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21)
5월 23일
마투피 남동쪽 45km 지점
친 주, 미얀마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환각?
아직 초점이 맞이 않아 시린 눈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환청?
환각과 환청이 동시에?
“아.. 젠장. 드럽게 머네.”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한 그의 목소리가.
“응? 일어나 있었네.”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두 손 가득 들고 온 무엇인가를 땅에 내려 놓았다. 그러나 완은 그가 내려놓은 물건을 볼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얼굴만이 보였다.
어둠이 산을 거의 잠식했지만 서쪽 산등성이 너머에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붉은 노을이 다행스럽게도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비췄다.
“왜......”
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운 좀 차렸어?”
“왜..... 돌아...”
“움직일 수 있으면 거기 근처에 낙엽 좀 모아봐. 최대한 많이.”
한규호는 내려놓은 짐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왜.... 돌아.......왔어.....요”
완이 터져나올 것 같은 감정을 막아내고 겨우 입을 열었다.
물건을 뒤적이던 한규호는 그녀의 말에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울겠군. 울리겠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낙엽부터 좀.”
“왜! 왜! 왜 돌아온 건데! 돌아와서! 그래서 같이 죽어주면!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왜! 왜!”
그녀가 크게 외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 할 힘조차 없는 줄 알았는데,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외침에 굽이굽이 물결치는 산줄기가 응답했다.
왜
왜
왜......
우는군. 울렸군.
그녀의 두 눈에 맺혀있는 물기가 한규호의 눈에 들어왔다.
한규호는 멈췄던 행동을 다시 재개했다.
가지고온 물건 중 여기저기 구멍이 난 텐트천을 옮기면서 말했다.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냐고 물었지.”
한규호의 말에 완의 등이 한번 움찔했다.
그렇게 물었다.
그를 죽이려하고, 그가 다시 살아나고,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일부분을 보인 그 날.
“데려갈 수 있다고 내가 말 했지.”
한규호는 텐트천을 쫙 펴보았다. 음. 이정도면 생각 외로 나쁘지 않군.
“데려갈 수 있으니까.”
한규호는 텐트천을 대충 접어서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완에게 다가가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다가간 후 말했다.
완의 눈에 맺혔던 물기는 결국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먼지로 가득한 얼굴에 두 줄기의 하얀 길이 생겼다.
“데려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와야지. 같이 가야 하니까.”
한규호는 양 손으로 완의 얼굴을 감싼 후, 엄지손가락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움직일 수 있으면 낙엽이나 좀 모으라고. 더 추워지기 전에 잘 준비를 해야 하니까.”
한규호는 검지손가락으로 완의 이마를 살짝 퉁겼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가 가져온 짐 쪽으로 다가갔다.
눈물 때문에 흐린 눈 너머로 완은 그의 등을 보았다.
그리고 그 등에 대고 말했다.
“.....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나...요?”
물기 젖은 목소리로 완이 물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거고.”
그가 그렇게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가 한다고 했을 때, 하지 못한 것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은 무릎을 세우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랜만에,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그녀는 온 몸을 떨면서.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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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완전히 산맥을 감쌌다.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완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 앞에서 열심히 이름 모를 새를 굽고 있는 한규호의 모습만을 지켜 볼 뿐이었다.
한규호가 가지고 온 짐 속에는 새가 몇 마리 들어 있었다.
한규호는 땅을 조금 파고, 장작을 모은 다음 돌을 모아 바람벽을 쌓고서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가 잡아온 새의 털을 거칠게 뽑은 다음 편마암으로 급조한 돌칼로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후 나무 꼬챙이에 꼽아 적당히 모양이 잡힌 모닥불 위에서 잔털을 제거했다.
그의 능숙한 모습을 그녀는 지켜보고 있었다.
“노린내가 좀 덜났으면 좋겠는데...”
한규호는 타지 않도록 적당히 돌려가며 새를 익히며 중얼거렸다.
소금. 그놈의 소금 조금만 챙겨올걸.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왜.... 그냥.... 갔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완이 물었다.
“응?”
“.....돌아...올 생각이었나요?”
“응.”
“그런데... 왜 그냥... 갔어요?”
완의 질문에 한규호는 씩 웃었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웃는 얼굴을 완은 볼 수 있었다.
“그냥 안가면?”
“네?”
“그냥 안가면? 괜찮아. 난 포기하지 않아. 그런 생각하지 마. 내가 뭘 좀 구해올게. 그때까지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그러고 갈까?”
“...........”
“그러고 가면, 당신이 잘도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겠네. 그 사람이 뭘 구해오겠지. 그 동안 푹 쉬고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규호는 새를 다시 뒤집었다. 슬슬 먹어도 될 것 같은데.
“짐이 되면 안 돼. 그러니 나는 여기서 떠나야겠어. 그가 찾지 못할 만한 곳으로. 이러고 딴 곳으로 갔을 거야. 그치?”
“........”
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면 더 귀찮고 힘들지. 뭐 그래봤자 멀리 갈 체력도 없을 테고, 가봤자 찾아내는 건 금방이지만.”
“.....금방....인가요?”
“이건 영업비밀인데,.. 금방 찾아낼 수 있다고. 그러니, 혹시라도 나중에 이런 상황이 또 생기면 그때도 도망가지 말고 그냥 거기 있으라고. 괜히 헛수고만 하는 거니까.”
한규호는 굽고 있는 새 중 한 마리를 불에서 꺼냈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것이, 작은 통닭같았다.
“자.”
한규호는 다리 한쪽을 뜯어 완에게 넘겼다.
예전의 토끼다리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살이 붙어있었다.
“받으라고. 어서.”
완은 그 다리를 받았다. 잘 익은 고기의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식욕이 일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 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한규호는 싱긋 웃었다.
몇 시간 전 자신에게 꺼지라고 소리치고 두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누운 완을 본 한규호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업고 뛸까?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그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우선 다른 방법을 찾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일종의 헝거낙(Hunger-Knock) 상태에 빠져있다.
밤새도록 차를 타고 달려와 산 초입에서 몇 시간 동안 산을 달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신체가 생명보존을 위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이대로 영양공급없이, 휴식없이 더 가면 죽는다고. 그게 헝거낙 상태다.
헝거낙이 왔을 때는 이미 늦다.
배가 고프기 전에 먹어둬야 하는데, 배고픈 상태까지 가버리면 그때는 영양을 보충하고 쉬는 수 밖에 없다.
그럼 간단하다. 먹을 것을 구해오고, 쉴 준비를 하면 된다.
그래서 그는 몸을 움직였다. 토끼, 새, 뱀 무엇이든 그의 눈에 걸리면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잡아왔다.
진짜 문제는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였다. 배고픔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고 설령 부족해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추위는 참을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니까.
한규호는 그래서 움막을 떠올렸다.
이정도 산이면 사냥꾼이나 약초꾼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움막이 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고산지대에서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한규호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빠르게 수색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몸을 움직인 것이다.
중간중간 새 몇 마리를 잡고, 칼 대용으로 쓸 날카로운 장석 편암을 주워가며 산 몇 개를 넘고나서야 그는 움막 하나를 찾아냈다. 그 곳에서 발견한 텐트천을 들고 완에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천천히, 야무지게 새다리를 먹고 있는 완을 보며 다시 작게 웃었다.
처음 방콕공항에서 보았던, 몸매를 드러내는 감색의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요염하다기보다 우아한 느낌이 들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그 사람과 동일인물일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다 헤진 트래킹 복장에, 눈물과 먼지로 범벅되어 여기저기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서울역 앞에 있으면 여자 노숙자라고 해도 의심받지 않을 모습으로 이름 모를 새다리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이 모습도 나쁘지 않군.
한규호는 남아있는 한쪽 다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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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는 작지만 그래도 적당히 살이 있는 새 네 마리를 결국 다 먹어 치웠다.
한규호는 모닥불을 피워놓은 구덩이를 흙으로 완전히 덮어서 불을 껐다. 산불도 산불이지만 혹시나 모를 위치 노출이 더 문제니까.
완은 그가 시킨 것처럼 낙엽을 모으면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진 산속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불을 꺼도 괜찮을까?
그러다 금방 그 의심을 지웠다.
그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규호는 모닥불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음을 확인 한 다음, 그가 가지고온 텐트천을 펼쳤다. 조금 지저분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지.”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고 완이 모아온 낙엽을 일부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가지고 온 텐트천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이러면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조금은 막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자”
한규호는 완을 보며 말했다.
먹자. 자자.
완은 그의 이 말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이 위에서 자나요?”
낙옆 위에 텐트천을 깔았다고 해도, 산 중턱의 추위를 막아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분명 그가 무슨 생각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완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그래야지. 우선 옷부터 벗는게 좋겠어.”
한규호가 말했다.
완은 잠시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오늘은 껴안고 자자고. 체온 유지를 위해서.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엉뚱한 생각은 하지도 마! 나 쉬운 남자 아니니까!”
한규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완전히 내려앉은 어둠에 쌓여 완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알몸 상태에서 서로의 체온으로 버텨내는 것. 그러나 과연 실제로 버텨낼 수 있을까?
아마 적당히 땅을 파고 낙엽을 깔고 그 위에 텐트천을 깐 다음 그 안으로 알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텐트천을 돌돌 만 다음 남은 낙엽을 그 위에 덮고, 남은 한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그가 생각이 있겠지.
완은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처음도 아니고, 어둠 속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새삼스럽게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이 옷을 벗자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나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옻같은 여자로군.
이 고생을 시키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몸매로군.
완은 옷을 다 벗고 천천히 텐트천 위에 누웠다. 그녀가 완전하게 눕자, 한규호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을 살짝 남겨놓고 텐트천을 그녀 위로 덮었다. 그리고는 주위에 남은 낙엽을 전부 모아 그 위에 충분한 높이로 덮었다.
신문지만 덮어도 추위가 덜 하다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된다.
그리고 한규호에게는 비장의 한수가 있었다.
한규호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최대한 낙엽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텐트천 안으로 들어갔다. 완이 팔을 벌려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가 몸을 다 넣자 알몸의 두 사람이 텐트천 안에서 밀착하게 됐다.
생각보다 더 좁았다.
완은 그의 몸이 닿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웅크러드는 것을 느겼다.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처음이 아니고, 맨살을 부빈 경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늘은 왠지 마음이 웅크러들었다.
완은 살짝 몸을 돌려, 한규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한규호의 두 팔이 천천히 그녀의 상체를 감쌌다. 그리고 그의 다리가 그녀의 다리 위로 올라와 덮었다.
한규호는 체온을 올렸다.
36.5
36.8
37.2
37.5
37.8
38.1
한규호는 그녀의 잔떨림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추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알몸으로 그와 서로 부둥켜 안고 있어서였을까 그녀는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완은 자신의 등에 닿은 그의 몸이, 상체를 감싼 그의 팔이, 다리위에 올려진 그의 다리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그 따스함이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온기가 자신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세포 하나하나가 온기에 녹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북경으로 떠나기 전날 밤, 다섯 살 딸을 안아주던 아빠와 보낸 마지막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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