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59화 (60/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6) >

18일 전.

CIA 위장기업 Dover American Insurance Co.

시애틀, 워싱턴 주, 미국

트레이시는 이번이 첫 시애틀 방문임을 깨달았다.

미 중부의 평범한 백인 마을에서 자란 그녀는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브라운 대학교를 나왔고, 졸업 이후 바로 CIA에 들어가 줄곧 동부에서 살았다.

스타벅스 1호점은 그저 탄 맛이 강한 커피집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펄잼이나 너바나와 같은 얼터너티브락은 남부 컨트리 뮤직과 같이 늙은이들의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그녀가 이곳 시애틀, 친구 하나, 친인척 하나 없는 이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서부에서 일했을 때는 샌프란시스코나 롱비치, 애너하임이 주 활동 영역이었고, 시애틀은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직접 이곳에 발을 디디고서야 알았다.

대략 20일 전, 한규호 일행과 같이 에어 인디아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그녀를 맞이한 것은 CIA 동아시아 지부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정중한 자세로 그녀를 오산 미 공군기지로 안내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바로 오키나와로 다시 이동했다.

오키나와에 도착해서 아이작 페리를 만나 구두 보고를 한 후, 몇 시간 후에 바로 군용기를 타고 괌 앤더슨 공군기지로, 그 곳에서 잠시 대기한 후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랭리로 갔다.

랭리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네일 밀러 CIA 국장을 직접 대면했다.

CIA 본부 지하 회의실, 취조실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그곳에서 트레이시는 네일 밀러 국장에게 그녀가 보고, 듣고, 알고, 그리고 유추한 모든 사실을 보고했다. 보안 절차에 따른 전자보고 대신, 밀러 국장은 그녀의 말을 전부 육성으로 들었다.

3일간. 이번에도 3일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의 3일과는 달랐다.

네일 밀러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고, 그는 계속 일정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밀러 국장이 잠시 짬이 나면 그곳으로 들러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시마냥 그 좁은 공간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3일을 보낸 것이다.

한 번에 이야기 했으면 4~5시간 안에 끝났을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트레이시는 그 좁은 사무실에 3일을 갇혀 있었다.

밀러 국장은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또 보자고 말한 다음 문을 열고 나갔고,  그가  나가자, 신분을 알 수 없는, 아마도 요원임이 분명한 두 여자가 그녀를 데려가 씻기고, 비행기에 태웠다.

트레이시가 탄 비행기는 한참을 날아갔고, 트레이시는 그 시간을 유추해 미국 서부로 그녀가 보내졌음을 알았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루이스-맥코드 합동기지(Joint Base Lewis-McChord; JBLM)에 도착했음을 알았다. 워싱턴 주(州) 타코마에 위치한 속칭 ‘가장 골칫거리인 기지(most troubled base)’에.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이 제공한 사이즈가 꼭 맞는 사무직원용 투피스 정장으로 갈아입은 다음 차를 탔고,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곳 시애틀 다운타운 5번가에 위치한 이 건물 회의실에 앉아 있는 것이다.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

2012년 포츈 선정 300대 기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이 회사 사무실에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앉아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여기 있는 이유는 한규호와 관련된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사무실에 들어온 지 20분 정도가 지났다. 그녀의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 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전화를 받은 그날, 바로 오키나와 기지에서 괌으로, 그리고 방글라데시로. 방글라데시에서 그를 만나고, 치타공에서 며칠을 보낸 다음 인도로, 그리고 한국으로. 오산에서 오키나와로, 다시 괌을 거쳐 버지니아에서 시애틀로.

집을 비운지 한 달이 지났네. 빨랫감이 있었던가? 에어컨도 켜놓고 왔던 것 같은데,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도 다 상했겠네.

그녀는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집, 그녀의 빨래, 그녀의 냉장고임에도 마치 타인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그녀가 겪는 상황에서 과거의 일상들이 오히려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철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그녀가 이미 만나본 사람이었다. 네일 밀러 국장.

대략 스물 몇 시간 전 버지니아에서 만났던 그를 지금 시애틀에 있는 도버 아메리칸 인슈어런스사(社)의 회의실 중 한곳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트레이시는 국장과 헤어지면서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국장과 함께 들어온 다른 사람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여성과, 젊은 남자였다.

사무실에 들어온 국장과 여성은 자리에 앉았다. 젊은 남자는 국장의 짐으로 보이는 가방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국장은 손가락을 세 개 펴 보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30분.”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작은 회의실에는 트레이시를 포함해 3명만이 남았다.

“반가워요. 테일러 요원.”

먼저 백인 여성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초등학교 선생님, 오랜 경력을 가진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푸근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트레이시도 웃으며 인사했다.

“테일러 요원. 고생이 많아요. 집에는 얼마나 못 들어갔나요?”

상담 선생님. 그냥 교사도 아니고 상담 교사가 떠오르는 친절한 어조였다.

“글쎄요.”

트레이시는 말을 아꼈다. 밀러 국장이 옆에 있다고 해서 그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호호호.”

트레이시의 그 같은 반응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풍채가 있는 전형적인 백인 여성, 어찌 보면 상담교사처럼, 어쩌면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활약하는 사커맘(자녀의 체육활동에 시간을 투자하는 백인 중산층 여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트레이시는 중부 백인 커뮤니티에서 자랐고, 축구를 했기에, 그런 그녀에게서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웃어서 미안해요. 얼굴이 너무 딱딱하네요. 긴장 좀 풀어요.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트레이시는 더욱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인 여성은 눈앞의 서류를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테일러 요원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조사를 했어요.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고, 왜 입사했고, 입사 후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이미 로건에게 다 들었던 이야기다. 요원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받는 배경조사이다.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조사도 같이 진행했어요.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사이는 좋은지, 나쁘면 왜 나쁜지 등등.”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트레이시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조금 전 보여주던 사커맘의 포근했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테일러 요원.”

“선택이라 하시면....”

“가족에게 돌아갈 것인지, 아닌지.”

백인 여성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많은 시간을 이동하고 기다리면서 보냈다.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그녀는 머릿속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그리고 도출한 예상결과 중 하나가 지금과 비슷했다.

새로운 임무를 권유 받고, 그 조건으로 개인으로서의 트레이시 테일러를 지우는 것.

“질문할 수 있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국장을 향해 있었다.

“테일러 요원.”

그 대답을 중년 여성이 받았다.

“간단합니다. 트레이시 테일러를 선택하면 당신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이대로 오키나와로 가서 집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랭리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적당한 자리에서 적당한 업무를 맡으며. 평온하고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고, 바하마 3주 휴가를 즐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그리고.”

어느새 트레이시의 눈은 백인 여성을 향해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 CIA를 그만 둘 수 있게 됩니다.”

트레이시는 일상적인 미국인의 삶을 나열하는 눈앞의 그녀가 그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나열한 것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트레이시 테일러를 포기하면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을 잃게 됩니다.” “모든 것을?”

“전부. 다.”

그녀가 말했다.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선택권과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뭘 얻게 되나요.”

트레이시가 물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선택하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급부가 없는 선택은 없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불과하다.

“테일러 요원. 질문은 받지 않..”

백인 여성의 말이 끊겼다. 국장에 의해서.

“진실. 그리고 권한.”

“진실?”

트레이시가 국장에게 물었다.

권한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실?

“오직 5명만이 아는 진실.”

“....5명?”

“나, 그리고 지금 이 사람.”

밀러 국장이 옆에 앉은 중년 여성을 가리켰다.

“남은 세 사람은....?”

“윌리스 웨버.”

“기밀보호위원장....”

상원의원, 그리고 기밀보호위원장.

“대통령. 현직, 그리고 전직.”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

15일 전

태청무역

산성동 성남시 경기도 대한민국

“남은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지. 아주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김훈이 말했다.

한규호는 김훈을 보고 있었다. 아니 김훈의 눈을 보고 있었다. 김훈의 눈은 차분해 보였다.

한규호의 감정은 아직 격양된 상태였다. 심장박동이 아직 빨랐다.

백금산.

그 단어를 듣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개마고원의 그 끔찍한 밤을 떠올리고, 뒤에서 따라오는 공포를 기억해낸 그 순간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 타이밍에 김훈이 그를 압박해왔다. 아니, 협박해왔다.

능력을 알고 있다. 미국도 알아챘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밑으로 들어와 조직의 보호를 받으라고 한규호를 압박했다. 협박했다. 그리고 완. 그녀를 협박용 카드로 올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테이블 위의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많은 담배를 연거푸 피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불쾌감을 느낀 것도.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한규호가 말했다.

“뭐가 말인가.”

“유만호라고 했던가요? 그를 왜 데리고 왔는지. 당신이 왜 그 멍청이를 데려와 날 일개 용병취급하며 날뛰는 것을 보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자 폐포 점막을 통해 흡수된 니코틴이 혈관을 통해 7초만에 그의 뇌에 도달했고, 니코틴에 의해 자극 받은 뇌는 한규호의 몸에 아세틸콜린 배출을 명령했다. 그렇게 배출된 아세틸콜린은 심장조직에서 저해작용을 통해 심장박동수를 낮췄다. 그러나 다른 배출 물질에 의해 촉진되는 심장박동은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넘어섰다.

심장박동은 평소보다 약간 빠른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김훈은 한규호가 자신을 당신이라고 지칭했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한규호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담배를 깊숙하게 빨아들인 후 한규호는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의 심장박동은 아직 빨랐다. 한규호는 의지로 심장박동을 늦추지 않았다. 빠르게 두었다.

“넘겨주면 되겠군요.”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심장 박동은 아직 빨랐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중국이 원하는 정보를. 핫라인? 한중 정보기관 최고위급 사이의 비공식 핫라인으로 그 여자의 신병을 요구했다고? 넘겨주시죠. 아니지. 넘길 수가 없겠군. 미국이 데리고 있으니. 그러면 미국이 데리고 있다고 이야기 해주고. 거기에 더해서 데이빗 박은 사실 한규호라는 놈이고, 한국정부의 의뢰를 받아서 북한에 관련된 정보를 캐기 위해 그곳에 잠입한 독립요원이자 용병이고, 원래 한국군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같이 전달해 주면 되겠군요. 그렇게 중요한 라인이면 말입니다.”

한규호는 심장 박동이 조금 더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감정의 둑이 조금씩 넘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같은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지 말고 이 이야기도 꼭 하시죠. 한규호라는 놈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별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당신도 알고 있고, 이제 미국 놈들도 아는 것 같다고. 미국 놈들이 차지하기 전에 당신들이 먼저 데려다 해부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김훈은 한규호의 눈에서 터질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을 보았다.

“유만호를 데려와서 그가 날 용병취급하고 날뛰게 둔 다음, 그리고 당신이 나서고.. 자. 나는 다 알고 있다. 나는 다 이해하고 있다. 오직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다. 평생을 정보조직에서 살아왔고, 평생을 조직 안에서 사람을 압박하고 다루는 일만을 해온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방법이군요. 정보위원회? 요원들을 지키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정보위원회? 웃기는군요. 당신은 지금 유만호를 희생양으로 삼았어요. 나를 회유하기 위해, 나에게 심리적인 트랩을 걸기 위해 당신은 부하직원인 유만호를 덫으

로 깔았어요. 그러면서 요원들을 보호하겠다는 말을 그 입에 올린 겁니까? 더 이상 이름 없는 별을 새기지 않겠다고 함부로 이야기 한 겁니까?”

김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미 식양이라는 정보를 숨김으로써 당신은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정보를 차단한 채로 나를 그저 도구취급하면서 그곳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들통 난 상황에서 나와 당신 조직과의 관계는 이미 끝났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김형원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 뿐, 신뢰관계는 이미 금이 갈 대로 가버렸고. 그리고 당신이 그 금에다가 망치질을 했고. 당신 말대로 당신이 나를 진작부터 보고 있었다고 한다면, 나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했었다면,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접근했어야 했을

겁니다. 김형원 사장처럼 말이죠. 제가 김형원 사장과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국정원이나 정보위원회 사람이고, 나에게 일을 물어다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아니. 지금 보니 모르는 것 같군요. 사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인데, 그런 내가 꼭 김형원을 고집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이유를 당신은 모르는 것 같군요. 내가 그를 통해서 의뢰를 받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고, 국정원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김형원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규호의 목소리와 어조가 점점 격양됨이 느껴졌다.

“그저 평생 정보원 놀이를 해온 것처럼 이번에도 정보와 지위, 관계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면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국정원이라는 이름에, 국정원 원장이라는 직위에, 김훈이라는 위명에 놀라 당신의 뜻대로 움질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바보같은 도발을 한 겁니까?”

김훈은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아직 안끝났어!”

한규호가 강한 기운을 담아 말했다.

“좋아요. 내가 이야기해 보죠. 당신 말이 모두 맞다는 가정 하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미국이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도 알았고, 더군다나 이번에는 중국하고도 관련이 있었고. 그러니 당신은 이제 나라는 늑대를 무리 안으로 끌어들일 타이밍이라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동안 김형원이 계속 먹이를 줘 왔고, 일반적인, 멍청한 사육사인 유만호를 중간에 껴서 오직 당신만이 나를 길들일 수 있는 사육사라는 인상을 주면 나한테 먹힐 거라고 생각했겠지. 언제나 잘 먹혀온 방법이었겠지. 그

래서 실행을 한 것이고. 더 이상 미국이 나에 대해 더 관심을 갖기 전에, 더 알기 전에”

한규호는 몸을 앞으로 굽혀 무게중심을 천천히 이동시켰다.

“목적. 내가 원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돕겠다고 했습니까? 우습군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규호의 감정의 둑이 터졌다.

“김훈. 나에게 장난치지 마라. 그날 백금산에서 한규호라는 사람은 죽었다. 지금 여기 당신 앞에 서 있는 것은 그저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진 시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그 입에 백금산을 올리지 마라. 두 번은 없다”

한규호는 몸을 일으켰다.

“하나만 알려주지. 내가 원하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미국, 중국 아니, 악마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어. 하지만 악마의 개가 되지는 않아.” 한규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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