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29. 完)
5월 25일
탄치 모스크 앞 광장
탄치, 치타공주(州), 방글라데시
트레이시는 총구를 겨눈 채로 외쳤다.
“당신 누구지?”
트레이시는 다가오는 그가 한규호일 것 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시간에, 이 장소에, 부상 당한 누군가를 데리고, 며칠은 노숙한 몰골로 다가와서 특작팀은 데려오지 말라니까라며 투덜거릴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한규호. 스스로를 한이라고 부르는 그 남자. 그 남자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다가오는 저 남자는 한규호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비행기에서 그를 맞이할 때, 그에게 컵라면을 건네 줄 때, 작전을 마친 그를 에티오피아의 하랄 메다 공군기지에서 맞이할 때, 그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올 때의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3일.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조사를 가장한 심문을 당하며 계속 기억을 반복해 진술해야 했던 그 3일간, 그녀는 수 십 번, 수 백 번 그와 함께 했던 순간을 떠올려야 했다.
그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만은 기억하고 있다.
치타공에 도착해서도, 상황실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그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그러나 그 상상속의 인물은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가 아니었다.
약간 날카로운 눈매에, 뭔가 차가운 분위기를 보이는 그 남자 소말리아의 한규호가 아니었다.
그 대신, 어딘가 서글서글하고, 약간 여유 있는 얼굴에, 요 며칠 고생을 했는지 좀 마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눈매가 부드러운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다. 100% 확신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다.
“움직이지 마. 거기에서 멈춰. 정체를 밝혀라!”
트레이시는 다시 소리쳤다.
쏜다.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으면 쏠 것이다.
한규호.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지금 그녀에게는 가치가 없다.
쏠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바로 쏠 것이다.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트레이시가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한규호는 난감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 완이 총을 맞는 바람에,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너무 마음이 급해서, 이런 상황을 생각해두지 못했던 것이다.
얼굴.
두 개의 눈과 눈썹, 한 개의 코. 그리고 한 개의 입.
인류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이 요소가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달라진다.
올라간 눈매, 내려간 눈매, 오똑한 코, 눌려있는 코. 넓은 입술, 좁은 입술 등의 형태.
각각의 위치, 그리고 배치. 간격. 이 모든 요소들이 개별성을 가지고 60억의 인구에 60억개의 개성을 부여한다.
한규호는 그 개성을 부여했다. 데이빗 박이 되기 위해서. 철없고 도박 좋아하는 재벌 2세가 되기 위해서 그 얼굴에 개성을 부여하고 사진을 찍고 여권을 만들었다.
지금 트레이시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데이빗 박의 얼굴을 가진 한규호였다.
세포 하나까지 조절할 수 있는 그는, 자신의 얼굴을 바꾼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녀의 앞에 선 것이다. 그녀를 만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데이빗 박의 개성을 부여한 얼굴을 보고 자신을 의심할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급하게 왔다고 해도, 시간이 없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계산하지 못한 것은 한규호의 불찰이었다.
“저기 말이야.”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정체를 밝혀라!”
트레이시가 외쳤다.
그 순간 모스크 쪽 덤불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Put the Gun Down!(무기를 내시리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모였다.
트레이시도 순간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재빠르게 몸을 틀어 한규호와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를 시야 한쪽으로 몰았다.
먼저 내린 두 명의 특작팀 중 한 명이 그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미리 합이라도 맞췄는지, 다른 한 명은 여전히 한규호를 겨누고 있었다.
“Put the Gun Down! Hold your Fire!”
덤불에서 나온 남자는 자신이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두 팔을 든 상태로 외치면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Stop There. Who the hell are you!(거기 멈춰! 당신은 또 누구야!)”
트레이시가 그쪽을 향해 외쳤다.
누구지? 갑작스러운 저 남자는!
덤블에서 나온 남자는 천천히 멈추면서 소리쳤다.
“Put the Gun Down.(무기를 거두시오.)
He’s the Citizen of Republic of Korea!(그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곽용신은 크게 외쳤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당장 무기를 거두시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그 순간 트레이시는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Korean NIS?(한국 국가정보원?)”
곽용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당장 그 무기를 치우시오!”
김승섭은 당황했다.
헬기소리가 들리자 그는 곽용신과 함께 헬기가 착륙한 지점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검은색으로 코팅한 페이브호크가 착륙하고 MP5를 든 미국놈들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한 남자가 여자를 업고 나타났다. 그리고 헬기에서 내린 여자가 그 남자에게 총을 겨누면서 누구냐고 소리쳤다.
이게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그 순간 곽용신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김승섭은 자신도 모르게 그 물건을 받았다.
쇠봉. 그가 옷장에서 꺼내 곽용신에게 건네준 쇠봉이었다.
김승섭에게 쇠봉을 건넨 곽용신은 두 팔을 들어 비무장 자세를 취한 후 소리치며 덤불을 나갔다.
총구가 자신의 선배에게 겨눠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씨발 깜빡이 좀 키고 들어가지!
판단은 그가 한다.
김승섭은 쇠봉을 던져 버리고 두 팔을 들고 덤불에서 나갔다.
책임은 같이 진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를 받는 대한민국 국민이오! 미국 정부는 그를 위협할 권리가 없소!”
트레이시는 덤불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두 팔을 들고 소리치면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뭐지?
두 팔을 들고 천천히 걸어간 곽용신은 여자를 업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작게 물었다.
“데이빗 박이오?”
한규호가 살짝 미소지었다.
용케 왔군. 당연히 못 올 줄 알았는데. 김형원이 용케 보냈군.
“맞소.”
“이게 뭔 상황이요?”
곽용신이 물었다.
“나중에 설명합시다.”
한규호는 웃으며 말했다.
상황이 재미있게 됐다.
여자를 업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옆에 두 팔을 들고 비무장임을 보여주는 두 남자가 서 있었고, 그 네 사람을 세 명의 미국인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헬기 조종석에 앉아있는 기장과 부기장도, 헬기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4명의 구급요원도, 그리고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두 사람의 특작팀 요원도, 트레이시도, 그리고 곽용신도, 김승섭도.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한규호만 이 상황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탄치.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새벽에, 방글라데시 동부의 작은 하안(河岸)마을이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규호는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이번 작전은 매우 재미있군.
왜인지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을 찾으러 골드카드를 들고 카지노를 찾았다.
성남에 있는 태청무역 사무실에서 그 촌스러운 황금빛 가드를 집어 들 때, 타이항공 747의 1등석에 앉았을 때,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완을 만났을 때, 이런 상황으로 마무리 될 줄은 몰랐다.
한규호는 이 재미있는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잠시만.”
한규호는 트레이시의 총구 앞에서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곽용신에게 말했다. 곽용신은 한규호의 말을 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한규호가 다시 말했다.
“괜찮소.”
곽용신은 그의 눈을 보았다.
차분한 눈.
매우 차분한 눈.
그의 눈을 보고서 곽용신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가 생각이 있겠지.
트레이시는 곽용신이 옆으로 비켜서고 자신이 한규호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는 것을 지켜봤다.
여전히 총구는 겨눈 채로.
“트레이시.”
그가 말했다.
“........”
트레이시는 말없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트레이시. 제가 당신에게 허가받아야 하는 사항이 있으면 지금 알려 주세요.”
그가 말했다.
몇 달 전. 소말리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트레이시에게 했던 말.
3일간의 심문에서도, 그녀가 끝까지 지켜냈던 그 이야기.
오직 이 세상에서 한규호와 그녀만이 알고 있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세상에...”
총구가 살짝 떨렸다.
“작전명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FCA가 좋겠소. FCA요? 프리캐리어. 인커텀스 몰라요?”
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재현했다.
그 순간 트레이시는 확신했다.
한규호다. 그가 한규호다.
“총을 거둬요! 총구를 치워요!”
트레이시가 급하게 외쳤다.
한규호를 포함해 네 사람을 겨누고 있던 CIA 특작팀은 트레이시의 외침에 총구를 땅으로 내렸다.
“세상에. 당신. 한규호 맞나요? 미스터 한. 당신 맞나요?”
“맞소. 나 한이오.”
트레이시는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도 모른 채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구조요원부터 빨리!”
한규호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순간 트레이시는 정신을 차렸다.
트레이시는 헬기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지켜보던 구급요원들이 환자 수송용 들것을 들고 뛰어내렸다.
“도와주시오.”
한규호가 곽용신에게 말했다.
곽용신과 김승섭은 그가 업고 있는 여자와 결박하기 위해 묶어 놓은 옷가지들을 풀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승섭은 뒤에서 여자를 지탱하고, 한규호와 곽용신이 그 옷들을 풀었다.
재빠르게 달려온 응급요원이 그녀를 받았다. 의식불명 상태의 그녀를 안전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들것에 옮겼다.
“왼쪽 허벅지 관통상이오. 대략 여섯 일곱시간 전. 구경 7.92mm마우저 탄환. 상처가 크고. 출혈이 꽤 있었소. 상처가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고. 급하게 물로 씻어내고, 위스키로 소독했소. 하지만 임시 처치여서 알콜은 금방 증발했을 것이오. 패혈증 위험도 있을 것 같으니 빠르게 조치해주시오.”
한규호가 그녀를 옮기려는 응급구조요원에게 빠르게 말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응급구조요원은 그의 이야기에 잠시 멈추었다.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후 재빠르게 들것으로 옮겼다.
그 짧은 순간에 이미 그녀의 팔에 수액을 연결한 것을 보니 베테랑들인 것 같았다.
한규호는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가볍게 한숨 쉬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고 복막이 찢어진 상태에서 출혈을 참아가며 능력을 사용해 저격수를 잡고 다섯 시간 동안 110km를 달려오는 것은 무리였다.
온 몸에 한 점의 기운도 남아있지 않는 듯 느껴졌다. 들것에 실려 가는 그녀를 보자, 안심이라도 됐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바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곽용신과 김승섭이 오지 않았다면 한규호도 완과 함께 헬기를 탔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와 있으니 그는 저 헬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미국 의료진에게 복막이 찢어진 채로 한 사람을 업고 왔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주고 싶진 않다.
“고맙소. 와줘서.”
한규호는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트레이시. 당신은 내가 필요하겠지?”
트레이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소. 일주일 후 오산기지에서 봅시다. 연락하겠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곽용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선 잠부터 자고 싶다. 그들이 호텔을 잡아놨겠지.
“안돼요!”
트레이시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 쳤다.
“이대로 가면 안 돼! 우리가 필요한 건 당신이야! 저 여자가 아니야!!”
트레이시는 더 크게 소리질렀다.
한규호는 자세는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살짝 돌려서 말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일주일 후에, 오산에서 봅시다. 이 보답은 꼭 할 것이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앞으로 걸었다.
피곤했다. 어서 저 여자를 보내고 쉬고 싶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앙칼진 외침이 들려왔다.
“당신이 가면 저 여자는 죽어!”
트레이시가 외쳤다.
한규호가 멈춰서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트레이시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저 여자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
트레이시는 그의 눈을 보았다.
진심이다.
저 남자는 지금 맹세를 하고 있다.
목숨을 건 맹세를.
한규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약속하지. 꼭. 만나게 될 것이오. 일주일 후, 당신들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이 도움은 절대 잊지 않소.”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온 곽용신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팔 좀 빌려주시오.”
어느새 달려온 곽용신과 김승섭이 양쪽에서 그를 부축했다.
김승섭은 옆구리부위가 유독 검붉게 염색된 한규호의 상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그를 부축했다.
트레이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돼.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돼.
어떻게든.
어떤 방법이든!
그녀는 특작팀 요원 중 한 명에게 소리쳤다.
“이리로!”
특작팀 요원. 계급도, 급수도, 경력도 그녀보다 한참 위임이 분명한 베테랑 요원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다가왔다.
“코드명은?”
트레이시가 물었다.
“라임이오.”
“좋아요. 라임. 이제부터 당신이 현장 총책임자입니다. 아시겠죠? 이대로 헬기를 출발시켜요. 그리고 무조건 그녀의 치료를 최우선으로 하세요. 알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베테랑 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급유를 받아가며 바로 7함대로 갑니다. 가면서 오키나와에 연락해요. 그리고 그를 확보했다고 보고합니다. 알겠습니까?”
라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 여자 혼자 남으려는 것일까? 두고 가도 될까? 그런 생각에 잠시 주저했다.
“뭐해요! 빨리 가요!”
트레이시가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라임은 주저하지 않고 헬기로 뛰었다. 다른 특작요원 한명도 헬기로 뛰어갔다.
그 둘이 헬기에 타고 곧 문이 닫혔고, HH-60 페이브호크는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 떠나는 헬기를 바라보던 트레이시는 한규호를 부축하고 있는 곽용신과 김승섭에게 걸음을 옮겼다.
“인사는 나중에 하죠. 우선. 호텔이 어디죠?”
곽용신은 자신에게 말하는 트레이시를 보면서 당황했다.
이 여자는 왜 남아있는거지?
김승섭도 당황한 듯 했다.
그저 어쩌죠 하는 눈빛으로 곽용신을 바라볼 뿐 이었다.
판단은 내가 한다.
“씨발 어쨌든 남자 한명, 여자 한명 확보. 시키는대로 다 했어. 작전 완료. 씨발.”
곽용신이 말했다.
MISSION 02 : HANDCARRY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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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MISSION : 며칠 후 (1) >
루 륀(Lu Lwin) 대령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무엇이 잘못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마투피 전역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산악지역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현지 경찰력까지 동원해 과하다 싶을 만큼 그들을 찾는데 힘을 쏟았다.
그럼에도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흔적을 남겼다. 피 묻은 옷 그리고 원 아이드 잭의 시체.
원 아이드 잭의 시체는 교회 첨탑 위에서 그가 헬기에서 내린지 4일째 되는 날에 발견됐다.
만달레이를 다녀왔다는 교회 목사 부부가 집안을 뒤진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과 함께 루 륀의 보안대가 출동했다. 그리고 없어진 것들이 옷가지였음을 알아냈고, 첨탑 위에서 차갑게 식은 원 아이드 잭의 시신을 발견했다.
돌칼. 그의 오른쪽옆구리에는 장석으로 만든 조잡한 돌칼이 박혀 있었다. 측후방에서 들어간 돌칼은 손잡이부분까지 깔끔하게 들어가 동맥을 끊고, 장기를 박살냈다.
시체를 보면서 루 륀은 기가 막혔다.
그가 있는 쪽으로 오면 100%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가 사체로 발견될 줄은 몰랐다.
첨탑을 중심으로 수색을 하던 중, 약 800m 떨어진 곳에서 핏자국과 함께 피에 젖은 옷가지와 빈 생수병, 그리고 위스키 병이 발견됐다.
800m 거리의 그곳에서 누군가가 총을 맞았다. 원 아이드 잭은 언제나처럼 실패하지 않았다. 분명히 목표물 중 적어도 하나는 총을 맞았다.
그런데 잭이 총도 아닌 칼을 맞고 죽어있다고?
이상했다.
실수. 잭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그가 총을 쏘면 분명 누군가가 죽는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치료한 흔적이 있고 시체는 없다. 심지어 잭을 죽이기까지 했다.
잭이 죽은 상황은 더욱 이상했다.
잭은 피묻은 옷가지가 발견된 바위에서 첨탑 쪽으로 더 가까운, 첨탑에서 500m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비석모양의 바위를 엎드려 조준한 채로 죽어 있었다. 격투나 저항의 흔적은 없었다.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두 개의 탄피와 약실에 한발이, 클립에 2발이 남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2발을 쏘고 3발째를 장전하고 목표를 조준하고 있다가 뒤에서 다가온 적에게
반항도 못하고 돌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첨탑 위의 공간은 협소했고 첨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뒤편의 삐걱거리는 철제 사다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잭이 인식할 수 없게 그의 뒤를 잡기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면식이 있는 내부자의 소행인가?
그럴 리 없다. 배신자가 있을 수도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잭은 루 륀 자신에게도 무방비로 등 뒤를 맡길 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잭을 죽인 자는 어떻게 잭의 총탄을 피해 그의 배후로 들키지 않고 돌아가 잭을 죽일 수 있었을까?
왜 잭은 그들을 죽이지 못했나?
잭을 죽인 후 임시로 응급처치를 한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루 륀은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 마투피 인근에 방사형으로 배치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뒤졌지만, 어떠한 흔적도 찾지 못했다.
마치, 하늘로 증발한 것처럼.
증발. 그것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투피에서 방글라데시 국경까지 100km가 넘는다. 최소한 한 사람은 총을 맞았다. 차량은커녕, 도로도 이용할 수 없다. 모든 도로는 루 륀의 보안대가 장악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들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시체를 찾게 될 줄 알았는데, 시체는커녕,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발견하긴 했다.
민닷과 마투피의 중간 지점에 있는 야영 흔적을. 루 륀이 원 아이드 잭과 헬기를 타고 마투피로 가던 그 시점에 그들이 하루 묵었던 장소일 것이다.
증발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며칠 동안 이 같은 사고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반복했다. 그럼에도 결론은 이렇게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것이 루 륀을 괴롭히고 있었다.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루 륀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그의 비서인 여군 중위가 들어와 보고했다.
“모시고 왔습니다.”
루 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30초 후에.”
그는 거울 앞으로 가서 복장을 점검하고 표정을 바꿨다.
생각을 하기 위해 잔뜩 힘준 얼굴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리고 살짝 어깨에 힘도 뺐다.
“모셔왔습니다.”
30초 후 여군 중위가 남자 한명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잔뜩 움츠려 있었다. 공포에 질린 눈이 루 륀 대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중위가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앉으시죠.”
루 륀 대령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네 넵.”
쿵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22일, 일명 루 바의 광견들에게 체포당했던, 칼로에 있는 트래킹 업체 사장 쿵(Kung)이 몸을 떨며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루 륀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 륀이 그의 앞에 앉았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다시 중위가 들어와 차를 두 잔 내려놓았다.
그러나 쿵은 감히 그 잔에 손을 대지 못했다. 쿵은 무서웠다. 지난 며칠간 경험했던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루 바의 미친개의 두목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루 륀은 그런 쿵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령의 갑작스런 사과에 쿵이 깜짝 놀라 몸을 더욱 움츠렸다.
한참 고개를 숙였던 루 륀이 고개를 들다가 잔뜩 웅크린 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쿵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우선 드시죠.”
루 륀이 쿵에게 차를 권했다. 쿵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쿵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차를 두 모금 마셨을 때, 다시 대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께서 안내하신 두 남녀는 저희가 쫒던 사람입니다. 향후 미얀마의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말에 쿵의 손이 멈췄다. 사형선고다. 이건 사형 집행 전 마지막 만찬 같은 거다.
“그들을 추적하던 저희 부대원들이,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다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고충이 심하셨지요?”
쿵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많이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육체적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아팠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저희들은.”
루 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선생님 같은 선량한 미얀마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민을 핍박하는 실수가. 아주 커다란 실수가.”
루 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쿵도 황급히 대령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밑을 살피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쿵은 지금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형 선고가 아니었던 것일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고초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바로 선생님을 석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루 륀의 말이 이어질수록 쿵의 손떨림은 잦아들었다. 대신 마음이 조금씩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부하들은.... 선생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제 부하들은.... 그저 조국을 위하겠다는 충정의 마음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을 지켜야하는 군대가 국민을 핍박했다는 이 잘못은 모두 저에게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대령을 바라보면서, 쿵은 찻잔을 든 채로,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는 안도감, 그동안 자신을 잠식했던 공포 그리고 억울함이 풀어지는 그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욱 흘러 나왔다.
조금씩 흐르던 눈물은 수도꼭지처럼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곧 쿵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고개를 든 루 륀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루 륀을 쿵은 두 손으로 안고, 마치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며칠간의 공포가 눈물이 되어 흘러나오는 것처럼, 모든 감정을 쏟아내듯 눈물을 흘렸다.
루 륀은 그를 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생각했다.
왕이 될 자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 그를 위해 목숨을 걸 백성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이 하나의 백성은 열 명의, 백 명의, 천 명의 그와 같은 백성을 만들어 줄 것이다.
루 륀은 엉엉 울고 있는 쿵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
데니얼 양.
의뢰인과 계약에 의해 정보를 모으고 분석해 제공하는 사설정보기업 ‘박물관연대(Museum Union)’ 를 운영하는 독립요원 데니얼 양.
카지노에서 주 선생이었던 그는 홍콩에 위치한 박물관연대 위장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골동품 거래 사무소로 위장한 이 사무실이 데니얼 양의 아시아 지역 총괄 사무실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두 곳에 표식용 압정이 박혀 있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 그리고 방글라데시 탄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며칠 전 받은 마지막 보고서는 방글라데시의 작은 하안도시 탄치에서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과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는 보고서였다. 새벽에 헬리콥터가 짧게, 대략 30분 정도 그 곳에 착륙했었고, 동이 트기도 전에 떠나갔다는 보고서였다.
데이빗 박. 그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들이 치앙마이에 도착한 날이 5월 12일. 태국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그들이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 13일 새벽이다.
그리고 탄치에서 헬리콥터가 포착된 날이 25일 새벽.
12일.
만약 그들이라면 데이빗 박이라는 놈과 완이라는 년은 고작 12일 만에 800km의 거리를 이동한 것이다.
800km. 직선거리로 800km다. 실제 이동경로를 포함한다면 1000km에 육박하는 거리다. 태국 내부 정보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미얀마에 추적을 요청했고, 미얀마 군부가 그들을 추적했다. 검문소도 돌아갔을 터이고, 신분증 하나 없는 그들이 무사히 그 거리를 통과해 탈출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런데 그의 직감이, 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12일 동안에 1000km를 돌파해 탄치에서 탈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미국일까? 방글라데시 정보원은 그 시기에 미국 장성이 치타공항만 재개발 사업이라는 카드를 들고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헬리콥터.
우연일까?
헬리콥터가 떴으면 어딘가 착륙해야 했다.
그런데 잡히질 않는다.
어디에서 떠서, 어딘가에 착륙했는지, 추적이 되질 않는다.
시간이 아직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시간을 더 들이고, 돈을 더 쓰면 추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지?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소란을 벌인 것이지?
지도 왼쪽에는 베이징에서 들어온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베이징은 이번 사건을 크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손님과 하급요원의 단순한 치정사건으로 바라보는 듯 했다.
지배인 놈이 장난질을 쳤던 것일까?
식양과 아무런 연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데니얼 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도 오른쪽 위에 놓여 있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가 몰래카메라로 사용하는 안경으로 찍은 사진.
데이빗 박의 얼굴이다.
어딘가 서글서글하고, 약간 여유가 묻어 나오는 얼굴, 부드러운 눈매의,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이는 데이빗 박의 사진이 그의 손에 들려 있다.
“완전히 속였군.”
데니얼 양은 그 사진을 보며 말했다. 도박꾼인줄 알았는데, 그저 돈 많은 집 자식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자. 개자식아.”
그는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
태국 국가정보부 소속 2급 요원 야닌 윗미따난은 방콕에 위치한 국가정보부 본부 건물 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남자가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 같군.”
그들의 앞에는 루 륀, 루 바 장군의 맏아들 루 륀 대령이 보낸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루 륀. 그는 추적에 실패했다고 간략하게 적은 보고서를 보내왔다.
어떻게 추적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어디까지 따라갔는지는 전부 빠진 채로.
그저 추적에 실패했다는 내용만이 담긴 보고서였다. 야닌은 그 얄팍한 보고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역을 완전히 봉쇄했는데, 어떻게 빠져나갔지?”
야닌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추적했고,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어디까지 따라갔는지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녀의 귀는 여기저기 있었으니까.
“정말 놀랍군요. 말도 안 돼요. 그도 죽었다지 않습니까?”
“그래. 원 아이드 잭이 죽은 건 정말...... 놀라워.”
원 아이드 잭. 저격 전문 독립요원. 아니. 저격수 용병.
나름 이 세계에서, 더러운 일을 하는 이 쪽 세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그가 이번에 죽었다.
“..... 어떻게 보고할 건가요?”
제이크가 물었다.
“보고?”
야닌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있던 사진 두 개를 그녀의 앞으로 끌어 당겼다.
한국정부가 부탁한 데이빗 박의 위장 신분용 사진.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완의 증명사진.
“보고는 할 필요 없겠지.”
이번 사건에서 태국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열심히 중국이 무대 위에서 놀아날 때, 거기에 일조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태국은 주역이 아니었다.
“할 필요 없긴 하죠.”
윗선의 관심 대상이 아닌 두 남녀는 급하지 않다. 지금 그들의 가장 크고 시급한 문젯거리는 여기저기 돈을 미친 듯 써대고 있는, 그래서 향후 그들의 약점이 될 전 장관의 와이프였다.
“좋아. 우선은 가지고 있자고. 너와 나만.”
제이크는 씨익 웃었다.
나중에 야닌과 제이크가 국가정보부를 장악하게 되면, 그때는 이 사건이, 그리고 사라진 그 둘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일단 이거부터 처리해야겠군요.”
그의 손가락이 다른 사진을 끌어와 데이빗 박과 완의 사진을 덮었다. 전 장관의 아내의 사진.
“그렇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하겠군.”
그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그녀를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윗선이 바라는 대로.
***
징춘(景春), 프라이멀 카지노의 부지배인이자, MSS 감찰심계국(監察審計局) 소속 감찰요원인 징춘은 욕설을 퍼부으며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그에게 내려온 전문, 본국 소환령 때문이었다.
그의 짐은 다른 누군가가 쌀 것이다. 그러나 서류. 서류만큼은 아니다.
그는 이곳에 와있는 동안 만든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분류한 다음 봉인하든가 폐기해야 할 것이다.
출발까지 6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분류도 다 끝내지 못했다.
“씨발. 그 연놈들 때문에.”
징춘은 욕설을 퍼부으며 서류를 넘기고 또 넘겼다.
그러면서 어제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그의 직속상관이 한 전화.
“뭐. 위에서는 그렇게 큰 일로 보고 있지 않아. 그저 변화를 줄 때가 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러니 본국에 들어와서 잠시 머리를 식히라고. 어차피 식양을 찾는 일이야 하루 이틀 만에 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좌천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단순한 교대일 뿐.
그러나 작전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서류를 검토하고, 일부는 따로 챙기고, 대부분은 바닥에 던지면서 끊임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의 손에 잡힌 서류에 시선이 머물렀다.
완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인사 서류.
그곳에는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그녀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징춘은 그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을 맞추며.
그러다 서류를 내려놓고, 책상을 뒤져 또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VIP 초청장 요청용 서류. 망할 놈의 빵즈. 데이빗 박의 사진이 들어있는 서류를.
그는 두 서류를 따로 분류했다. 그는 이 서류를 그의 개인 목록에 추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서류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또 볼 것이다.
이 연놈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서.
< INTERMISSION : 며칠 후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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