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45화 (46/386)

MISSION 02 : HANDCARRY (23)

5월 24일

마디나 호텔(Madina Hotel).

탄치, 치타공주(州), 방글라데시

양적으로, 질적으로 많이 부족한 아침을 먹은 곽용신은 방으로 돌아와 노트에 이것저것 적고 있었다.

30대 중반. 데이빗 박. 그를 기다린다. 6월 2일까지.

여권은 가지고 온다 했으니. 남자는 문제없겠군.

인도까지만 넘어가면, 그 다음에 비행기를 태우는 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와 인도 국경을 넘는 방법?

껌이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산도 제한 없다니. 뇌물 좀 뿌리면 그 정도쯤이야.

문제는 여자다. 아니. 여자로 추정되는 또 다른 사람. 20대.

MSS가 찾는다고 하니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고, 이곳에서 중국 약빨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놓아야겠군.

최악의 경우.

여자는 버리고, 남자만 챙긴다.

탄치라는 이 작은 마을에서 동양인이 어슬렁거리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후속팀이 오면 더 눈에 띄겠지.

은밀하게 행동하긴 쉽지 않겠군.

차량확보, 예상동선 체크. 의약품도 좀 필요할 수 있겠군.

젠장. 미리 이야기하지.

치타공에서 준비해오면 좋은데.

한창 상황을 정리하는 중 전화가 울렸다. 블랙베리가 아닌, 일반 전화가.

곽용신은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형님. 어딥니까?”

어제 전화 해온 후배, 뉴델리에서 치타공에 가야한다고 징징거리던 4급 후배의 전화다.

“코드.”

“이런 젠장. 탄치요?”

“코드.”

“...천지 만물에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젠장할.”

“어땠냐? 사이캇 호텔은?”

“아주 고오오맙습니다. 덕분에 숙면했수. 아주 애기처럼 30분에 한번씩 깨면서 푹 잤습니다.”

“고맙긴. 여권 받아왔냐?”

곽용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형님이 대가리요?”

“대가리는 무슨. 너나 나나 똑같은 총알받이 주제에.”

“근데 여권은 어찌 알았수?”

“몇 개야?”

“한 개요.”

“한 개?”

“네. 사진 부착식 여권 하나. 아직 사진 안 붙은 걸로.”

“..... 남자?”

“..... 여자.”

곽용신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김형원의 이야기와 달랐다.

남자가 우선순위라 했는데 여권은 여자?

“전화 왔었냐?”

“네.”

“김?”

“유.”

후배는 김형원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유씨성을 가진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

유. 유씨라. 유씨 성이 누가 있었지?

“뭔가... 개꼬였구만요.”

후배도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지휘계통이 꼬였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여자만 확보하라?”

곽용신이 물었다.

“....... 뭐.”

후배는 말을 아꼈다. 그러나 긍정의 시그널임을 곽용신은 알았다.

“탄치에 오면 마디나 호텔이 있어. 호텔이라고는 이거 하나 뿐이니 찾기는 쉬울 거야. 차를, SUV를 빌려와. 기사를 대동하고. 최대한 믿을만한 사람으로. 비용은 상관없어.”

“상관없다?”

“그래. 얼마를 쓰든 상관없어. 오면서 치타공으로 연결되는 루트를 최소한 3개는 확보하고. 치타공에도 사람 하나 심어놔.”

“사람을 심으라니?”

“있잖아. 니 뒤에 따라오는 놈.”

“............”

“몇 명이야?”

“....... 우선 3명. 나 빼고.”

“한명은 치타공에 심어. 거점 확보하고, 차량 확보하고. 비상상황에 대비하라고 해. 약도 치고.”

“...... 비용 상관없이?”

“그래. 돈은 생각하지 말고.”

곽용신은 주변에 충분한 뇌물을 뿌려두라고 말했다.

“너는 최대한 빨리 오고. 한 놈은 거기서 구할 수 있는 거 전부 구해서 오라고 해. 물론 차도 구해서.”

“..... 성격은?”

후배가 물었다. 이번 작전은 대체 뭐요? 그런 의미로.

“119.”

“젠장.”

작전 중 가장 고난이도 작전이 구출작전이다. 그것도 충분한 장비나 인력, 시스템의 지원 없이 돈만으로 해결해야 하는 급조된 구출작전.

“빨리 움직여.”

“형님. 우리 좆된 거 맞죠?”

후배가 투덜거렸다.

“..... 올 때.”

“네?”

“먹을 것 좀 충분히 사와라. 여기 음식 개판이다.”

곽용신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시나리오를 써 보자. 어차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우선 시나리오부터 써 보자.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곽용신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노트를 펼쳤다.

***

5월 24일

페닌슐라 치타공 호텔(The Peninsula Chittagong).

치타공, 방글라데시

CIA 요원 트레이시 테일러는 임시로 만들어진 상황실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치타공 이곳저곳을 비추고 있었다. 치타공 시가 관리하고 있는 화질 나쁜 CCTV 화면은 물론, 특작팀이 와서 급하게 설치한 HD화질의 영상이 빠르게 모니터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계속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모니터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트레이시는 초조했다.

특작팀이 도착했다. 상황이 발생하면 전 세계 어디든 36시간 안에 도착한다는 특작팀은 예상보다 빨리 이 곳 치타공에 도착했다.

특작팀 기술지원조는 페닌슐라 호텔에 임시상황실을 설치하고, 도심 이곳저곳에 도청기를 심고, 시 경찰 감시시스템을 해킹해 화면을 받아냈다. 단 하루 만에.

현실에 존재하는 고스트 리콘, 특작팀 작전조는 트레이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열심히 장비를 점검하고 있을 것이다.

의료팀 선발진이 내일 도착한다. 장비가 그 다음날 본진과 같이. 그러면 늦어도 27일에는 만일을 대비한 수술실도 만들어진다.

이곳 치타공에.

10억달러 규모의 치타공 항만 재개발 사업이라는 미끼를 들고 높은 사람들은 열심히 방글라데시 정부요원들의 눈을 가리고 있다.

그들은 왜 이곳에 와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6월 2일. 그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연기를 계속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오직 하나. 한규호만 제외하고.

트레이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 날짜가 30일. 거기다 이틀을 더해, 앞으로 일주일 안에 이번 작전의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그녀의 미래도 포함해서.

“오키나와에서 통신 들어옵니다.”

그녀보다 최소한 10년은 더 CIA에서 근무했을 상황요원 하나가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CIA 해외작전의 정수라는 특작팀 베테랑이.

트레이시는 이어폰을 꼈다.

(추가 보고할 사항은?) .

오키나와 상황실에 있는 아이작 페리, CIA 동아시아지부장이 물었다.

“특별히 없습니다.”

(알겠다. 아웃).

별일 없는 것을 알면서도 오키나와에서는 주기적으로 연락이 왔다.

아마 워싱턴에서, 랭리에서도 이렇게 오키나와를 쪼고 있겠지.

이번 작전, CIA 특작팀은 물론 미 해군 3개 함대가 움직였다.

그런데 그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단순히 요원을 그만 두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

5월 24일

마투피 남동쪽 15km 지점

친 주, 미얀마

한규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를 세고 있었다.

완, 아니. 이제는 샤오메이인 그녀의 숨소리는 경사가 급해지면서 조금 더 거칠어졌지만, 빈도는 일정하게 유지됐다.

괜찮겠군.

한규호는 걸음을 아주 조금 늦췄다.

태양은 이제 머리 위를 넘어 천천히 서쪽으로, 마투피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한 15에서 20km 쯤 남지 않았을까?

평지라면 무리해서 한 두 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긴 하지만, 산지인 이곳이라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그래봤자 네다섯 시간이다.

“조금 쉬었다 가자.”

한규호가 뒤를 보면서 말했다.

한규호의 발뒤꿈치만 보며 걸어오던 샤오메이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본 한규호는 살짝 웃었다.

“텐트천을 가지고 올 걸 그랬군.”

샤오메이는 숨도 채 고르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허억. 갈...하아. 갈 수.. 하악. 있어요.”

한규호는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농담이야. 한 15km 남은 것 같아. 어차피 마투피에는 밤에 들어가야 하니까. 시간 여유도 있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샤오메이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잠에서 깨자 알몸으로 홀로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텐트천은 어느새 그녀에게 딱 맞게 좁혀져 있었고,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깨어났다.

그녀는 습관대로 천천히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무언가 타닥타닥 하면서 타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공간을 만들고, 그리고 텐트천과 그 텐트천을 덮고 있던 낙엽을 헤치고 나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굽고 있는 한규호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숨을 고른 샤오메이는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품 속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편한 잠을 잤다.

무언가, 그리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은 있지만, 느낌만 남았을 뿐, 기억 한 조각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푹 잤다.

그가 없었다면,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그녀는 한규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팔로 땅을 짚은 채 하늘을 보면서 무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데리고 몇 백 킬로미터를 걸어가며 탈출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어디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샤오메이는 미국으로 가겠다는 자신의 말이 그를 실망시킨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그를 통해서 한국으로 가든, 아니면 도중에 그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든,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가진 정보라면 미국에서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받을 수 있을 정도는 됐으니까.

그런 그녀는 지금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산등성이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는 그가 마음에 걸렸다.

괜찮을까?

그도, 그녀 자신도 괜찮을까?

아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목적지는 어딘가요?”

그녀가 물었다.

우선은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를 위해서. 그를 위해서.

“탄치. 들어본 적 있어?”

“.... 없어요.”

“마투피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어. 100km라 해도 대부분 내리막이니까 아무리 늦어도 이틀이면 가능할 거야.”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가 이틀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럼 가능할 것이다.

“네.”

샤오메이는 그의 말에 그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

5월 24일

마투피 남동쪽 800m 지점

친 주, 미얀마

해가 졌다.

어둠은 두 사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규호는 그녀를 힐끗 보았다. 어젯밤과는 달랐다.

샤오메이의 호흡은 안정된 상태처럼 들렸다.

한규호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인공적인 조형물의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교회 십자가 같았다.

1km도 남지 않은 저곳에 도착하면 건물이 있을 것이다.

한규호는 최단 거리로 교회 십자가처럼 보이는 곳으로 무언가가 있는 장소를 향해 발을 옮겼다.

교회가 맞다면 잠시 쉬고, 최대한 영양을 보충하고, 먹을 것을 좀 챙긴 다음 방글라데시로 내리막길을 타고 가면 되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그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향했다.

“칼로에 있을 때 말야.”

그가 말을 꺼냈다.

“왜 내가 건네준 크로와상 있지? 기억나?”

샤오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파는 집에서 먹을 때, 그때 버터를 줬는데, 날이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보관이 문제였는지, 엄청 눅눅하고 상태가 엉망이었거든. 그래서 살짝 먹어볼까 하다가 그냥 두고 왔는데. 지금 그게 생각나는군. 꼭 마투피에서 버터를 구하자고. 사 가기는 힘드니 어디 교회 같은데 뒤지면 버터 한 덩이 쯤은 나올 거야.”

그의 말에 샤오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구해가요.”

그녀가 말했다.

그 순간 직감이 그를 찾아왔다.

항상 그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왔던 직감이.

***

5월 24일

마투피 남동쪽 800m 지점

친 주, 미얀마

해가 졌다.

어둠은 두 사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샤오메이는 그 어둠 속에서 그의 발꿈치만을 보며 걷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랐다.

그녀의 호흡은 안정됐고, 계속 걸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샤오메이는 그의 발뒤꿈치를 보면서 생각했다.

마투피에 도착하고, 그리고 다시 방글라데시로 가면 안전해질까?

안전해지면, 더 이상 그가 그녀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까?

미국으로 가면 이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칼로에 있을 때 말야.”

그가 말을 꺼냈다.

“왜 내가 건네준 크로와상 있지? 기억나?”

샤오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크로와상이 떠올랐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했던 그 크로와상.

“그거 파는 집에서 먹을 때, 그때 버터를 줬는데, 날이 더워서 그런지, 아니면 보관이 문제였는지, 엄청 눅눅하고 상태가 엉망이었거든. 그래서 살짝 먹어볼까 하다가 그냥 두고 왔는데. 지금 그게 생각나는군. 꼭 마투피에서 버터를 구하자고. 사 가기는 힘드니 어디 교회 같은데 뒤지면 버터 한 덩이 쯤은 나올 거야.”

샤오메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버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네. 꼭. 구해가요.”

샤오메이가 말했다.

그 순간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서운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항상 그를 살려왔던 직감이 그에게 경고를 내렸다.

한규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지듯 뒤로 돌았다.

그리고 그의 전신으로 샤오메이를 감쌌다.

그 순간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비명을 참으며, 그녀를 두 팔로 감싸고 몸을 날렸다.

한규호의 발뒤꿈치만 보며 걷던 샤오메이는 갑작스럽게 그녀를 덮쳐오는 그를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몸이 그녀의 시야를 가리는 그 순간 그녀의 온 몸에 다가오는 충격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온 몸의 수분을 진동시키는 듯한 충격파가 그녀를 덮쳤다.

충격파가 채 고통으로 인식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을 덮쳐오는 한규호에게 밀려 뒤로 날아갔다.

타앙

그제서야 들려오는 총 소리에, 주변에 있던 박새들이 날아올랐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