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53화 (54/386)

< INTERMISSION : 며칠 후 (3) >

삐 삐 삐 삐

주기적인 비프음이 감각에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거부할 수 없는 청각이 제일 먼저 주변 상황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완, 또는 샤오메이.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비프음, 그녀의 몸 위에 덮여있는 부드러운 리넨천의 느낌. 그녀의 얼굴을 스치는 딱 좋은 온도와 습도의 공기를 통해 적어도 마지막으로 자신이 보고 느꼈던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바로 뜨지 않았다. 그녀의 오랜 버릇처럼, 그녀는 눈을 감은 그대로 청각과 다른 감각을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멘트와 음악이 적절히 섞이는 것으로 봐서 가깝지 않은 곳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에어컨 소리일까? 공기를 가르는 듯한 아주 미세한, 그러나 기분 좋은 소리도 들려왔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도 그녀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냄새. 크레졸과 포름알데히드의 향, 거기에 미세하게 섞인 라벤더향, 방향제의 라벤더 향이 그녀의 후각에 잡혔다.

그녀는 확신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이곳은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 장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무엇을 보았지? 무엇을 들었지?

어둠이 온 사방을 감싼 미얀마 산자락의 어딘가에서, 그래. 총을 맞고. 허벅지. 왼쪽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그녀는 감각을 허벅지로 돌렸다. 부상을 입었나? 치료를 받은 것인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리가 있을까? 그녀는 왼쪽 발가락을 움직였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있다. 그녀의 왼다리는 아직 그녀의 신체 일부로 남아 있었다.

다시 회상으로.

총을 맞고. 그리고 그에 안겨서 정신을 잃고.

그.

그는?

그도 총을 맞았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체액. 손에 느껴지던 울컥거림이 아직 생생하다.

총을 맞았음에도 저격수를 처리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고 옷을 갈이입히던 그.

그는 괜찮을까?

그녀는 눈을 뜨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꼈다.

눈을 뜨고, 당장 그가 그녀의 곁에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의 소식을 알려줄 누군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훈련된 자제력으로 그 욕망을 참아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조금만 더.

눈.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떠올렸다.

그의 눈. 그녀의 흙투성이의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어디선가 구해온 두꺼운 옷을 조심스러운 손으로 입히던 그의 눈.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

(완 양. 잘 자요. 좋은 꿈꾸고.)

마지막 들었던 소리. 그의 말.

그녀는 모든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자 기묘한 기분이 그녀를 찾아왔다.

마치 백년은 된 것 같은 옛날 추억 같으면서도, 몇 분 전 있었던 현실 같은 느낌이.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아버지 같으면서도, 다시 그녀에게 찾아와 그녀를 온기로 감싸줄 아버지 같은 그가 동일시되는 기묘한 느낌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자신이 완임을 알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완이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그녀는 완이 되었음을 알았다.

완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침착해. 침착하자.

이제 눈을 뜨자.

그녀는 천천히 힘을 주어 눈을 떴다.

오랜 시간 닫혀있던 그녀의 눈이 열리고, 그녀의 동공이 오랜만에 빛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눈부심에 잠시 당황했지만,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빛을 받아들이고, 밝기에 적응했다.

시스템 에어컨이 달린 천장이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따스하고 밝은 햇살이 들어서는 창문도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시야는 아래로 돌리자 새하얀 아마포 시트를 덮고 누워있는 그녀의 전신 모두가 들어왔다. 왼쪽 팔에는 머리맡에 달린 링거로부터 연결된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완은, 자신이 병원에 있음을 알았다.

병실에는 그녀 혼자만이 누워 있었다. 다른 환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없이, 직육면체의 공간 내부에 오직 그녀 혼자만이 누워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왼쪽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의료장비들이 보였다. 오른쪽 벽에는 침대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여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어딜까? 어디인지 알기 위해 누군가를 불러야 할까? 누군가가 찾아올까? 그리고 그는 가까운 곳에 있을까? 몸을 움직여야 할까? 무방비하게 누워있기 보다 몸을 일으켜서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도 근처에 있다면 우선 그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데이빗 박. 그리고 규호.

그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눈이 다시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어머. 일어났나요?”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완은 몸에 힘을 주었다. 재빨리 일어날 수 있도록, 그래서 들어온 누군가를 제압할 수 있도록.

몸에 힘을 불어넣자 왼쪽 허벅지에서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의 기억이 맞았다. 그녀는 총을 맞았다. 그와 보낸 시간들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 시간은 실재했었다는 것을, 허벅지의 통증이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내 말 들려요? 영어 할 수 있어요?”

문으로 들어온 누군가는 능숙하게 심박측정기를 체크하면서 완에게 말을 걸었다. 옅은 붉은 빛이 도는 머리를 틀어 올린 백인 여성이었다. 완은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인 여성?

백인 간호사?

“잠시만요. 금방 의사 선생님을 모셔올께요.”

백인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잠시만.”

완이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녀에 등에 대고 말했다.

완의 목소리를 들은 간호사는 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내 말 들려요?”

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Where am I?(여기는 어디죠)”

완이 대답 대신 물었다.

완의 질문에 그녀는 미소 지으며 완에게 다가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여기는 괌 공군기지 안에 있는 병원이에요.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미국 정부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요.”

백인 간호사는 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이름 모를 이 아가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완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면서 그 날을 떠올렸다.

동사를 피하기 위해 알몸으로 그의 품에 안겨 잠든 그 날을.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도와줄 수 있나요)

(도와줄 수 있어)

(미국으로 가도 될까요.)

(가도 괜찮아.)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가 했던 말.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잠들어도 괜찮아.)

***

석재를 실은 파렛트를 지게차가 들어올렸다.

파렛트를 들어 올린 지게차는 좌측으로 90도 회전 한 다음 30미터쯤 이동해 컨테이너 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이미 적재된 파렛트에 한 치의 틈도 없을 만큼 붙여 넣은 후 지게차는 그대로 뒤로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90도 회전했다.

그 모습이 일말의 주저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마치 지게차가 발레를 하는 듯 보였다.

지게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다음 파렛트를 향해 다가가려다 장치장 정문에 기대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고 차를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웬일이야! 올 거면 전화하고 오지!”

정문에 서 있던 남자가 지게차 운전자가 시동을 끄고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지게차에서 내린 남자는 약간 불편한 걸음걸이로 절름거리며 정문의 그에게 다가갔다.

“어쩐 일이야 여기는?”

남자가 반갑게 손을 내밀며 물었다.

정문에 기대있던 남자는 절름거리며 다가오는 남자를 웃으며 바라보다가 그가 거의 다 다가왔을 때에서야 자세를 똑바로 하고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뭐. 그냥저냥. 지나가다 들렀어요.”

“미친놈. 여기가 지나가다 들릴만한 데냐?”

평택항 국제여객터미널 정면에 위치한 석재(石材) 장치장은 지나가다 들릴만한 곳은 확실히 아니었다.

“뭘 또 보자마자 미친놈이 뭡니까?”

손을 맞잡은 남자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뭐 하루 이틀인가. 신경 끄라고.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지게차 운전수가 다시 물었다. 용건이 없어도 찾아올 사이이기는 하다.

“뭐 밥이나 먹읍시다. 점심시간은 아직 멀었어요?”

정문에 기대있던 남자가 물었다.

“점심시간은 무슨. 일이 끝나야 밥 먹는 거지. 하지만 뭐. 오래된 전우가 찾아왔는데 일 같은거 좆이나 까라지.”

지게차 운전자는 껄껄 웃고서는 정문에 기대 서 있던 남자, 한규호의 등을 팡팡 치면서 말했다.

“.... 그러고도 안짤리는게 용합니다.”

“뭐 짤리면 니가 먹여살려주겠지. 너 때문에 치는 땡땡이 아니냐.”

“시끄럽고 밥이나 먹읍시다. 근처 괜찮은데 있어요?”

한규호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

평택지방해양항만청 뒷골목,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남자 둘이 말없이 간장게장 정식을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독특한 의식이라도 하는 듯 게를 껍질까지 포함해 먹을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씹어 먹고 있었다.

의식이라면 의식이 맞았다.

그 날.

그 날 이후, 두 남자가 마주앉아 밥을 먹을 때면, 그들의 앞에 놓인 음식은 절대로 남기지 않았다.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먹는다.

그들은 잔반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음식을 다 비울 때까지 말없이 먹기만 했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친 후, 한규호는 식당 입구에 놓여있는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한규호가 내려놓은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지게차 운전자는 거하게 트림을 한 다음 한규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어쩐 일이야. 천하의 한규호가 이런 외진 델 다 오고.”

그의 말에 한규호는 피식 웃었다.

“천하는 무슨. 그나저나 간장게장이 뭡니까.” “왜? 맛있잖아?”

“맛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뻔히 알면서. 게껍질 씹다가 입안 다 헐고, 긁히고... 이 다 나가겠네.”

한규호의 말에 지게차 운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씨. 나도 멍청한 게 그 생각을 못하고, 맛있는 집 하니까 여기가 딱 생각난 거지.”

“뭐 어련하시겠수.”

한규호가 껄껄 웃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뭐 할 말이 있구만?”

남자가 한규호에게 물었다.

“뭐.. 할 말이라고 할까. 아무튼 형님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한규호의 얼굴에 미소가 가셨다.

“뭔데? 장가 가냐?”

남자의 농담 섞인 말에도 한규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야간에.... 800m 밖에서 저격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규호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한 때 대한민국 육군 최고 저격수에게.

“.... 그 놈이냐?”

남자의 표정도 바뀌었다.

“그 놈은 아니고. 내가 처리했으니까.”

한규호가 답했다.

“800m.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스코프 없이.”

“야간에?”

“네.”

“어쩌면...”

“kar98k.”

“독일?”

“제식은 아니고 불법카피나 라이선스 생산품? 아마도?”

“불가능해.”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

남자가 단언했다.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불가능하다고 하면 불가능하다.

“옆구릴 맞았어요.”

“그 총으로?” “800m 밖에서. 야간에. 스코프 없이”

“확실해?”

남자가 물었다.

“확실해요.”

한규호가 답했다.

한규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교회 첨탑위에 엎드려 있던 그 자가 자신들을 저격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한 이야긴데.”

남자가 말했다. 예전 대한민국 최고 저격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규호는 그 말을 듣고서 남아있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심하게 달달한 액체를 입에 잠시 머금고 있다 목으로 넘긴 다음 말했다.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

“....나처럼?”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한규호의 옛 전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신의 옛 전우를, 그날 지옥 같던 그곳에서 자신을 데리고 탈출한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처럼.”

“그리고 그 자식처럼.”

한규호가 말했다.

그 말에 남자는 씹어 삼키듯 말했다.

“그래. 그 개자식처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둘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규호에게 내밀었다.

“실내는 금연 아닙니까?”

한규호는 담배를 한 개피 꺼내며 말했다.

“시청의 귀한 분들은 이런 곳까지 단속하러 안와. 그리고 여기는 따이공(한중 간 보따리상)이 주 고객인데, 그 양반들 대상 장산데, 여기서 금연한다면 장사 안하겠다는 이야기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빈 종이컵을 재떨이 대용으로 그들 가운데 놓았다.

두 사람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식당 안에 피어올랐다.

몇 분 동안의 끽연 시간이 지나고, 남자가 담배를 거의 비어버린 종이컵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 같은 놈이 또 있다는 말이고. 그리고.”

“그리고?”

“계속 이 짓을 하다보면 언젠가 그 개자식을 만날 수도 있겠다는. 그런 말이죠.”

한규호의 이야기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군.” 그리고는 한규호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개자식을 다시 만날 수도 있겠군.”

< INTERMISSION : 며칠 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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