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MISSION : 며칠 후 (2) >
트레이시 테일러는 긴장하고 있었다.
CIA에 들어온 지 햇수로 8년가량 지났지만 상황실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랭리의, CIA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랭리의 상황실은 아니었지만, 오키나와 CIA 지부의 상황실도 극동아시아 지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곳임은 틀림없었다.
어두운 상황실, 무표정한 얼굴로 콘솔을 조작하고 있는 상황요원들, 동아시아 전역 여기저기를 보여주는 사방의 수많은 크고 작은 스크린들 그리고 가장 큰 화면에 비치는 네일 밀러 CIA 국장의 모습.
트레이시는 오키나와 상황실에서 랭리 상황실에 연결된 밀러 국장과 화면을 통해 대면하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얼마 전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취조 받던 3일을 떠올렸다. 그 3일을 떠올리며 CIA의 정점에 서 있는 국장에게 보고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했다.
탄치에서 그를 만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여자를 헬기에 태워 보낸 다음 자신은 그와 국정원 요원과 함께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이름을 밝히지 않는 국정원 요원의 지시에 따르는 조건으로 그들과 동행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헬기를 떠나보내고, 탄치에서 6시간을 잠든 한규호를 지켰고, 그가 일어나자, 국정원 요원의 지휘아래 치타공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그가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치타공 외곽의 싸구려 호텔에서 5일을 보낸 다음 한국 측 요원들이 마련한 위조여권으로 인도를 거쳐 인천으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부상.
한규호는 부상을 입었고, 아니, 입은 것 같았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의 왼쪽 옆구리 부위에는 피가 배어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넓고 진하게, 응고된 피 특유의 검붉은 색이 퍼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부상을 입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을.
그것이 트레이시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야기를.
옆구리에 부상을 입었다면, 저렇게 출혈이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라면 그의 부상은 가볍지 않다고 판단된다는 이야기를, 장기까지는 아니어도 복막, 복강은 다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런 상태로 그가 한 사람을 업고 왔다는 사실을.
이러한 사실을 상황요원들이, 물론 보안절차와 기밀엄수 과정을 통과했겠지만, 그래도 상황요원들이 있는 상황실에서 보고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국장이 알고 싶어 하는 사실은 뒷부분이라는 느낌이, 7함대를 움직여가면서까지 그를 확보하려고 한 그의 의도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싶어서라는 느낌이 그녀를 강하게 감쌌다.
“테일러 요원.”
화면 너머의 국장이 입을 열었다.
“네. 국장님.”
트레이시가 말했다.
“특별히 보고할 사항(special note to report)이 있나?”
그가 물었다.
특별히 보고할 사항.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보안절차에 따르지 말아야 할 사항.
“있나?”
트레이시가 잠깐 주저하는 사이 그가 다시 물었다.
“...있습니다.”
트레이시가 답했다.
“알겠다. 본부로 오게.”
화면이 꺼졌다. 인천공항에서 그들과 헤어지고, 바로 준비된 차량으로 오산으로 향했다.
오산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엔진시동이 걸려있는 군용기를 타고, 바로 이곳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 이동했다. 그런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페리 지부장에게의 보고가 아닌 상황실 호출이었다.
24일 밤. 그의 전화를 받고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그녀는 거의 일주일 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바로 랭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할 듯싶었다.
“트레이시. 힘들겠지만...”
그녀를 격려하려는 마음으로 아이작 페리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피곤과 실망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밝게 상기 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느낌이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밀러 국장이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들이, 그녀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이라는 것도.
***
곽용신은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컵을 보고 있었다.
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종이컵이 넘칠 정도로 가득 찬 믹스 커피가 그의 앞 탁자에 놓여 있었다.
“들게.”
믹스커피를 들고 온 남자가 곽용신에게 말했다.
곽용신은 그의 말에 종이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밍밍했다. 믹스커피 하나가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믹스커피를 들고 온 남자는 그 사실을, 자신이 지금 믹스커피 한 봉의 가치를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그득한 커피로 찰랑거리는 종이컵을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김형원.
진짜 이 남자가 김형원일까?
전설처럼 내려오던 프라하의 김형원이 이 사람이 맞을까?
지금 그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저 조그마한 하꼬방 회사를 근근이 이어가는 장년 남성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고생했군.”
김형원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장년의 남자가 말했다.
와이셔츠는 얼마나 안 다렸는지 구깃구깃한 주름이 여기저기 져 있었다.
곽용신이 상상했던 김형원은 한국의 리하르트 조르게 같은 인물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후줄근한 남자는 날카로운 인상의 조르게와는 전혀 매치가 되질 않았다.
“보고는 받았네.”
보고.
그가 한 보고는 별 것 없었다. 전문을 받고, 캘커타에서 치타공으로, 그리고 탄치로 이동하는 데까지가 보고의 80%를 넘게 차지했다.
나머지 20%는?
헬기소리를 듣고 나가 데이빗 박을 만나고, 그와 미국 정부요원으로 의심되는 여자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그를 확보한 다음, 탄치에서 치타공으로 넘어가 수상쩍은 의사에게 그를 치료하게 하고 그를 경호하면서 뒷골목에서 브로커를 만나 위장여권을 구해서 인도로 넘어가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 그 뿐이었다.
보고할 내용도 없었다.
한국에 도착하자 본부에서 그들을 맞이하러 왔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미국여자는 그쪽 애들 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를 타고 본부에 도착하자 그 데이빗 박이라는 놈은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자신과 김승섭도 각자 독립된 방으로 끌려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집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귀가.
갑작스러운 귀국에 놀란 와이프와 선물은 왜 안사 왔냐며 목을 조르듯 매달리는 두 딸과 며칠 동안 꿀 같은 시간을 보내던 중 걸려온 전화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곳에 찾아오게 된 것이다.
성남시 산성동 태청무역.
위장회사라고하기에는 너무 영세해 보였고 김형원이라는 자는 위장요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후줄근해 보였다.
“찾아오는데 힘들지는 않았나?”
김형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물었다.
“..... 주차가 힘들더군요.”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차량들 틈에서 주차할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산성역에 붙어있는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참을 걸어 올라와서야 허름한 건물에서 태청무역이라는 허름한 간판을 찾고, 허름한 사무실을 통과하여 허름한 사장실에 앉아 밍밍한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는 곽용신이었다.
“뭐. 주차가 힘들지. 이 동네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지.”
“... 그렇습니까.”
곽용신은 손을 뻗어 밍밍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젠장. 더럽게 맛없군.
어색함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커피를 마신 자신에게 순간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경력이 괜찮더군.”
어쩐 일로 절 부르셨나요? 여기는 뭐고 당신은 누구죠? 오는 동안 계속 머리를 맴돌던 질문을 쏟아내려는 찰나 김형원이라는 남자가 말을 잘랐다.
“네?”
“입사 이후 현장으로 많이 돌았더군. 경력도 괜찮고. 평가도 나쁘지 않고. 그런 것 치고 승진은 늦은 편이고.”
그가 곽용신을 보면서 말했다.
“뭐. 앞으로 보면 알겠지. 어떤지는.”
“뭐가... 말입니까?”
김형원이라는 남자는 곽용신의 질문에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무언가를 들고 와 곽용신 앞에 내려 놓았다.
휴대전화와 명함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케이스를.
곽용신은 잠시 그의 앞에 놓인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뭘까. 이게. 왜 이게 내 앞에 놓인 것일까.
“앞으로 전화는 그걸 쓰게.”
김형원이라는 남자가 말했다.
저건 또 뭔 소리지.
곽용신은 손을 뻗어 명함케이스를 받았다.
설마.
에이. 설마.
그는 명함케이스를 묶어 놓은 고무줄을 벗겨 낸 후,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주식회사 태청무역 남아시아 영업팀 팀장
곽용신
곽용신은 명함에 박혀 있는 글자를 읽었다.
읽었는데, 그 의미가 파악되지 않았다. 분명 한글이었는데, 눈으로는 읽을 수 있었지만 머리로는 퍼뜩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무슨....?”
“자리는 아직 없으니 당분간 여기에서 업무를 보게.”
김형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곽용신이 앉아 있는 소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그러니까..그게 무슨...”
“그리고 여기는 더미(dummy:위장회사)라고 해도 실제로 영업을 하고 있으니, 그 부분을 감안하도록 하게. 인도에 있다 왔으니 남아시아 쪽 물량을 확보하는건. 기본적으로 포워더 업무를 하긴 해야 하네. 영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
“그러니까..그게 뭔...”
“아. 그리고, 여기 본사 사람은 자네와 나 둘 뿐이네. 다른 직원은 전부 민간인이니까 허튼 소리 하지 말고.”
“그러니까...”
“주차는 힘드니까 지하철을 타는 게 나을 거야. 주차 시비 때문에 칼 맞고 그러면 곤란하지.”
“지......하철... 말입니까?”
결국 곽용신은 말을 끊어 내는데 성공했다.
“왜? 지하철 못타나?”
김형원이 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지하철을 못 타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집이 검단입니다. 인천 공항 가는 길에 있는....”
“그런데?”
“........검단에서...... 대중교통으로 여기까지 오려면 마을버스를 타고 검암역 가서 거기서 공항철도로 환승하고 홍대입구로 간 다음 2호선으로 갈아 타고 잠실까지 와서 다시 8호선으로 환승 하고 산성역까지 와야 합니다.”
“그런데?”
“......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먼가?”
“..... 일반 상식 수준에서 그 정도면 멀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곽용신은 자신도 모르게 말에 무례함을 실었다.
전설의 김형원이고, 국정원 선배고 뭐고 간에, 갑자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데 수긍이 갈 것 같은가?
“힘들겠나?”
곽용신은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는 김형원을 보면서 확신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늙은이는 프라하의 전설 김형원이 아니다.
한국의 리하르트 조르게가 아니다.
“힘듭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이동을 허락할....”
“알겠네.”
김형원이 말했다. 어?
이렇게 빨리?
이렇게 쉽게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다고?
“뭐. 자네가 그렇다면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네. 알겠네.”
김형원이 순순히 나오자 곽용신은 무례하게 말했단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찌됐건 지금 눈앞의 이 남자는 그의 상관이고, 선배다.
그런 그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흐흠. 뭐.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순간적으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은 사과드...”
“아니야. 괜찮네. 다시 인도로 가겠다는데 내가 뭐 어쩔 수는 없겠지. 그럼 이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김형원은 전화기를 들었다.
곽용신이 그런 그의 손을 재빠르게 잡았다.
< INTERMISSION : 며칠 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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