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 <여기서 부터 유료 시작> >
1일차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상공
마이케티아, 바르가스주(州), 베네수엘라
마이애미를 출발해 카리브해를 지나 날아온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보잉 737기가 라 토르투가섬(Isla La Tortuga) 상공을 관통해 우측으로 기수를 돌렸다.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선회한 737은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그리고 28 활주로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Simon Bolivar International Airport).
남미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부르는 베네수엘라 독립영웅의 이름을 딴 이 공항은 최근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말해 주듯 한 나라의 관문 공항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한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유가로 시작된 베네수엘라 경제위기에 따라 나라 전체가 무정부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혼란한 상황이었고, 항공사들은 경쟁하듯 정기항로 운항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뉴욕과 애틀랜타에서 카라카스까지 정기편을 운항하던 아메리칸 항공도 현재 마이애미 출발편을 제외하고 다른 정기편은 중단한 상태였다. 뉴욕에서 만난 한규호 일행이 마이애미에서 환승을 했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비행기가 택시웨이로 접어들자 터미널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모습이 보였다.
한규호는 창문으로 터미널을 살펴봤다. 다행히 전기는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위기가 한참이던 시기에 터미널은 전기나 수도 같은 기반 시설도 모두 멈춰버렸고, 공항으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무장 강도들이 터미널에 진을 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것 같았다.
“전기는 들어와 있네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이 말했다.
한규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짙은 눈썹과 커다란 눈. 오뚝한 코. 그리고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큰 입을 가진 40대 여성이 한규호 옆에 있는 창문을 향해 터미널을 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어린 딸을 데리고 조국 베네수엘라를 찾았다가 노상강도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한 라틴계 배우 모니카 마차도(Monica Machado)가 마흔 살을 넘겼다면 이런 얼굴이었을 것이다.
루시아 그레이스(Lucia Grace) 박사. 결혼 전 성은 로야(Loya)인 이 중년 여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걱정은 무엇일까?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베네수엘라 치안에 대한 걱정일까? 아니면 이번 방문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우려일까?
루시아 그레이스 박사, 이번 베네수엘라 방문의 실질적인 리더이며, 한규호가 일주일간 보호해야 할 인물.
한규호의 임무는 미국 텍사스 A&M 대학 인권문제 연구소 공동 소장 중 한명이며, 미국 국무부 남미협력센터 고문이고, 유엔인권위원회(United Nations Commission on Human Rights Council) 상임 위원 중 한명인 루시아 그레이스 박사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리는 ‘남아메리카 인신매매 범죄대응 포럼’에 참여하는 동안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걱정이, 불안한 치안 때문인지 , 아니면 포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한규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어서 빨리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이곳을 떠나기만을 바랄 뿐.
그녀가 느끼는 걱정도. 그녀가 느끼는 간절함도. 그와는 상관없는 감정이다.
그레이스 박사 너머, 통로를 지나 앉아 있는 젊은 여자도 불안한 듯 보였다.
백인과 남미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여러 세대를 거쳐 가면서 나오는 전형적인 남미 라티노의 얼굴을 가진 저 아가씨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스물세 살에 불과한 저 아가씨가 그러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라티노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온 20대 여성이라면, 당연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착한 이 곳이 바로 베네수엘라 이니까.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한규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터미널로 다가가던 737기는 터미널을 50m 앞에 두고 천천히 멈추었다. 그리고 곧 엔진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탑승교, 일명 보딩브리지가 텅텅 비어있음에도 항공기는 터미널에 다가가지 않았다. 비행기는 터미널 대신 조금 떨어진 주기장(airport apron)에 멈추었다.
한규호의 눈에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계단차(Step Car)가 보였다.
탑승교가 작동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전기는 들어왔는데도, 탑승교는 기능을 못하는 것을 보니 공항 기능이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피곤하겠군. 한규호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계단차가 다가오자, 비행기를 거의 가득 채운 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내렸다. 대부분이 라틴계열 사람들로, 여행객이라기보다 미국에서, 또는 타국에서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고향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고향에 도착했다는 기쁨은 보이질 않았다.
마치 그레이스 박사 옆에 앉아 있는 스물 세 살의 아가씨처럼, 불안한 얼굴로 서둘러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레이스 박사님?”
스튜어디스 중 한명이 다가와 한규호 옆에 앉은 그레이스 박사에게 말을 건넸다.
“네.”
그레이스 박사가 걱정스런 표정을 바꾸고 미소를 담아 말했다.
“방금 공항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차로 모시러 올 예정이니 일행 분들과 내리지 말고 잠시 대기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튜어디스는 그레이스 박사의 대답을 듣고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사님.”
“네?”
“박사님이 쓰신 책.... 읽어봤습니다.”
“어머? 그래요? 고마워요.”
“.... 그래서....아닙니다. 몸조심하세요.”
스튜어디스는 우려 섞인 눈빛으로 그레이스 박사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몸조심할게요.”
그레이스 박사는 인자한 미소로 답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몸조심하세요.”
스튜어디스는 그렇게 재차 당부하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그레이스 박사는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참 친절하네요. 그렇죠?”
한규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따로 말이 없었다.
지금 저 스튜어디스가 전하고자 한 것은 걱정이 아니었다.
경고였다.
무정부 상태와 다를 바 없는 베네수엘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인 베네수엘라를 방문하는 그녀에게 하는 베네수엘라의 경고였다. 일주일.
그녀가 이곳에서 지낼 시간. 그리고 한규호가 그녀를 보호해야 할 시간이다.
승객 모두가 내릴 때 까지 한규호와 그 일행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2A좌석에 한규호, 그 옆 2C 좌석에 루시아 그레이스 박사. 복도를 넘어 2D 좌석에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는 23살의 아가씨 앤 챔버스(Ann Chambers), 그리고 이번 방문에 초대자 역할을 하는 펠릭스 아고스토(Felix Agosto) 이 네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2F에 앉은 펠릭스 아고스토, ‘미-베네수엘라 협력재단’의 이사 중 한 명이며, 이번 방문에서 베네수엘라 정부와의 가교 역할을 맡은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많이 불안한가요? 미스 챔버스?”
아고스토가 그 옆에 앉은 스물 세 살의 아가씨에게 말을 건넸다.
앤 챔버스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네? 아니. 네. 저기. 그게....”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에 펠릭스 아고스토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세뇨리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도 사람 사는 데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푸근한 아저씨 미소를 지어 주었다.
아직 23살이라고 그랬지?
작고 마른 몸매, 메스티소의 특성이 확연한 얼굴, 겁에 질린 표정. 딱 그의 취향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저씨가 지켜줄게요.”
아고스토가 스페인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몰라요.”
앤 챔버 대신 그레이스 박사가 말했다.
“네? 스페인어를 모른다고요?”
아고스토가 물었다.
“네. 그녀는 3살에 미국에 입양됐어요. 그 이후 미국인으로 자랐죠. 그러니 그녀에게 스페인어로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해요.”
그레이스 박사가 대신 설명했다.
“아. 그렇군요. 이거 실례.”
아고스토는 실망했다.
그의 아래에 깔린채로 겁에 질린 얼굴로 말하는 스페인어 간청을 듣고 싶었는데. 안타깝군.
“...죄송합니다.”
앤 챔버가 아고스토에게 사과했다.
“하하하. 아니. 제가 미안하군요. 하지만 스페인어는 배워두는 게 좋아요. 미국인이라도 라티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려면 말이죠.”
그가 호방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침대에서 쓰는 말들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규호는 말없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미스터 스즈키. 당신은 어떤가요? 스페인어를 할 수 있나요?”
한규호는 갑자기 자신에게 하는 아고스토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하하. 안타깝군요. 미인으로 유명한 이곳 베네수엘라 여자들에 마음을 휘어잡으려면 기본적으로 스페인어가 필요하답니다. 하지만 미스터 스즈키는 미남이니, 그저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라티노 아가씨들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도 있겠군요. 하하하.”
한규호는 아고스토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말 많고 귀찮은 양반이군.
아고스토가 또 무언가 대화의 소재를 꺼내려 하고 있을 때, 창밖으로 검은색 밴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밴에서 내려 계단차로 올라오는 모습도 보였다.
곧 밴에서 내려 계단차에 오른 그가 기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스 박사님?”
비행기로 올라선 군복을 입은 남자가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네. 제가 루시아 그레이스입니다.”
그레이스 박사가 일어나면서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베네수엘라 방위군(Guardia Nacional Bolivariana de Venezuela) 5지역 사령부 소속 도밍게즈(Dominguez) 소령입니다. 박사님 일행을 모시러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박사는 자신을 도밍게즈 소령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우선 밴으로 이동하시죠.”
그의 말에 앤 챔버가 자신의 짐을 꺼내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도밍게즈 소령이 그녀에게 말했다.
“짐은 저희가 옮기겠습니다. 밴으로 바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딱딱하고, 약간은 명령조로 느껴지는 그의 말에 앤 챔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등을 아고스토가 두 손으로 밀었다.
“자. 자. 가시죠. 여기 군인 분들이 해 주신다니. 우리는 재빨리 밴에 가서 감사한 마음으로 앉아있읍시다.”
그가 앤 챔버를 밀며 계단차가 연결된 비행기 앞쪽 문으로 다가갔다. 그레이스 박사도 소령에게 감사를 표하며 문으로 향했다. 한규호도 그녀들을 따라 문으로 향했다.
앤 챔버를 밀고 나갔던 아고스토는 계단차 정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린 상태로 공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음. 언제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 고향의 향기.”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었다.
한규호는 뒤에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에게 말했다.
“언제입니까?”
두 팔을 벌리고 있던 아고스토는 그제야 두 팔을 접고 비켜서며 말했다.
“오. 이런 미안합니다. 미스터 스즈키. 제가 길을 막고 있었군요. 하하하. 그런데 언제라니 뭐가 말입니까?”
“아고스토... 이사께서 마지막으로 고향, 베네수엘라를 방문한 것이 언제입니까?”
한규호가 말했다.
“아하하. 펠릭스라고 부르시죠. 딱딱하게 아고스토 이사는 말고. 우리는 앞으로 일주일간 한 가족처럼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규호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대답이나 하라는 듯이.
“하하. 미스터 스즈키도 많이 긴장하셨나보군요. 제가 마지막 고향을 찾은 것은 아마도..2012년인 것 같군요.”
한규호는 그 이야길 들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그를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갔다.
2012년. 유가폭락으로 인한 베네수엘라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전이다.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이전이군요. 아고스토 이사님.”
뒤따르던 도밍게즈(Dominguez) 소령이 아고스토에게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다릅니다..” 도밍게즈 소령도 아고스토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
그들이 탄 밴은 카라카스와 라과이라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타고 카라카스로 가고 있었다.
카라카스(Santiago de Leon de Caracas).
콩키드타도르(Conquistador: 스페인 침략군)에 저항한 카라카스 족에서 이름을 딴 이 도시는 베네수엘라 독립 이후 줄곧 수도 역할을 해왔다.
석유 국유화 이후 한때, 남미에서 1인당 가장 높은 GDP를 기록하던 베네수엘라 황금기 시절이, 에어프랑스가 파리에서 카라카스까지 그 기름 많이 먹는 콩코드를 직항으로 띄우던 그때, 거리에 부가 흘러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카라카스는 그때와는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10만 명당 연간 살인율 200건.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위스키를 소비하던 도시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도시가 되었다.
고속도로는 뻥 뚫려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와 관문항만인 라과이라항(port de La Guaira)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임을 감안하면 심각할 정도로 한산했다. 관문공항, 관문항만과 수도를 연결하는 도로에 흔히 보이는 컨테이너 트레일러 하나 보이질 않았다.
좀비 아포칼립소.
한규호는 좀비 아포칼립소를 소재로 한 영화가 떠올랐다.
방탄유리가 달린 밴을 타고, 군대 지프의 호위를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같은 방향은 물론, 반대방향도 차량이 거의 다니질 않는다. 군데군데 총알자국이 있거나 불타버린 차량의 잔해가 가끔 보일 뿐, 생물이 살아있다는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지옥 같은 곳이군,
한규호는 지옥 같은 곳을 많이 다녀봤다. 지옥 같은 전장, 지옥 같은 밀림, 지옥 같은 사막.
그리고 이곳은 그가 다녀본 지옥과는 다른 지옥이다. 카라카스 시내에 접어들면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속도가 빠르네요. 라 만차 네그라(La Mancha Negra)는.... 괜찮을까요?”
그레이스 박사가 앞에 앉아 있는 도밍게즈 소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말에 선임탑승자 좌석에 앉은 도밍게즈 소령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레이스 박사님은 베네수엘라에 언제 오셨습니까?”
“.... 처음입니다.”
“고향이?”
“포토시 인근의 작은 마을이 제 고향입니다.”
그 말에 도밍게즈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볼리비아 출신이시군요.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똑같이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자식들이지만 아마존의 밀림 때문에 서로 교류가 있다고 하기는 힘들죠. 라 만차 네그라는 이제 옛날이야기입니다.”
“라 만차 네그라가 뭔가요?”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스물 세 살의 앤 챔버가 그레이스 박사에게 물었다.
그녀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그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라 만차 네그라(La Mancha Negra)는 말이지. 베네수엘라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펠릭스 아고스토가 대신 말을 받았다.
‘명물’이라는 단어에 도밍게즈 소령과 그레이스 박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느 날 부터인가, 아마 1980년대였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카라카스와 라과이라 고속도로,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이곳을 말합니다 세뇨리따. 아무튼 이 고속도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도로에서 검은색의 물질이 흘러 나왔지요.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던 차에서 흐른 기름인가 싶었는데, 점점 더 많아지고, 범위도 넓어지면서 사람들이 그 물질이 이 도로에서, 아스팔트에서 흘러나온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이죠.”
아고스토는 돈 받고 소식을 전하는 중세 이야기꾼 같은 말투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물질이. 세상에! 참으로 신기하게 형태를 바꾼단 말이죠. 날이 덥고 습하면 도로에 폐유처럼 쫘악 깔리고, 좀 쌀쌀하고 건조하면 뭉쳐서 무슨 푸딩처럼 탱글탱글해지는 이상한 습성이 있더란 말이지. 그리고 아주아주아주아주우~ 미끄럽고.” 아고스토는 뒤로 돌아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앤 챔버의 표정을 살폈다. 적어도 그녀는 흥미롭게 듣고 있는 듯 했다.
“미끄러운 물질이 도로 여기저기에 잔뜩. 그러면? 당연히 교통사고가 와장창!”
그러면서 두 손으로 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문제는 이 물질이 왜 나오는지 알지 못했고, 어떻게 없애는지도 몰랐던 거지. 베네수엘라 정부는.”
아고스토는 선을 넘었다.
적어도, 지금 도밍게즈 소령이 있는 장소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영어로는 블랙 스테인(The Black Stain)이라고 불러요. 베네수엘라 기후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아스팔트 공사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어요.”
그레이스 박사가 말을 받아 마무리 지었다.
그레이스 박사의 말에, 앤 챔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90년도에, 아직 경제가 괜찮던 시기에, 아스팔트를 전부 걷어내고 시멘트로 다시 재포장했습니다. 그 이후 라 만차 네그라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도밍게즈 소령이 말했다.
“대신 경제위기가 찾아온 후, 무장 강도들이 새로운 고속도로의 위험 요소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도밍게즈 소령의 말에 아고스토가 물었다.
“베네수엘라 방위군이 호위 중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도밍게즈 소령은 그 이야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저거 보이십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량이 빠르게 그곳으로 접근해 갔다.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그 연기의 근원을 지나쳐 갔다.
그곳에는 SUV가 한 대 불타고 있었다.
“저 차량의 주인은 몇 시간 전에는 살아 있었을 겁니다.”
한규호는 앤 챔버의 목젖이 울리는 것을 보았다.
지금 그들이 가는 곳은 카라카스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살인율을 가진 도시. 그리고 정부가 거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국가의 심장부.
< MISSION 03 : La Mancha Negra (1) <여기서 부터 유료 시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