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22)
5월 23일
마투피 남동쪽 45km 지점
친 주, 미얀마
“어릴 때부터 춤이 좋았어요.”
완이 입을 열었다.
“몇 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나는 가장 어릴 때 장면도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면, 아빠가, 어른들이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는 장면이었어요. 아마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부터 춤을 좋아했었던 것 같아요.”
“그렇군.”
완의 말에 한규호는 부드럽게 말했다.
“돌아가신 엄마도 춤을 잘 췄다고. 그래서 내가 춤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나요.”
“그러셨군.”
“율속족(Lisu Tribe)를 아나요?”
“들어본 적 없군.”
한규호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율속족은 중국 56개 소수 민족 중 하나예요. 티베트에서 왔다고 전해지고 있죠. 아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정도 때 이주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가.”
“저는 윈난성에서 태어났어요. 아빠는 율속족이었고, 엄마는 한족이었다고 들었어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몰라요. 그저 제가 아는 것은 엄마는 절 낳고 얼마 안 지나 돌아가셨고, 5살 때까지 아빠와 함께 살았다는 것. 그뿐이었죠.”
“그렇군.”
“엄마는 미인이었다고 들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고, 아니 남아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보지 못했어요. 그냥, 아빠랑 살면서, 어른들 사이에서 뛰어다니면서 다섯 살까지 살았어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녁을 먹고, 아빠와 아빠 친구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가 빙글빙글 춤을 췄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 아빠가, 삼촌들이 박수를 치고, 안아주셨었죠.”
“.......”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누구인지 모를 아저씨들이 찾아왔고, 저는 전통의상을 입고, 그 아저씨들 앞에서 춤을 추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북경에 가서 좋은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라고.”
완은 그 날을 떠 올렸다.
쪼그려 앉아, 자신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슬픈 눈으로, 북경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게 됐다고 말하던 그 날을.
“나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지금 그 상태 그대로 좋았죠. 하지만 아빠의 슬픈 눈을 보고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어요. 아니,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잘 기억 안 나니까.”
완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한규호는 온기 머금은 자신의 팔을 살짝 움직여, 그녀의 어깨 부위에 온기를 더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랐어요. 지금도 모르고. 아마 어릴 때부터 어린애가 예쁘다고 소문이 났고, 어찌어찌 당 지역위원회로 흘러 들어갔고, 어릴 때부터 재능을 특화하는 엘리트 교육을 추구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에 알맞은 모델이었을지도 모르고요.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빠는 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그 눈. 지금도 기억나는 그 슬픈 눈을 보면 알 수 있죠.”
완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5살의 어린아이는 아빠 품을 떠났어요. 누구인지 모를 아줌마의 손을 잡고 거의 만 하루를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향했죠. 그리고 북경무용학원 유년부에 입학했어요. 아니. 입학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를 만났죠.”
“구 교수?”
“....맞아요. 최종 입학심사위원 중 한 명이 바로 그였어요. 그리고 그가 나를 선택했죠. 15년을 키워낼 다음 식양으로.”
“그렇군.”
“그리고 저는 그 학원 대신, 다른 곳으로 갔죠.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런 곳으로. 그저 자신을 새아빠처럼 생각하라는 그, 그리고 집안일을 봐주던 할머니만이 있는 그 공간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10년을 넘게 있었어요. 식양으로서 알아야 할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한규호는 신음이 흘러나올뻔한 기분을 참아냈다.
끔찍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사춘기 소녀가, 아니, 아직 소녀가 아니던 어린아이 때부터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조차 없을 때부터 한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다.
만들어내기 위한 15년을 그녀는 보냈을 것이다.
한규호는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18살이 되던 해, 나는 MSS의 한 지부에서 그녀를 만났어요. 아니. 만났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네요. 그녀를 보았어요.”
“그녀?”
“완. 나에게 신분을 주고 사라질 여자를.”
한규호는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는 것을 알았다.
완은 실재했었다.
위장 신분이 아니라 실재 신분을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
“완은······. 작고 지저분한 소녀는 취조실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한쪽에서만 보이는 위장 거울 너머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가져갈 동갑내기 여자애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지도 모른 채, 태어나면서부터 그곳에 올 때까지 이야기를 끝도 없이 반복했어요.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또 들었어요. 그렇게 일주일을 우리는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에 있었어요.”
한규호는 상상했다.
취조실 의자에 앉아, 피폐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으며, 자신이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하게, 경계가 붕괴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모습을 위장 거울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새로운 인생으로 삼기 위해 끊임없이 되뇌던 또 한 명의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저는 상해로, 쿠알라룸푸르로, 하노이로, 북경으로. 많은 곳에서 경험을 쌓았죠. 완으로써.”
한규호는 그 팔에, 그녀의 다리를 감고 있는 자신의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아프지 않을 수준에서 최대한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름은?”
“...........”
“이름이 뭐지?”
“....샤오메이(小美)”
“샤오메이···.”
“본명은 아니에요. 그저 아빠가 부르던 아명(兒名)이에요. 본명은···. 이제 의미 없으니.”
“그렇군.”
완은 조금 더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파묻었다.
알몸인 두 남녀가 최대한 밀착했다.
그러나 그 품에 안긴 샤오메이도, 온몸으로 그녀를 안고 있는 한규호도 알몸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서로의 실체를 알게 된 두 사람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 자 두라고. 내일은 힘들 테니.”
“...... 고마워요.”
“그래.”
“항상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래.”
“고마워요······. 돌아와 줘서.”
“.....그래.”
샤오메이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드러냈다···.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빠를 가진 완이 아니라,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빠를 가진 샤오메이인 자신을.
“...... 미국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
“도와줄 수 있나요···.”
“도와줄 수 있어.”
“미국으로 가도 될까요.”
“가도 괜찮아.”
한규호가 팔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잠들어도 괜찮아.”
한규호는 체온을 조금 더 올렸다.
***
5월 24일
마디나 호텔(Madina Hotel).
탄치, 치타공주(州), 방글라데시
탄치의 유일한 호텔인 마디나 호텔 1층 커피숍에 앉아있는 곽용신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코트라(KOTRA)의 콜카타 해외무역관의 물류담당관, 그리고 국가정보원 4급 남아시아 2팀장 곽용신은 설탕 안 넣은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싸구려 원두, 그것도 조금씩 산패가 시작되는지, 신맛이 조금 더 강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치타공 올드스테이션 구역에서 밤새도록 울려대는 망할 놈의 열차 경적에 제대로 잠도 못 잔 그가 구불구불한 산악도로를 6시간이나 타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멀미까지 할 정도로 녹초가 돼 있었다.
눈에 보이는 호텔에 체크인하고, 도착했다고 전문을 보내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연락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 지금은 작전 불가 상태다.
뭐랬더라. 탄치로 이동해서, 무슨 강? 아무튼, 터미널에 거점을 구축하라고?
X이나 까 잡숴라!
그렇게 허공을 향해 외치고 아침까지 푹 잤다.
다행히 밤사이 따로 전문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여유 있는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1층 식당 겸 커피숍에 내려온 것이다.
“젠장. 호텔 방 잡았으면 거점 구축한 거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맛없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탄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이 동네는 한국의 면 소재지보다도 작았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아니 도시라고 하기 민망한 이 동네에 또 있을 만한 것들은 다 있었다.
모스크, 시장,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주도로에 있는 두 개의 슈퍼마켓. 그리고 이 호텔까지.
곽용신은 커피를 마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망할 놈들아. 도착했다. 여기서 뭘 시킬 거지? 여기서 또 어딜 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저 산으로 올라가라고는 안 하겠지?
그의 눈에, 히말라야산맥의 먼 줄기 중 하나인 거대한 산맥이 들어왔다.
안 간다. 안 갈 거다. 무슨 수를 써서도 저 산을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딸에게 맹세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 소년이 그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대충 구운 토스트, 먹어도 될까 의심스러운 잼과 버터, 그리고 써니사이드업으로 구운 달걀.
어떻게 하면 식욕을 떨어트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담긴 플레이팅.
소년은, 아마도 직원의 아들처럼 보이는 그 녀석은 무신경하게 접시를 던져놓고, 하품하면서 멀어져 갔다.
베이컨이라도 추가할까 생각하다가, 여기는 이슬람 국가였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난 점점 맛이 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까지 이어졌다.
“에휴······.”
곽용신은 작게 한숨을 쉬고, 토스트를 들어 잼을 발랐다. 이거 빵도 유통기한 지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 그의 블랙베리 구형 PDA가 울렸다.
RIM이 아직 숨이 붙어있던 시절 NSA(미 국가안보국)가 RIM에 의뢰해 만든 보안강화형 블랙베리 카피 모델이 그의 주머니에서 우우웅 하면서 울어댔다.
전화였다. 메일수신 알람이 아닌 전화였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코트라 콜카타 무역관 물류 담당관 곽용신입니다.”
“나. 김형원이야.”
장년 남성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김형원?
곽용신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었지?
김형원? 프라하의 김형원!
전설의 김형원?
“코드 불러 주십시오.”
김형원이야 그러면 아. 전설의 그 선배님? 살아계셨어요? 이미 요단강 건넜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산 올라가는 거 빼고 다 합죠. 이럴 수는 없지.
“...천지 만물에 지킬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전화기 너머로 정약용의 저서 수오재기(守吾齋記) 구절 중 하나가 흘러나왔다.
이번 작전이 시작되기 전 콜카타에서 받은 코드와 같았다.
“확인됐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도착했나?”
그가 물었다.
“도착했습니다.”
곽용신이 말했다.
“거점은?”
“구축했습니다.”
호텔 잡았으면 구축한 거지.
“30일 전후로 두 사람이 그곳에 올 거야. 남자 한 명. 30대 중반. 데이빗 박이라는 이름을 쓸 거고.”
“데이빗 박. 30대 중반 남성. 다른 한 명은?”
“아직 불명. 20대 여성으로 추정되지만 확실치는 않네.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은?”
“남자 혼자 올 수도 있네.”
곽용신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가 우리와 연관이 있다. 우리 직원일까? 그의 신원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오는 누군가. 데리고 올지 말지 아직 모르는 누군가가 또 있고. 20대 여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외에 불명이라는 것으로 봐서 한국인은 아니군.
“20대 여성으로 추정.”
곽용신이 다시 말했다.
“... 후속팀이 여권을 가지고 갈 거야. 남자의 여권은 준비됐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은 여권을 현지에서 만들어야 하네.”
“알겠습니다.”
콜카타에 가면 가능할 것이다. 사람 하나 위장 신분 만드는 것은 여기에서 일도 아니다.
“중국 애들이 찾아올 수도 있네.”
“MSS?”
“아마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움직일 수 있고.”
“흐음······.”
불안한데. 쉽게는 안 풀리겠는데. 곽용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28일까지 가능한 모든 인력이 그쪽으로 갈 거야. 6월 2일까지 대기. 2일은 무조건 철수. 필요한 서류는 전문으로 보내지. 예산은 제한 없이. 지시와 보고는 나에게만. 준비하게.”
“제한 없이?”
곽용신이 물었다.
“그리고······.”
김형원은 곽용신의 반문에 반응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상황이 변했을 때······. 남자만 확보할 것. 알겠나?”
“...남자만.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곽용신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 눈앞의 놓인 커피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다 비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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