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6화 (37/386)

MISSION 02 : HANDCARRY (14)

5월 18일

만달레이 지방군 사령부

만달레이. 미얀마

태국 국가정보부 2급 요원 야닌 윗미따난(ญาณิน วิสมิตะนันทน์)은 만달레이 지방군 사령부에서 30대의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루 륀(Lu Lwin) 대령.

만달레이 주와 샨주의 영주인 루 바(Lu ba) 장군의 장남이자, 향후 이곳의 지배자가 될 사람.

“정리해 보겠습니다.”

루 륀 대령은 그의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말했다.

“우선 당장 중요한 것은 흔적을 찾는 일이겠군요. 일반적인 행군거리를 생각해본다면 하루 40km. 그런데 산악지역을 통과해야 하고, 20대 여자도 있으니 최대로 잡아도 30km 정도가 될 것 같군요.”

루 륀 대령은 지도에서 완과 한규호가 트럭을 버린 국경근처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했을 때, 산지는 최대한 피한다고 생각하고, 평지를 따라 간다고 하면, 결국 방향은 이쪽이 되겠군요.”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로이코를 기점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럼 1차 목적지는 칼로일 가능성이 높군요. 거기는 외국인도 많으니까 숨기도 좋고.”

야닌은 루 륀의 분석에 속으로 감탄했다.

욕심많은 군벌의 멍청한 아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감각이 있었다.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칼로까지 도착했을 것 같지는 않고, 대충 이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루 륀의 손가락은 로이코와 칼로를 연결하는 54번 도로, 완과 한규호가 밤새도록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 도로 위에서 선을 긋고 있었다.

“그럴까요? 그럼 이곳에 검문소를 배치할 건가요?”

야닌은 루 륀의 분석에 경탄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은 그게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차량을 탈취했을 수도 있고, 무리해서 행군 속도를 올렸을 가능성도 있으니 범위를 칼로까지 확대해 보도록 하죠.”

루 륀은 야닌의 경탄한 듯한 목소리를 들었지만 무표정하게 답했다.

“뭐. 물고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물이 성기지 않게 해야 하니까요.”

야닌은 생각을 바꿨다.

루 바. 이 지역을 지배하는 탐욕 많은 영주의 아들은 아버지와 달랐다.

그는 영특했고, 논리적이었으며, 꼼꼼하고, 그리고 매력적이다.

이 영주의 아들은 우매한 백성들을 홀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주시해야 할 대상이다.

방콕으로 돌아가게 되면 제일 먼저 그를 리스트에 올리는 일부터 해야 한다.

주요 인사 리스트에. 주요 감시대상 리스트에.

“도로를 막고, 주변 도시와 마을에 탐문을 하면 뭔가 걸릴 겁니다. 그들이 차를 훔쳐줬으면 좋겠네요. 바로 알 수 있게.”

“음... 그럼 그들이 다른 방향으로 갔으면 어떻게 하죠?”

야닌이 물었다. 궁금했다. 그가 어떻게 대답할지.

“그럼 저희로서는 손 놓을 수 밖에 없겠군요.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만달레이와 샨 주 전체를 커버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니까요. 그런 생각에 범위를 넓히는 것보다 가능성 있는 지역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야닌을 보고 씩 웃었다.

“아까 제가 말한 말을 바로 부정해버리네요.”

확정이다.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한계를 볼 줄 안다.

이 남자는 중요하다.

욕심많은 영주의 아들은 왕의 재목이다. 카리스마를 타고 태어난 왕의 재목이다.

야닌과 그녀의 조국은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를 그들의 편으로 만들지, 아니면 싹이 더 자라기 전에 베어버릴지.

야닌은 이번 방문에서 예상외의 큰 수확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대령님께서 현명한 판단 해 주실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뭐.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의 처우는 어떻게 할까요?”

루 륀 대령은 부드럽게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 남자는 생포. 여자는......”

야닌은 잠시 완을 떠올렸다.

접객팀이라 자주 볼 일은 없었지만, 인사할 때 미소가 예쁜 아가씨였다.

가끔 보이는 어두운 얼굴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특히 미소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는.... 죽여주세요. 남자만. 남자만 생포해 주세요. 최대한 다치지 않게.”

야닌은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자는 사살하는 방향으로. 시신은?”

“최대한 온전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녀를 죽여야겠다고 야닌은 결정했다.

그녀가,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가, 살아서 루 바 장군의 노리개가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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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짜욱파다웅(Kyauk Padaung) 서쪽 4km 지점.

만달레이, 미얀마.

한규호는 손목의 GPS를 확인했다.

대충 만달레이 주와 마궤 주 경계 즈음 같았다.

4일 전 칼로를 떠난 두 남녀는 며칠간의 노숙생활로 다시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칼로를 떠나 이 곳 까지 매일 40km씩 160km를 도보로 행군했다. 처음 국경을 넘어 로이코까지 행군하던 페이스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걸었다.

완은 로이코까지 행군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훨씬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했다.

행군과 휴식, 채 24시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씻고, 음식을 섭취하고, 휴식을 취했더니 체력도 보충됐고, 몸에 쌓인 피로도 풀렸다.

더군다나 2번 도로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은 로이코를 향하던 산악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평야지대였다.

한규호는 꾸준하게 하루 40km를 고집했다. 완은 조금 더 걸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말없이 한규호의 지시에 따랐다.

지금도 등 뒤로 아직 해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한규호는 발을 멈췄다.

“여기서 쉴까?”

그렇게 말하면서 한규호는 초코바 하나를 던져 주었다.

“마지막이야. 당분간 또 토끼 잡아 먹어야겠군, 아차! 소금 챙겨올걸.”

한규호도 자신의 초코바를 한입 베어 물면서 말했다.

완은 전에 그가 구워 주었던 토끼고기를 떠올렸다.

단백질 함량이 높아 살이 쫀득한 야생토끼고기.

산토끼 특유의 노린내도 나고, 그렇게 좋아하는 식감도 아닌데, 그 토끼고기는 왠지 나쁘지 않았다.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요원이 되면 제일 먼저 배우는 내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왜곡됐을까.

어떤 렌즈가 그 기억을 왜곡하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남았나요?”

완은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마투피까지 한 200km 정도? 여기 주 경계만 지나면 바로 2번 도로니까, 거기서는 차 하나 낼름 훔쳐서 타고 가자고. 마투피 가는길은 또 고지대니까.”

완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냥 아무일 아니라는 듯.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같은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그가 말한다.

처음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완은 그가 가볍고 즉흥적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완은 그의 의도를 의심했고, 경계했다.

지금. 그가 그렇게 말하자 완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하면 그렇게 됐다.

초코바를 다 먹고, 아쉽네. 조금 더 챙겨올걸. 소금이라도 가져올걸. 바보같이 하며 중얼거리는 그를 완은 말없이 지켜 보고 있었다.

“자자고.”

먹자. 자자.

그가 제일 많이 하는 말.

완은 남은 초코바를 입에 털어놓고 그에게 다가가 그 옆에 누웠다.

그는 이미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있었다.

잠들겠다고 생각하면 그는 잤다. 사람이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잠들었다.

그는 이제 잠들 것이다.

“자나요?”

완이 그의 옆에 누운 상태로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아니? 아직.”

한규호는 그 자세 그대로 눈도 뜨지 않고 답했다.

“........ 완(Waan)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아나요?”

한규호는 완의 이야기에 잠자려고 준비했던 몸의 준비를 풀었다.

“아니. 모르는데.”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칼로에 도착하기 얼마 전 있었던 일이 결정적이었겠지.

“완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하면 Sweet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달콤한’이라.”

“할머니가 지어 줬다고 들었어요. 이 이름은.”

“그렇군.”

“할머니는..... 손녀가 달콤한 인생을 살기를 바랬을까요?”

“그러셨겠지.”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달콤한 삶을 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할머니는 몰랐겠죠. 손녀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 뭐, 좋은 이름을 지어주신 할머니의 마음이 중요하지.”

“그래요. 마음이 중요하죠.”

한규호는 잠시 생각했다. 어떠한 말을 해 줄까 하고.

“인생이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살아갈 날?”

“예전에 읽었던 책에 나오는 말이야. 과거란 이제는 건드릴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다. 지나간 과거는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지.”

한규호는 눈을 뜨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고 있어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 그러니 내가 손 댈 수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하겠지.

완은 고개를 돌려 한규호를 바라봤다.

”미래... 미래 말이군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완에게 미래는 허락되지 않아요.”

한규호는 고개를 돌려 그런 말을 하는 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하늘 저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그런 말 말라고. 생각보다 약한 여자였군. 당신은.”

완은 대답 없이 계속 하늘을 보고 있었다.

둘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용맹한 호걸.”

한규호가 말했다.

“네?”

뜬금없는 소리에 완이 다시 한규호를 돌아 보았다.

“내 이름의 의미. 용맹한 호걸이라는 뜻이지. 용맹할 규(赳)에 호걸 호(豪)를 써서.”

“규호?”

“그래. 내 이름이야. 규호. 할아버지가 지었다는 군. 용맹한 호걸이라니... 막 태어난 아기에게 무슨 이름을 지어주신 거야.”

한규호의 투정섞인 말투에 완은 웃음이 풋 하고 나왔다.

이 남자가 왜 그런 말투를 썼는지 알 것 같아서.

“이름 그대로 컸네요. 할아버님이 미리 아셨나봐요.”

“이름 그대로 컸으면 그건 저주지. 참나.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한규호는 완에게 본명을 알려줬다.

이제 데이빗 박 이라는 이름은 둘 사이에서 의미를 잃어버렸다.

“규호.. 규호... 발음이 마음에 드네요.”

완은 그 이름을 입에서 읊은 다음 그에게 말했다.

발음이 부드러워 마음에 들었다.

한규호는 다시 눈을 뜨고 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웃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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