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 >
15일 전
태청무역
산성동 성남시 경기도 대한민국
태청무역 수출입 2과 과장 한규호는 오랜만에 산성동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를 위한 책상도, 그와 함께 일을 하는 동료도 없는 이곳을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바로 김형원의 호출.
일요일 새벽, 아침이라기에는 아직 이른 새벽 시간에 그는 태청무역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한규호가 한국에 들어온 지 보름 정도가 지났다.
위장여권으로 인도에서 에어 인디아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규호와 그를 보호하던 국정원 직원 둘은 국정원에서, 트레이시는 미국 측에서 신병을 인도해갔다.
한규호는 국정원이 마련한 차를 타고, 강남 인근 안가로 가서 김형원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북한의 외화벌이 자금 중 일부가 식양의 화교 네트워크 안에서 세탁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 돈 일부가 중국 분리독립 세력의 지원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내용을 구두로 말했다. 증거는 필요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체적인 그림이었으니까.
김형원은 그 이외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쉬라고 말한 다음 그를 보내주었을 뿐이었다. 한규호가 데리고 온 여자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탈출했는지, 왜 미국이 개입했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북한과 관련된 정보, 그들이 원했던 정보만을 받아갔다.
한규호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끝을 냈다.
한규호는 국정원이나 정보위원회 소속이 아니었고, 김형원은 한규호의 상사가 아니었다. 그 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규호의 눈에 태청무역의 허름한 간판이 들어왔다.
한규호는 당분간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곤해서? 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트레이시가 한 말.
(7함대가 대기 중이에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트레이시에게 전화를 건 이유는 단순히 여러 가지 변수들을 만들어 두고 싶어서였을 뿐이었다.
한규호는 탈출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탈출에 실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이 추적해오기는 하겠지만 잡히진 않을 것이고 태국은 미온적으로 간접적인 도움만을 줄 것이다. 설령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 해도 그들이 추적해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설사 추적대가 지근거리로 접근한다 해도 걸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한규호가 완을 데리고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탈출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규호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변수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트레이시라는 변수, CIA와 미국을 통해 흘러나갈 수 있는 정보들, 혹시라도 그녀가 온다면, 그녀가 방글라데시에서 그를 맞이할 작전을 수행한다면 거기에 반응할 방글라데시의 반응,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이 뒤섞여 만들어 낼 혼란 등등. 그러한 변수들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트레이시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외과적 수술까지 요구한 것이다. 장비와 인력이 많아지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늘어나고, 변수도 다양해지니까.
하나, 한규호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외눈박이 저격수.
교회 첨탑 위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구닥다리 소총을 들고 800m 밖, 한규호의 감각 밖에서 그들을 저격해 낸 사람.
한규호가 예상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변수인 외눈박이 저격수의 등장으로, 그저 바닥에 한 점 깔아놓은, 사석이 될 수 있었던 트레이시라는 돌이 의미 있는 포석이 되었다.
그런데 그 포석의 효능이 너무 절묘했다.
7함대. 서태평양을 관할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 해군 함대가 인도양에 대기하고 트레이시, 고작 비행기에서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부어주는 승무원 역할을 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특작팀을 대동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규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피어오르는 의문은 거기에서 시작했다. 둘 중 하나다.
우연이거나, 아니면 의도됐거나.
당연히 우연이어야 한다. 우연일 수밖에 없다. 트레이시라는 하급 요원이 한규호라는 용병을 위해서 7함대와 특작부대를 동원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그저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다가 가장 그럴듯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뭔가 찝찝했다.
7함대가 있었고, 특작팀이 그녀를 보호했고, 분명히 그녀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음이 분명한 특작팀 베테랑에게 그녀가 지시를 내리는 모습에서 한규호는 이질감을 느꼈다.
얼마 전 방글라데시, 그 전에 소말리아, 그리고 2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국과 관련되었던 3번의 작전, 그 때 미국이 눈치를 챘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단서.
애꾸눈 저격수.
마치 한규호, 그처럼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그의 존재.
그리고 미국.
흐릿한 안개 너머로 진실에 대한 조각들이 조금씩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한규호는 언젠가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한규호 자신에 대한 정보를 내어줘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만약 그 개자식을 잡을 수 있다면. 그 개자식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한규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설령 상대가 악마라 하더라도 손을 잡을 용의가 있었다.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깟 미국쯤이야. 미국이 한규호의 능력을 알아채고, 그를 잡아 해부하려 한다 해도, 한규호 혼자라면 몸을 빼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미국과 손을 잡을 시기는 아니다.
7함대, 애꾸눈 저격수, 미국, 그리고 개자식.
생각할 것이 많았다.
한규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태청무역 1층 문을 열고 좁은 건물 계단을 올랐다.
***
일요일 새벽의 태청무역은 텅 비어 있었다.
한규호는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사장실의 문을 열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 김 부장! 왜 일요일 새벽부터 사람을 오라 가라......”
한규호는 농담을 다 끝내지 못했다. 사장실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는 세 사람의 중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장실의 주인인 김형원,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
한규호는 빠르게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 중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원장 김훈.
그가 태청무역 사장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한규호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한규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국정원 원장, 국정원 위장요원이자 원청인 정보위원회 위원인 김형원, 그리고 아마도 그들과 비슷한 직위로 보이는 정체 모를 남자가 수행원도 없이 이 시각에 나를 기다리고 있다.
좋지 않군.
“앉지.”
정체 모를 남자가 국정원 원장과 사장실 주인을 대신해 말했다. 한규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김형원 옆에 앉았다.
“뭐라도 마실 텐가?” 정체 모를 남자가 물었다.
한규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알겠네.”
김훈 원장과 김형원 사장 대신 정체 모를 그만이 계속 입을 열어 말했다.
“미국에서 연락이 왔네.”
그 말에 한규호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질문을 하는 눈이다. 질문을 받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원청? 최소한 국정원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구?”
한규호는 대답 대신 김형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원청.”
김형원이 답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위원회 사람임이 확인됐다.
그 사실이 확인됐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규호는 정보위원회 소속이 아니고, 질문하는 눈을 가진 저 정체불명의 남자도 자신의 상급자가 아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 버릇이 없군. 한번은 그냥 넘어가지. 하지만 두 번은 없을 거야.”
정체불명의 남자가 위협하는 눈으로 한규호를 보면서 말했다. 한규호는 그가 현장보다는 상황실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서만 자란 개는 맹수를 봐도 맹수임을 모른다.
“미국에서 그 여자가 누군지 신원을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네. 그 여자는 누군가?”
그가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면서 김형원에게 말했다.
“지금 상황이 뭔지 알려주면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뭡니까? 심문입니까? 협조를 구하는 겁니까? 아니면 상담?”
꽝!
정체불명의 남자, 국정원 2급 단장이며 정보위원회 창립 위원 중 한명인 유만호는 주먹을 들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책상 위에 있던 컵이 쓰러지고 담뱃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그가 책상을 내리쳤음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김훈 원장은 미동도 없이 한규호가 들어섰을 때와 변함없는 표정이었고, 김형원도 그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 한규호도 그러한 위협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신이야말로 뭐하는 거야?”
한규호가 처음으로 유만호에게 말했다.
“뭐...뭐?”
“지금 뭐하는 거지? 내가 당신 부하인가? 그쪽 요원인가?”
한규호는 나직이 말하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뭐야!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유만호가 소리를 지르며 막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김훈 원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그 여자는?” 한규호는 시선을 돌려 김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직 원장이 아니던 시절에도 한규호는 그를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쪽에서 밥을 먹고 살다보니 미래 국정원 원장 후보의 얼굴 정도는 한규호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 심문입니까?”
한규호가 물었다.
“..... 질문이라고 해두지.”
김훈이 답했다.
한규호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소파에서 등을 뗀 다음 몸을 앞으로 숙여 바닥에 떨어진 담뱃갑을 주웠다. 그리고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인 라이터를 들어 불을 붙인 후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질문이라.....”
한규호는 고개를 들어 천장으로 연기를 뿜고는 말했다.
“질문은 거절합니다.”
“이 자식이!”
유만호가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저 용병 자식이 감히 누구 앞에서, 2급 단장인 자신과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 앞에서 저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유만호에게는 저 건방진 자식을 죽을 때까지 괴롭힐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차후에 그를 괴롭히는 것보다, 저 건방진 놈의 대가리를 책상에 박아버리는 행동이 우선이었다.
유만호는 몸을 일으키며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저 건방진 용병 놈의 머리채를 휘어잡기 위해서.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앉아.”
유만호는 김형원의 차분한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김형원.
동향의 국정원 입사 선배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낮은 직급이다. 같은 정보위원회 창립 위원이라고 해도, 직책상 자신이 김형원의 위에 있다고 유만호는 생각했다.
그런데 김형원이 저렇게 명령조로 자신에게 말한다? 원장 앞에서?
유만호의 시선이 김형원에게 돌아갔다.
지금 저 용병 놈을 비호하겠다는 말인가? 순간 유만호는 말문을 잊었다. 머뭇거리던 그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게.”
유만호의 옆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 김훈의 말이 들렸다.
“..........”
유만호는 잠시 김형원을 노려보고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말해 줄 수 있겠나?”
김훈이 다시 물었다.
한규호는 대답 대신 연기를 하늘로 뿜어 냈다.
그런 모습을 김훈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사무실을 감쌌다. 그저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만이 사무실에서 움직이는 유일한 물질처럼 보였다.
“..... 말해야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침묵을 깬 것은 한규호였다. 한규호는 여러 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식양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정보를 제한한 상태로 작전을 의뢰했다. 신뢰가 깨진 계약이었다. 그럼에도 한규호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마치 심문하는 듯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나빴다.
“그 외에 따로 할 말이 없으면 먼저 일어납니다. 다음에는....”
한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유만호를 향해 있었다.
“이런 불쾌한 자리는 없었으면 좋겠군요. 특히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사람이 같이 있는 자리는.”
한규호가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유만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지금 저 용병 자식이 감히. 감히 원장님 앞에서!
“...... 미국이 눈치를 챘나?”
김훈 원장이 말했다.
그 순간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김형원과 한규호를 노려보던 유만호의 시선이 김훈원장에게 향했다.
유만호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김형원은 숨은 의미를 알아서, 같지만 다른 당혹스런 시선으로 김훈을 바라보았다.
“미국이 눈치를 챈 것 같은가?
김훈이 어느 때보다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규호의 눈을 마주 보면서 다시 물었다.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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