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41화 (42/386)

MISSION 02 : HANDCARRY (19)

5월 23일

마투피 남동쪽 45km 지점

친 주, 미얀마

나무 그늘에 누워있던 완은 한규호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그가 오는 쪽을 바라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괜찮아?”

다가온 한규호가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완은 힘겹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몸을 일으키려는 완의 의지와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스로 일으킨 상체가 중력에 의해 다시 땅으로 내려가려 하는 그 순간, 그녀의 등을 한규호가 팔을 넣어 받쳤다.

“안 괜찮은데?”

한규호가 말했다.

“.....미안해요.”

완이 말했다.

“우선 뭐라도 먹고. 그리고 쉬는 게 좋겠어.”

한규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토끼는커녕 뱀 한 마리도 안보이더군. 고도가 높아지니까, 뱀 자식들도 여기는 못 사나봐.”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찾아온 것들을 그녀 앞에 널어 놓았다.

작고 말라 씨앗인지 과실인지 모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열매 약간, 새알 두 개, 그리고 땅 속에서 막 뽑았는지 흙도 채 털지 않은 식물의 뿌리.

“자.”

한규호는 새 알 하나를 소매에 슥슥 닦아 그녀에게 넘겼다.

계란보다는 작고, 메추리알보다는 조금 큰 새알을 받아 그녀는 어금니로 살짝 물어서 깬 후 목으로 넘겼다.

비릿한 맛이 그녀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순간 욕지기가 넘어오는 것을 그녀는 참았다.

새알은 영양학적으로 보면 완벽하다. 귀중한 새알을, 게다가 그가 힘들게 구해온 이 새알을 단순히 맛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게워낼 수는 없다.

“하나 더.”

한규호는 남은 알 하나를 더 그녀에게 건넸다.

“..... 당신은?”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먹어두라고.”

한규호는 남아있는 마지막 알 하나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 알들을 받아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비릿함을 참고 목으로 넘겼다.

완이 새알을 먹는 것을 지켜본 후 한규호는 열매 하나를 반으로 쪼갠 다음 입에 넣고 몇 번 씹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생각한 것보다 더 쓰고, 더 떫었고 더 단단한 과육을 삼키기 위해서 한규호는 한참을 씹어야했다.

먹어도 괜찮겠군

치명적인 독이나, 알러지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었다면 그의 혀나 위장이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그저 ‘더럽게 맛없음’ 신호만을 그에게 알려왔다.

“이거. 먹으면 좀 괜찮아질 거야.”

그는 남은 열매 반쪽을 완에게 넘겼다.

입에 남아 감도는 비릿함에 괴로워하던 완은 열매를 받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의 말대로 비릿함은 없어졌다.

아니, 미각을 느끼는 모든 세포가 진동할만한 쓴맛과 떫은맛이 비릿함을 덮어버렸다.

“어때 괜찮지?”

한규호가 웃으며 말했다.

“..... 먹어도 되는 건가요?”

“음. 괜찮아. 그냥 맛없는 것일 뿐, 죽지는 않을 거야.”

“.......”

완은 말없이 열매를 씹었다. 그리고 겨우 넘겼다.

맛? 지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영양을 보충하는 것이 급선무니까.

열매를 넘겨준 한규호는 흙이 잔뜩 묻어있는 뿌리를 땅에 내리쳐 적당히 흙을 털어낸 후, 두 손으로 잡고, 세로로 결을 따라 뜯어냈다.

그러자 안쪽에 새하얀 뿌리 속살이 드러났다.

한규호는 최대한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뿌리의 속살을 따로 분리해 입에 넣고 씹었다.

그의 예상대로 칡이었다.

현재는 칡즙 등의 자양강장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칡은 구황작물이었다. 보릿고개 세대만 해도, 끼니로 칡을 갈아 만든 칡죽이나, 갈분으로 만든 갈분떡으로 춘궁기를 버텨내곤 했다. 뿌리에 녹말 성분이 많아 부족한 탄수화물도 섭취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뿌리는 한의학에서 약재로도 사용한다. 칡뿌리를 의미하는 갈근(葛根)은 발한, 해열 등에 효과가 있다.

한규호는 뿌리를 통째로 뜯어 최대한 속살을 분리했다. 질긴 칡뿌리가 한규호의 손에서 종이처럼 찢겨져 나갔다.

“최대한 오래 씹어. 괜찮을 거야.”

완은 그가 건네준 뿌리를 받았다. 뿌리를 씹으라고?

뽀얀 뿌리를 받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열매보다는 덜했지만 쓴맛이 배어나왔다. 그래도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오랫동안 씹었다.

그런데 씹으면 씹을수록 쓴맛이 은은한 단맛으로 바뀌었다.

완은 고개를 들어 한규호를 보니, 그도 입 안에 뿌리를 잔뜩 넣고 껌처럼 씹고 있었다.

팔을 등 뒤로 지고 하늘을 보면서 볼을 부풀린 채 뿌리를 씹고 있는 그의 모습은 소년 같았다.

“...... 단 맛이 나네요.”

“뭐야? 칡(arrow root) 몰라?”

“..... 먹을 수 있는지는 몰랐어요.”

“먹을 수 있지. 보통은. 근데 독 있는 종도 있으니, 함부로 먹지 말라고.“

“..... 어떻게 알 수 있죠? 먹을 수 있는지?”

한규호는 그저 말없이 빙긋 웃었다. 내가 먹어보고 알아냈다고 말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먹었으면 최대한 쉬어 둬.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하니까.”

“...... 움직일 수 있을 때.....”

완은 그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으니.

“.......... 북한은.”

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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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호텔 사이캇

스테이션 로드, 치타공, 방글라데시

코트라(KOTRA)의 콜카타 해외무역관의 물류담당관, 그리고 국가정보원 4급 남아시아 2팀장 곽용신은 스스로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왜. 하필 이곳으로 숙소를 잡았을까?

조금만 더 생각할 것을, 왜 멍청하게 이 곳으로 숙소를 잡았을까?

치타공 구역(Old station) 옆에 위차한 사이캇 호텔 303호 창 밖에는 15면이 넘어가는 철로를 가득 메운 열차들이 보였다.

새로운 치타공역이 문을 연 이후, 한때 치타공의 중심지였던 이 곳은 기차가 대기하는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본능, 외진 곳을 찾아 사람의 눈을 피하려는 그놈의 정보요원의 본능에 따라 구도심에 있는 호텔을 잡았는데, 밤새도록 경적소리가, 50년은 넘었을 것 같은 디젤열차의 우렁찬 경적소리가 자신을 괴롭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빠~~~앙.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의 클락션 소리마저도 열차의 경적 소리에 묻혀버릴 정도로 그 소리는 온 천지를 진동했다.

“아.....”

이번은 좋지 않은데,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온 천지를 진동하는 기차의 경적 소리를 뚫고 알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블랙베리에서 만든 구형 PDA를 꺼냈다. 그리고 몇 가지 보안절차를 거쳐 메일함을 열었다.

(탄치로 이동, 상구강(江) 슬로우보트 터미널에 거점 구축 25일까지.).

“탄치? 망할 놈의 탄치는 또 어디야.”

곽용신은 투덜거리며 지도 어플을 실행시켰다.

“탄치... 탄치... 탄치라.... 탄치..... 이런 젠장.”

그의 눈에 방글라데시-미얀마 국경 인근에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치타공에서 남동쪽, 방글라데시와 자연적 경계가 되는 산맥에 있는 도시다.

그는 거리를 재봤다. 직선 거리로는 89km.

N1 도로를 타고가다 N108, Z1811 도로를 차례로 갈아타면서 마지막 산악도로까지 타고 간다면 최소 100km의 거리에, 아무리 빨라도 4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거리를 5시간동안 시달려서 가야 하다니!

“아! 이런! 제기랄! 젠장!!”

빠앙~

그 순간 또 경적이 울렸다.

“시끄러워!”

곽용신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그러나 경적의 잔향에 묻혀 그 소리는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는 꽝 소리가 나게 창문을 닫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프다고 할까? 뎅기열? 모기? 조류독감? 메르스? 아무튼 아무거나 걸려서 아프다고 할까?

아니지. 아플까? 지금 호텔을 나가서 카르나풀리 강물을 한모금 떠 마시면 바로 아프지 않을까? 갠지스강보다 깨끗하다고 해도, 탈나기엔 충분할 정도로 오염돼 있을 텐데.

아니지. 그냥 수돗물 좀 마시면 되지 않을까? 마시고 한 한 시간 누워있으면 대장내시경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좍좍 쏟아낼 텐데.

하릴없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형님! 나 좆됐슈!”

뉴델리에 있는 4급 후배. 전화를 건 그가 연결되자마자 소리쳤다.

“왜? 뭔데?”

“나 지금 캘커타요.”

캘커타? 곽용신의 근무지? 거긴 왜?

“왜?”

“시발 어제 갑자기 긴급연락으로 치타공으로 가라지 뭡니까? 뭔 일인지도 안 알려주고, 그냥 막 가랍니다. 형님. 같이 갑시다. 형님 혼자 캘커타에서 꿀 빨지 말고 우리 같이 다녀옵시다. 형님 나 좀 살려 줘요.”

“.........야”

“형님 치타공 가봤어요? 진짜 거긴 정말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니까요. 내가 거기 한번 가  보고 그 다음에 뉴델리 다시 갔더니 뉴델리는 무슨 뉴욕같더란 말입니다. 사람들 졸라 친절하고, 질서 있고. 뉴델리가!!”

“야. 잠깐만.”

“근데 저보고 치타공에 가랍니다. 씨발. 이거 뭔가 좆되가는 느낌이 있어요! 확실히. 아나 씨발.”

“내 말 좀 들어봐 봐.”

“형님. 나 좀 살려주쇼. 같이 갑시다. 응? 형님. 지금 어디에요? 같이..”

“비행기는?.”

“같이 갈.... 네?”

“비행기는 뭐 타고 가는데?”

“.....비행기요? 그.... 방글라-US 에어웨이즈 항공인데요....”

곽용신은 그 말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괜찮군.”

“뭐가요?”

“기억해라. 치타공에 도착하면 올드스테이션 근처 스테이션 로드에 있는 사이캇 호텔을 잡아. 그리고 303호로 달라고 해.”

“네? 어디요?”

“올드스테이션, 사이캇 호텔, 시에라, 알파, 인디아, 킬로, 알파, 탱고(Saikat). 다시 시에라, 알파, 인디아, 킬로, 알파, 탱고.”

“시...시에라, 알파, 인디아, 킬로, 알파, 태...탱고.”

“절대 잊지마. 303호야.”

“303호... 알겠습니다. 근데 형님. 그러면 지금....”

곽용신은 전화를 끊었다. 미소를 머금으며.

하지만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니다.

그는 재빠르게 미소를 지우고, 생각했다.

뉴델리에 있는 녀석까지 불렀다? 이정도면 남아시아에서 가용가능한 인원은 다 쓰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탄치. 지금 그곳에서 뭔가가 있다.

곽용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빠앙~

다시 창 밖으로 경적이 울렸다.

“흠.... 좋은 밤 되시게. 후배.”

그는 짐가방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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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마투피 남동쪽 45km 지점

친 주, 미얀마

“.......... 북한은.”

완이 입을 열었다.

한규호는 칡뿌리를 씹으면서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완은 한 손에 칡뿌리를 든 채로 발 끝 어딘가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북한은..... 해외에 있는 외화벌이 공작원들에게서 달러를 벌어들이죠. 문제는 그 달러가 바로 북한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미국이 역추적하면 결국 그 공작원들이 노출될 테니까요.”

한규호는 씹을 수 있을 만큼 씹은 후 남은 가장 질긴 칡의 심부분을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웅큼의 칡을 입에 넣었다.

“공작원이 노출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지금 정권에게는 달러가 끊기는 것이 더 큰 문제죠. 그래서 그들은 돈 세탁을 위해 식양의.... 제가 가진 네트워크에 접근했어요.”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식으로든 북한이 관련돼 있다는 원청의 의심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죠. 돈 세탁 과정에서 돈이 조금씩 샜어요.”

“샜다고?”

“돈 세탁에는 여러 사람이 만든 여러 절차가 있어요. 몇 단계를 걸치면서 조금씩 돈이 새죠.”

“수수료 같은 건가?”

“그렇기도 하고, 어떤 이들의 욕심이기도 하고.”

“그렇군.”

“일종의 비공식 절차, 관례, 관습 같은 것이니까 다들 크게 신경 안쓰는 부분이죠. 그런데 이번엔 문제가 발생했어요.”

“어떤 문제지?”

“북한에서 세탁한 돈의 일부가 수수료 명목으로 빠져나가 위구르로 들어갔어요. 정확히 말하면 ETIM으로 들어갔어요.”

“ETIM?”

한규호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1933년 국공내전을 틈타 건국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1949년 다시 중국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후 지하에서 암약하고 있는 분리독립무장단체.

한규호는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북한의 돈이 세탁 과정에서 새어 나와 소수민족 독립운동 단체로 흘러들어갔다?

소수민족 분리독립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 입장에서 알게 된다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한방에 끝장낼 수도 있다는 소문이 지금 그 실체를 드러냈다.

“그래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 자금 중 일부가 그 쪽으로 흘러들어갔어요. 중국은 아주 불같이 화를 냈고, 북한 측에서는 자신들이 의도한게 아니라고 해명해야 했어요. 여러 명의 북한 고위급이 북경을 찾았죠.”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갔겠군.”

“자세한건 몰라요. 하지만 중국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저 그 돈이 그리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대중화의 이름으로 철퇴를 내릴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에게 피해는 없었나?”

“..... 그건 전대 식양의 활동 시기에 있었던 일이었죠. 그리고 그....녀도 그 일로 피해를 입지 않았어요. 처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죠. 누군지 몰랐으니까.”

“한 사람은 알고 있다고.”

“알고 있었죠. 하지만 그때 그는......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3대 식양이 누구인지는 알아도,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그런 것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죠. 더군다나 식양이 문제가 생기면 그에게도 문제가 생기니까. 그는 그저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차기식양을 빨리 키워 3대 식양을 대체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했어요.”

“구 교수,”

“맞아요. 그.... 사람이요.”

한규호는 이제 퍼즐이 다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 이 정보를 원청에게만 알리면 밥값은 하게 되는 것이다.

식양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식양의 정체를 찾았고, 무엇보다 원청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실체를 알게 됐으니.

“그런데... 그 사실을, 북한이 식양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다른 나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기밀 중의 기밀이었을 텐데. 소수민족 관련 사안은.”

한규호가 물었다.

그 말에 완은 살짝 웃음 지었다. 소녀 같은 웃음이었다.

“제가 흘렸어요.”

“흘렸다고?”

“네.”

한규호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이 짓을. 창녀짓도,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척 하는 행동도, 자신들도 모르게 식양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도. 모두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양의 가치는 정보와 노하우를 독점하는데 있어요. 전대 식양을 죽여야 다음 식양이 되는 거죠. 저는 3대 식양을 죽이러 갔고, 그리고 그 동안에 있었던 모든 사실을 들었어요. 그녀가 처음 발탁되고, 몸을 팔고, 인도네시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중국 정부가 화교들이 죽도록 내버려 둔 사실을! 전부를!”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한규호는 아무런 말없이, 행동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한 어투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쉬고 싶다 했어요. 제 손으로 그녀를 죽였죠. 그게 2년 전이었어요. 그리고 식양으로서, 그리고 보이기론 MSS의 하급 요원으로서 1년을 지내면서 식양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요.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구 교수를 죽였죠. 이제 식양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도록.”

그러고서는 한규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을 흘렸죠. 이제 식양에 대해 알 수 없고, 컨트롤 할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식양이라는 이름이 돌면 중국정부는 분명히 그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 후 전 적당히 하급요원으로 활동하다 그만두거나, 아니면 사라지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왔고. ”

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규호의 눈을 보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당신을 죽여 그 곳에서 벗어나려 했었어요.”

“....... 그랬군.”

한규호는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웃기네요. 정체를 감추고 싶어서, 그래서 직접 이 손으로 나를 아는 두 사람을 죽였는데, 내가 죽이려 했던 사람에게, 그리고 나를 살리려 하는 사람에게 정체를 알리다니. 뭐 이젠 상관없어요.”

“..... 상관없다니.”

“규호..... 당신. 혼자서 마투피까지 갈 수 있나요?”

한규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답해줘요. 갈 수 있나요?”

한규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데리고 갈 수 있나요? 움직일 수 없는 저를?”

한규호는 망설였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 솔직한 대답 고마워요.”

완은 한규호의 침묵을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제가 해줄 이야긴 다 해줬어요. 이제 가세요.”

완이 말했다.

“...... 잠깐만.”

“가.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완의 말투가 변했다. 차갑게. 냉혹하게.

마치 그 동안 국가를 위해 몸과 영혼을 깎아가며 희생해야 했던 전대 식양의 영혼들이 그녀에게 빙의된 것처럼.

“가. 나는 움직이지 않아. 당신도 요원이라면 알겠지? 현명하게 행동해. 이제 꺼져.”

그녀는 그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누워있던 그 자리에 다시 몸을 눕혔다.

한규호가 음식을 구해오기 전의 모습으로.

한규호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팔을 가슴에 올린 채로 누워있었다.

한규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몸을 돌렸다.

누워있는 그녀의 귀로 점점 멀어져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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