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58화 (59/386)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 >

한규호는 김훈을 노려보았다.

그는 무엇을 알고 말한 것일까? 알았다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지금 그 공간에서 말을 꺼낸 김훈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김형원도, 유만호도, 그리고 한규호도.

그러나 각각 놀라움의 근원은 달랐고, 그 표현도 달랐다.

“..... 무슨 의미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몸을 일으켜 나가려던 그 자세 그대로 한규호는 김훈을 노려보며 물었다.

변화.

단 한 번도 얼굴의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던 김훈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승자의 여유 있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걸렸다.

“무슨 의미일까?”

한규호는 잠시 고민했다. 나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앉을 것인가.

한규호는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국정원과 한규호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김형원은 어느 정도 한규호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한규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2년 전 아프가니스탄도 그렇고, 그 다음해 이스라엘에서도, 일본에서도, 올해 소말리아에서도, 그리고 얼마 전 트라이앵글에서도 한규호는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해 왔고, 김형원은 한규호가 무언가 특별하다는 사실 정도는 유추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자네가 못하면 누구도 못하겠지.)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국의 접경지역인 트라이앵글 프라이멀 카지노로 떠나기 직전 김형원에게 들었던 말이 그 같은 의심을 뒷받침한다.

김형원이 김훈에게 보고했을까?

그런데 저 시선은, 놀라움과 의문을 가득 담아 김훈 원장을 바라보는 저 시선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슨 의미입니까?”

한규호가 다시 물었다. 의심스러운, 의표를 찌르는 말을 했다고 해서 다 들킨 것처럼 전부 다 술술 불 수야 없는 것 아닌가?

한규호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히든 카드가 한 장 남아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는 것. 나가서 더 이상 김형원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 더 이상 국정원이나 원청이 의뢰하는 일을 맡지 않는 카드가 남았다.

한규호는 하청이다. 을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하청과 을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하청이고 을이었다. 이 관계가 깨져서 눈물을 흘릴 곳은 정보위원회, 국정원,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이다.

애국심? 한규호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가져보지 않았다.

한국인의 국적과 이름을 가지고 한국정보기관을 위해 일을 하는 그였지만, 애국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고, 너무 많은 일을 해왔다.

아니, 애초에, 그가 군인이 된 것은, 입대를 선택한 이유는 그저 직업으로서의 선택이었다. 애국심, 국가, 조국, 민족 같은 단어는 그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 충성의 대상을 꼭 찾아야 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관념적 존재는 아니었다. 지하철 역 앞 순대국 집 할머니와 그 손녀의 평안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면 국가와 민족이라는 관념적인 단어보다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단 앉지.”

김훈이 말했다.

한규호는 몸을 돌려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이제 더 이상 이 나라와는 일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중국에서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네.”

김훈이 말이 그를 멈춰 세웠다.

한규호는 나가기로 마음먹은 자신의 마음을 잠시 보류했다.

“둘이서만 이야기 하지.”

김훈이 말했다.

김형원은 한규호를, 유만호는 김훈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방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아 있었다.

김훈은 담뱃갑을 들어 한 개비를 꺼낸 후 한규호에게 내밀었다. 한규호는 그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김훈도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다음 한규호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중국 놈들은 그 여자를 미국이 데리고 간 것은 모르고 있는 듯 하더군. 자네 신원 확인과 더불어 그 여자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왔네. 그녀는...”

김훈은 담배를 비벼 끄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리고는 한규호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아주 미인이더군.”

한규호는 아직 담배를 든 채로 김훈의 눈을 마주 바라 보았다.

“나에게 직접 왔지. 중국 국가안전부 최고위급과의 비공식 핫라인을 통해서.”

“비공식?”

한규호가 물었다.

“그래. 비공식. 기록도 남지 않고, 두 사람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공식라인. 하지만 그 어느 라인보다 강한 영향력을 가진 핫라인을 통해서 말이지.”

양국 정보기관 수장 사이에 비공식 핫라인이 가지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 지 한규호도 알 것 같았다.

“재미있더군. 스무 살? 넉넉잡아도 스물 다섯도 채 안 되보이던데. 카지노 제복을 이쁘게 차려입은 어린 아가씨를 확보하기 위해 그 핫라인이 이용됐다는 이야기가. 이 정도면 중국놈들이 빤쓰까지 다 벗고 덤벼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미국애들도 그 여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지. 당신네 사람인 미스터 한이 미스 제인도우(Jane Doe: 신원미상인의 여성형 명칭)의 치료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녀가 누구

인지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알려 달라. 알려 주지 않으면.”

“않으면?”

한규호가 물었다.

“뭐. 신원 확인 요청을 하겠다. 미얀마에서 넘어온 것 같으니 미얀마에다, 아니면 태국이라도, 아니면 중국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해왔지.”

“흠....”

한규호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멍청한 놈들이 멍청한 협박을 해 온 것이다.

“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지. 우선 왜 미국놈들이 그런 것을 물어왔을까? 알려고 하면 그냥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고문이라면 또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 그 놈들 아니던가, 더군다나 미얀마나 태국이나 중국에 물어보겠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미리 이야기한다는 사실도 의아했지. 그럴 놈들이 아닌데.”

CIA가 지키는 유일한 법 규칙은 자국 내 활동 금지 조항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안하무인으로 사고를 치고 다닌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무소불위의 세계 비밀 경찰이 바로 CIA다. 그런데 한국에 의향을 물어보았다?

한규호는 김훈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협박, 일종의 협박이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 여자를 팔아버릴 것이라는 협박. 그러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그놈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니까 협박을 해왔을 테고, 그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그 여자를 데리고 온 자네. 독립요원 한규호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지만 김훈의 분석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독립요원 한규호. 한국 쪽 인물이고, 몇 번 작전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몇 번 했나?”

“.... 두 번.”

한규호가 말했다.

“이번 까지 하면 총 세 번의 접촉이 있었군. 아무튼 작전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독립요원. 유 단장처럼, 아. 유 단장, 그러니까 자네에게 아까 화를 낸 유만호, 그 친구를 말하는 거지. 아무튼 독립요원이라고 하면 유만호처럼 그저 용병 취급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그런 용병에게 저런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롭지 않나?”

한규호는 말없이 그저 김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정원에 투신한 후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보요원으로 살아왔고, 그리고 지금 정보기관의 수장 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답이 없군. 좋아. 좋은 자세야. 계속 이야기 하지. 곽용신. 자네를 데리러 간 우리 측 요원 중 한 명의 이름이 곽용신이네. 그의 보고서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더군. 페이브 호크, 완전무장하고 그 트레이시라는 여자를 보호하는 군인, 그리고 들려온 단어. 7th fleet.” 7함대. 그 놈의 7함대가 문제다.

“말이 길어지는군. 한 대 더 태울 텐가?”

한규호는 대답 대신 담뱃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훈에게 한 대를 건네고, 자신도 입에 물었다. 이번에도 김훈이 한규호에게 먼저 불을 붙여 주었다.

“길군요. 오늘 안으로 끝납니까?”

한규호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렇군.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군.”

김훈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흥분한 것을 알아챘다. 얼마 전엔 김형원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더니, 오늘은 자신이 이렇게 길게 말을 하고 있다.

이 자식하고 엮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군.

“그래. 슬슬 끝을 내지. 여기까지 왔는데, 말을 돌리는 것도 우습군. 좋아. 미국이 고작 독립요원인 한규호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다. 자신들이 확보한 여자의 신병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놓고서 말이지.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지. 한규호, 우리 2급 단장은 고작 실력좀 있다고 건방떠는 용병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독립요원 한규호를 미국은 그저 그런 용병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 확신했을까? 아마 의심하고 있겠지. 저 자식은 특별한

놈이다. 그렇게 말이지.”

한규호는 말없이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형원이는 아는 눈치더군. 나도 적당히 눈치를 챘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백금산에 갔을 때가 2006년이었나?”

한규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김훈의 입에서 그 지명이 나올 줄은 몰랐다.

백금산.

옛 지명은 용양, 개마고원이 분지를 이룬 함경남도의 지류 중 하나이며, 마그네사이트, 아연, 납 등이 풍부한 광산지역으로 일제 강점기에 개발되었다가 현재는 폐광지역이 된 백금산의 이름이 김훈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을 쏘아보는 한규호의 매서운 눈빛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김훈은 여전히 여유 있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네를 알고 있었지. 그리고 지켜보고 있었네. 코드명 진도3, 전역 후에는 독립요원 한규호로 활동하는 모습을. 형원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네를 지켜보고 있으면 자네가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네. 더군다나 나처럼 작전의 모든 부분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말이지.”

“..... 백금산은 어떻게 압니까?”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특수정찰부 애들 목을 수도 없이 따고 다닌 귀신 특수부대 이야기는 아직도 유명하지.”

“백금산은 어떻게 압니까?”

“살아있는 전설, 진도3이 중사 한규호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나 빼고는 없겠지.”

“백금산을 어떻게 아는데!!!”

한규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김훈에게 소리쳤다.

“너를 회수해 온 것이 나였으니까.”

김훈이 말했다.

“..... 회수.... 했다고?”

“그래. 그 작전에서 살아 돌아온 너희 둘을 회수할 때 현장 책임자가 나였다. 그리고 내가 너를 회수했다. 이번처럼 부상을 입은 동료를 업고 하룻밤 만에 100km를 걸어와 국경을 넘어온 너를 맞이한 게 나였다.”

한규호는 그날을 떠올렸다.

부대원 모두가 죽어간 그날,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전우를 업고, 뒤에서 그들을 따라오는 공포에 쫒기며,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개마고원을 달리고 또 달려 북-중 국경을 넘은 그날을.

“한규호. 너는 혼자 살 수 없다. 만약 너의 능력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혼자 살 수 없다. 나도, 형원이도, 그리고 미국도 너의 능력을 안다. 적어도 아주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이제 너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김훈이 몸을 일으켰다. 원래도 작지 않은 김훈이였지만 몸을 일으키자 더욱 크게 보였다.

“나는 저번 임무에서. 미얀마를 거쳐 방글라데시로 가는 그 작전에서 너의 안전보다 조직에 속한 요원의 안위를 우선으로 했다. 네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너는 우리 식구가 아니고, 그렇다면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식구를 보호하기 위해 너를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나는, 우리는 주저 없이 너를 포기 할 것이다. 한 마리 고독한 호랑이보다는 지시를 따를 줄 아는 열 마리의 평범한 늑대무리가 지금 우리에게 필

요하니까.”

김훈의 말이 맞다. 한규호도 김훈과 같은 입장이라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식양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조직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장기말이다. 우리 조직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너는 장기말에 불과하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퀸이라고 해도 체스판에서 그저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장기말에 불과하다.” 자신을 장기말로 치부하는 김훈의 말에도 한규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직으로 들어와라.”

“국정원?”

“정보위원회.”

“.... 뭐가 다릅니까?”

“너는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원하는 무언가는 있다.”

한규호는 앉아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훈의 눈을 보았다. 그의 확장된 감각이 아니더라도 지금 김훈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애국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과 봉사?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너의 욕망을, 너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좋다. 그걸 위해서라는 불순한 의도라도 상관없다.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우리가 너를 도울 것이다. 우리가 너를 보호할 것이다.”

한규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평생을 살았고,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남자의 눈만을 보고 있었다.

“국가라는 명분아래, 조직을 위해 요원을 희생시키는 상황을 끝내기 위해 정보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더 이상 이름없는 별을 새기지 않기 위해서 정보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그 요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의 힘을 키워야 한다. 한규호, 너 스스로가 조직의 일원이 된다면, 그래서 네가 조직을 지키고, 요원들을 보호한다면, 우린 조직의 모든 것을 걸고 너를 보호하겠다. 그 여자까지도.”

“그 여자?”

“미국이 너를 요청했다. 너를 지목했다. 가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들이 요청하고, 우리가 주선한 독립요원의 모습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와라. 그러면 나는 중국의 제안을, 그 여자에 대한 정보를 넘겨달라는 제안을 거절하겠다.”

한규호는 자신이 한방 맞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김훈은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돌아와서 하지. 아주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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