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 >
1일차
JW 매리엇 카라카스 호텔
카라카스, 베네수엘라
그레이스 박사 일행은 저녁 만찬을 위해 호텔 내에 있는 ‘레스토랑 남 지중해 그릴(Restaurante Sur Mediterranean Grill)’로 들어섰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남미 제일의 지중해 음식 레스토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팻말을 본 앤 챔버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세계 제일의 살인율을 자랑하는 카라카스에서 남지중해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녹아든 그리스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몇 십 미터 밖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여기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지중해 음식 전문점이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레이스 박사 일행이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예복을 갖춰 입은 노신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레이스 박사님. 레스토랑 총지배인 테하다(Tejada)입니다.”
“감사합니다. 세뇨르 테하다.”
그레이스 박사가 감사를 표했다.
“차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테하다가 그들을 깊숙한 내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일어나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닥터 그레이스.”
“오랜만이네요. 차관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두 사람의 여성이 서로의 뺨에 키스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잡고 미소로 반가움을 잠시 표현했다. 그러고 나서 그레이스 박사가 일행을 차관에게 소개했다.
“인사드릴게요. 이 신사 분은 미-베네수엘라 협력재단의 펠릭스 아고스토 이사님이세요. 이사님. 이쪽은 베네수엘라 여성부(Ministerio de la Mujer y la Igualdad de Genero : Women and Gender Affairs) 산타나 차관님이십니다.”
그녀의 소개에 아고스토 이사는 정중하게 다가가 차관의 손을 잡고 다소 과장된 인사를 했다.
“영광입니다. 세뇨라 산타나(Senora Santana). 펠릭스 아고스토입니다.”
그런 과장된 인사에 익숙한 듯 차관은 우아한 몸짓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정중한 인사 감사드립니다. 크리스탈 카스티요 산타나(Cristal Castillo Santana)입니다. 세뇨라는 너무 과하니, 그저 미시즈 산타나, 또는 편하게 크리스탈로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미시즈였군요. 당연히 미스 산타나인줄 알았는데.”
아고스토가 결국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레이스 박사는 아고스토의 입을 막기 위해 한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쪽은 미스터 스즈키입니다. 일본계 미국인 3세로, 인류학자이면서, 이번 포럼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레이스 박사가 한규호를 소개했다.
소개를 받은 한규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노아 스즈키(Noah Suzuki)입니다,”
그의 손을 잡은 산타나 차관은 그런 그에게 일본어로 답했다.
“はじめまして。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차관의 유창한 일본어 인사에 한규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일본어가 나와도 한규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스즈키라는 성과 일본계 미국인 3세라는 신분을 받았을 때부터 예상되던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일본어를 하지 못합니다.”
한규호가 영어로 말했다.
그레이스 박사가 한규호를 거들어 차관에게 설명했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3세입니다만,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합니다. 미국인으로 평생을 살았으니까요.”
CIA가 한규호에게 제공한 신분이 바로 일본계 미국인 3세인 노아 스즈키(Noah Suzuki)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일본 땅을 밟아본 적 없는 인류학자.
“오. 저런. 제가 실수했네요. 사과드려요.”
차관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규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일본인이었으면 여기서 같이 고개를 숙였겠지만 그는 일본인의 모습을 한 미국인이라는 신분이었으니까.
“아닙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일본어를 하시는지?”
“일본 문부과학성 장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를 했었어요. 참으로 감사한 나라입니다. 미스터 스즈키의 모국은.”
산타나 차관이 말했다.
“그러셨군요.”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길어져봤자 좋을 것이 없는 대화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제가 만난 일본계 분들은 다들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는데.”
한규호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일본이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외국인 친일인재 육성의 한 단면을 실제로 보게 되자 씁쓸함이 들었다.
대표적으로 사사카와 재단이 있다. 일본 A급 전범이던 사사카와 료이치가 경정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설립한 사사카와 재단, 일명 일본재단의 경우 노무라 재단, 도요타, 미쓰비시, 도쿄은행 등과 함께 전 세계에 친일 인사 육성을 위한 프로젝트 사업, 장학 사업에 엔화를 쏟아 붓고 있다. 아마 그녀도 그러한 장학사업의 일환으로 일본에 갔을 테고, 그리고 친일인사가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남미에서 일본의 위상은 대단하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브라질은 물론, 남미 전역에서도 하폰(Japon)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그래서 CIA도 그에게 일본계라는 신분을 제안했을는지도 모른다.
한규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산타나 차관은 시선을 남은 한 사람에게 돌렸다.
“이쪽은 미스 앤 챔버입니다. 그녀는 이번 회의 기간 동안 저를 도와 자료를 마련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요.”
그레이스 박사가 말하자 산타나 차관의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떠올랐다.
“반갑습니다. 차관님. 앤 챔버입니다.”
“반갑습니다. 미스 챔버. 챔버 양도 스페인어를 못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 죄송합니다. 저도 스페인어에 그리....”
차관의 얼굴에 또 다른 물음표가 겹쳐졌다.
오지랖 넓은 아고스토가 대신 나섰다.
“하하하. 그녀는 어릴 때 미국에 입양되어서 말이죠. 뭐. 라티노의 피를 이었으니 배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아고스토의 설명에 차관 얼굴의 물음표 하나가 벗겨졌다. 하지만 하나가 남았다. 차관은 그레이스 박사에게 물었다.
“표면적이라니요?”
그레이스 박사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차관님.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드려도 될까요?”
그레이스 박사가 그렇게 말하자 차관은 뭔가 눈치 챈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이런, 제가 손님들을 너무 기다리게 했네요. 우선 앉으시죠. 약소하지만 환영의 의미로 저녁식사를 마련했습니다.”
그녀가 자리를 권하자 일행 모두는 자리에 앉았다.
앤 챔버는 조금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앉으면서 뭔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환영만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 높은 사람의 환영사와 건배 등을 떠올렸는데, 작지는 않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원형 테이블에서의 저녁식사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장관님하고, 레온 회장님께서는 언제 오시는지요?”
자리에 앉은 아고스토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원래, 오늘 자리에는 여성부의 장관과 베네수엘라 아동복지재단의 무리요 레온(Murillo Leon)회장이 같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레온 회장의 경우, 베네수엘라에서 아고스토 이사와 같은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인만큼 아고스토는 그와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 몇 번의 전화통화를 한 바 있었다.
그의 질문에 차관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장관님께서는 급한 일정이 생겨 오늘 만찬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레온... 회장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대신 모시는 것으로 갑자기 결정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산타나 차관은 말을 마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에 모두들, 특히 그레이스 박사의 얼굴이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제대로 진행될지 걱정하던 차에 시작부터 좋지 않은 징조가 보인 것이다.
“차관님. 그래도 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되겠지요?”
그레이스 박사가 물었다. 차관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하길 꺼리는, 혹은 쉽게 말하기 힘든 것 같았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잠시 고민하던 차관이 말했다.
“차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남미에서는 특히 저녁식사에서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굉장히 큰 실례라고 생각한답니다.”
차관의 말에 아고스토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차관은 감사의 의미로 웃으며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고스토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미소로 그 인사를 받았다.
저 여자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만찬은 무정부상태에 가깝다는 카라카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다.
남이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발칸반도의 요리를 적절하게 배분한 지중해식 코스요리였다.
일행은 차관과 그레이스 박사, 그리고 아고스토가 대화를 주도하면서 가벼운 분위기로 저녁 만찬을 즐겼다.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산타나 차관이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들며 말했다.
“훌륭한 식사였어요. 환대에 감사드려요.”
그레이스 박사가 대표로 인사했다.
“하하하. 이렇게 훌륭한 돌마(Dolma:토마토 속에 양념한 쌀을 채운 그리스 요리)를 먹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고스토가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죠. 오기 전에 걱정을 많이 한 것이 사실입니다. 고향이 워낙 힘들어졌다고 해서 말이죠.”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레이스 박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꼭 잘 하다가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아니, 해서 좋을 것이 없는 말을 덧붙인단 말이야.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사님.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최대한의 대접을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라도 알아주셨으면 감사합니다.”
산타나 차관이 여차하면 서로 어색해질 수 있는 순간을 현명하게 받아 넘겼다.
“그나저나, 박사님. 포럼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산타나 차관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는 그레이스 박사를 보면서 말했다.
“네. 어떤 말씀이신지?”
그레이스 박사는 산타나 차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했다.
“내일 장관님을 뵙게 되면 듣게 되시겠지만, 일단 포럼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커피잔을 들던 그레이스 박사의 손이 멈췄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갑자기 포럼이... 왜?”
차관은 대답 대신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레이스 박사는 차관이 두 사람만 이야기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이들을 물려야 할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번 베네수엘라 방문의 실질적인 리더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명목상이지만 아고스토 이사는 이번 포럼을 주최한 주최 측 인물이었고, 스즈키라는 저 동양인은 CIA가 붙여준 경호원이었다. 그것도 단순 경호원이 아니라 밀착 경호원으로 위급상황에서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하고서야 이번 방문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앤 챔버, 아직 23살에 불과한 저 아가씨는 미국 국무부 쪽 인물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인턴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국무부에서 그녀에게 붙인 일종의 녹음기 같은 인물이었다.
물론, 그녀만이 알아야 하는 사실이라면, 그들을 물리겠지만, 일정에 대해서는 그들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그레이스 박사는 생각했다.
특히 그들 중 한명.
앤 챔버.
그녀는 중요했다.
앞으로 그레이스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남아메리카에 만연한 인신매매라는 범죄의 사슬을 끊어 내기 위해서 미국 정부의 힘은 필수적이고, 그녀가 귀국해서 국무부에 보고하는 내용은 향후 미국 정부의 행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3살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어 5살부터 그 천재성을 드러낸, 미국 정부를 이끌 차세대 예비 리더그룹 중 한 명인 앤 챔버는 어쩌면 그레이스 박사 일행에서는 향후 가장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레이스 박사는 마음을 정했다. 모두와 함께 듣겠다고.
“.... 박사님.... 알겠습니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장관님께서도 말씀하시겠지만, 포럼은 취소되었습니다. 포럼 참석자들에게 좀... 어려운 상황이 생겼습니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러한 이유로 유니세프 남미 위원회와 가톨릭 인권연대도 내일 철수할 계획입니다.”
산타나 차관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생각하다 마음을 굳힌 듯 그레이스 박사에게 말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정부는 그레이스 박사님 일행께 내일 모래 정기항공편으로 귀국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바입니다. 준비는 저희가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차관의 말에, 그레이스 박사는 너무 놀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 그녀가 우려했던 가장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이번 포럼을 만들기 위해, 아니, 포럼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작은 규모의 관계자 회의를 만들기 위해 거의 2년을 준비했다.
미국 정부와 유엔인권위를 설득하고, 미국 내 라티노 커뮤니티에 도움을 호소했다. 남미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의 힘을 얻기 위해 교황청과도 여러 번의 협의를 거쳤다. 편지를 보낸 것만 수십 통이 넘었다.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끈질긴 설득작업, 관심 없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눈앞의 뇌물과 미래의 보답을 약속하며 겨우 얻어낸 결실이 바로 ‘남아메리카 인신매매 범죄대응 포럼’이라는 이름의 관계자 회의였다.
한규호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 CIA에서 받았던 그녀의 프로필을 떠올렸다.
불법 이민자 부모를 가진 라틴계 이민 2세, 차별과 좌절 때문에 갱단과 범죄의 세계로 끌려가는 다른 이민 2세대와 달리, 평생을 남미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해 공부하고 연구해온 인류학자겸 여성학자.
무정부 상태에 빠진 이후 베네수엘라에서 급증하는 인신매매 범죄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서는 카라카스에서 열리는 관계자 회의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그녀가 이번 포럼 개최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한규호는 서류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그녀의 눈에 떠오른 놀라움과 실망이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위해서 무언가 행동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단순히 그녀를 경호하기 위해 온 것뿐이기에. 오히려 포럼이 취소되면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3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한규호에게는 좋으면 좋았지 불만을 가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고스토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아고스토가 대화의 전면에 나섰다.
“아니. 차관님. 이러면 약속이 달라지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하죠. 분명히 베네수엘라 정부와 협의가 다 끝난 상황인데, 아그레망 받고 부임하자마자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명된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아고스토의 말에 한규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단순 경호원인 그가 보기에도, 아고스토는 그저 요식 서류 같은, 통과증 같은 역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불만이 있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어필할 틈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뿐이다. 정치인의 본능으로.
아고스토의 반발에 산타나 차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고스토는 그런 차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관은 이런 남자를 많이 봐 왔다. 자신감 넘치고, 자신에게 취해서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남자들을.
그렇게 잠시 아고스토를 바라보던 차관은 뒤에 서 있던 보좌관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보좌관이 서류봉투 하나를 건넸다.
차관은 봉투를 받았지만 바로 개봉하지 않았다. 대신 앤 챔버에게 말했다.
“미스 챔버.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차관의 말에 앤 챔버는 깜짝 놀랐다.
“부탁드립니다. 미스 챔버.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산타나 차관이 말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서, 앤 챔버는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모시겠습니다. 미스 챔버.”
레스토랑 총지배인 테하다(Tejada)라는 노신사가 어느새 다가와 앤 챔버에게 자리를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알게 될 거에요. 당신을 위해서에요. 앤.”
차관이 다시 말했다.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치 동생을 걱정하는 큰 언니의 눈빛으로.
앤 챔버는 당황해하다가 그레이스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테하다를 따라 만찬장을 나섰다.
차관이 힘들다는 듯 한숨을 작게 쉬고는 말했다.
“여러모로 실례가 되었네요. 그녀에게는.... 아까 표면적이라는 말의 의미. 제가 생각하는 게 맞나요?”
차관의 질문에 그레이스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국무부와의 커넥션입니다. 그녀가 정부 측 옵서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녀의 답에 차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실례를 범한 것 같군요.”
차관이 말했다.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차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봉투를 열어 두 장의 A4 크기로 인화된 사진을 꺼내 안보이도록 봉투로 덮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마음의 준비를 해주세요.”
차관이 말했다. 그런 차관의 말에 남아있던 그레이스 박사와 아고스토는 온 몸에 힘을 주었다.
일행이 준비가 된 듯하자 차관은 봉투를 치웠다. 도로 표지판에 붙어있는 무언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욱!”
그레이스 박사는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고속도로 교통 표지판에 붙어있는 시체, 아니 정확히는 시체의 일부였다.
한쪽 팔에 못이 박힌 채 축 늘어져 있는 시체는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상반신의 절반이 없었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오른쪽 어깨는 없는 시신, 사선을 따라 절반만이 남아있는 상반신과, 한쪽 발목이 잘려나간 하반신이 도로 교통 표지판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으로 붙어있었다.
아고스토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오직 한규호만 그 사진 속 시신의 일부를 자세하게 보고 있었다. 정교한 도구로 시신을 훼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마체테나 벌목용 톱으로 대충 썰어낸 것처럼 보였다.
“오늘...환영 만찬에 참석하기로 했던... 아동복지재단의 무리요 레온(Murillo Leon)회장의 시신 일부입니다. 3일전 실종됐고, 오늘 아침에 발견됐습니다.” 차관의 말에 아고스토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베네수엘라 측에서 자신의 상대 역할을 하던 그. 베네수엘라에서 만나서 거하게 한잔하자던 그의 쾌활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귀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모습으로 날 맞이할 줄이야.
“그리고, 다음입니다.”
충격에 빠져있는 박사와 아고스토를 잠시 지켜보던 차관은 두 번째 사진을 뒤집었다.
두 번째 사진을 본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올렸다.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음에도, 떨리는 두 손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두 번째 사진은 그레이스 박사의 얼굴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빨간색 폰트로 스페인어 문장이 쓰여 있었다.
Ph.D Lucia Grace
Recompensa de $100 dolares por cualquier informacion
Recompensa de $1000 dolares por cualquier informacion que resulte arresto.
Recompensa de $10,000 dolares por cuerpo.
Recompensa de $100,000 dolares y especial regalo por cabe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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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수배>
루시아 그레이스 박사
어떠한 정보든 미화 100 달러 지불
생포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는 미화 1000달러 지불
사살할 시에는 포상금 미화 1만 달러 지불
머리만 가져 올 시 미화 10만 달러와 특별한 선물 지급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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