고 엄폐했다가 탑승.
“다시.”
또 같은 영상이 화면에 비춰졌다. “50%의 속도로.”
국장이 다시 말했다.
영상이 천천히 돌아갔다. 초당 1200프레임을 찍어내는 UAV 카메라의 성능 덕분에 화면은 재생속도가 2배로 늘어났음에도 보통 속도의 그것처럼 깨끗하게 보였다.
네일 밀러는 영상에 집중했다. 자신이 알아 챈 그 장면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몇 번을 돌려보았다.
두 사람의 여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리고 그 옆에 젊은 여자가 서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은 그들로부터 3~4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몸을 날리며 두 팔을 벌려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여자들을 품 안에 감쌌다.
“10%의 속도로.”
밀러가 다시 말했다. 같은 영상이 더 천천히 흘러갔다.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이 뛰어들고 하는 장면이 천천히, 마치 영화제작용 영상처럼 정적이면서 또한 동적인 영상이 다시 화면에 흘러나왔다.
밀러는 자신에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화면에 집중했다.
한규호가 몸을 날리고, 1초, 정확히는 1.28초 뒤에 군용차량 유리에 총알이 박혔다. 그리고 0.5초 뒤에 리무진 뒷문을 잡고 있던 남자의 팔이 날아갔다.
총 소리가 들리기 전에, 총알이 날아오기 전에, 저격이라는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요소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한규호는 위험을 인식하고 몸을 움직였다.
그가 먼저 움직였다. 그가 먼저 움직이고, 그리고 저격이 실행됐다.
기프티드의 조건.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는 능력. 그리고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어야 한다.
한규호의 모습이 그랬다.
아프가니스탄에서 UAV가 그를 놓친 이유,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위성이 그를 놓친 이유에 대해서 분석한 후 도출된 한 개의 시나리오. 홀로 행동하는 그를 잡을 수 없다면 일행을 붙이면 어떠할까라는 가설에서 도출된 작전.
홀로 들판을 뛰어다니는 늑대를 관찰하기 위해 양떼를 지키는 양치기견으로 만들어보았다.
밀러 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잡았다.
미국은 지금 막 세 번째 기프티드의 존재를 확인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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