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12)
5월 16일
가데나 공군기지
가데나, 오키나와현, 일본
로건은 가데나 공군기지 내 급조된 상황실에 앉아 있었다.
급조된 상황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 책상 하나, 의자 몇 개,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는 상황판이 전부였지만 곧 사진과 문서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찰 것이다
로건 스미스. CIA 동북아시아지부의 부지국장은 텅 빈 방을 둘러보면서 어쩌면 더 큰 공간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트레이시의 전화를 받은 시간이 한 시간 전.
다행히 로건은 가네다 공군기지에 있었다. 정확히는 홍콩으로 가기 위해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으로 오키나와 상공은 꼬일대로 꼬여 있었다.
평상시라면 오키나와 하늘에 트래픽이 몰려도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오키나와 관제센터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비상상황에서 관제탑은 아직 이륙 전인 미군 항공기보다는 공중에서 간당간당한 연료를 태워가면서 빙빙 돌고 있는 민항기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로건의 전용기는 계속 이륙을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트레이시의 전화가 온 것이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한규호에게서.
로건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비행을 취소시켰다.
현재 상황에서 홍콩의 일정은 중요했다. 평상시라면 로건이 절대 빠지지 않을 중요한 회의가 있었다. 그러나 로건은 한규호, 임시 코드네임 스튜(Stew)가 더 중요한 토픽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이륙지연이 이제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우선 CIA 동북아시아지부장인 아이작 페리(Issac Perry)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부장인 그에게 보고를 해야 했으니까.
페리 지부장이 본국에 보고를 할 것이다.
페리에게 짧게 보고한 그는 빈 사무실 하나를 지정해 상황실로 급조했다.
그리고 부관 겸 비서에게 지금 자신의 영향력 안에서 가용한 자원들, 인력, 장비, 자금 어떤 것이든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체크할 것을 지시했다.
그 후 이 사무실에 앉아서 트레이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좋아. 생각을 정리해보자. 트레이시가 오기 전까지.
로건은 정신을 집중했다.
분명 한규호라는 그 독립요원은 가치가 있다.
지난 작전에서 보여준 놀라운 작전능력도 가치가 있다. 독립요원인 그가 가진 능력은 체스판에서 퀸과 나이트를 합쳐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홍콩 일정을 엎을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CIA 국장이, 나아가서는 백악관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로건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 때문에 저 높은 곳에서 한명의 독립요원, 일개 용병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
그리하면 그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한 선이, 이어지지 않던 선이.
지금 막 이어졌다.
홍콩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로건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벌컥
그 순간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트레이시가 들어왔다.
탱크탑의 형태를 하고 있는 스포츠 브라, 하체에 밀착해 몸매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스포츠 레깅스 차림의 트레이시가 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바로 체육관에서 온 모양이었다.
“왔군. 앉지.”
로건이 그런 트레이시를 보며 말했다.
“네.”
트레이시는 약간 거친 호흡이 실린 대답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보고하게.”
트레이시는 자신에게 말하는 로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WASP(백인 주류층) 중년 남자. 좋은 대학, 좋은 직장, 화목한 가정을 가졌을 법한 얼굴의 로건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전화가 온 건 한 시간 전. 우선 그는 도움(help)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두 명의 위장 신분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30대 후반 남성. 20대 중반 여성.”
“20대 중반 여성?”
로건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사진은 없어서 여권을 못 만들 것이라며, 2주 후 치타공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절차적으로 번거로울지는 몰라도, 형체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니까. 더군다나 CIA는 수천 개가 넘는 위장신분을 만들어 낸다. 그 분야는 그들의 전문 분야니까.
사진이 없다면 이야기가 좀 더 복잡해진다,
예전 사진 부착식 여권을 사용하던 시기였다면 위조전문가를 대동해 가서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을 붙이면 그냥 끝나는 일이었다.
지금은?
사진 전사식 전자여권의 시대다. 사진은 물론 RFID도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즉 더 복잡한 방법으로, 더 많은 전문가가, 더 오랜시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CIA니까.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외과적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수술? 외과적?”
“네.”
“왜 그게 필요한거지? 아니. 그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 외에는?”
“95라는 국가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미얀마의 국가번호입니다.”
“미얀마? 나머지 번호는....”
“정보부에 넘겨놨습니다.”
트레이시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로건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짧게 자른 머리는 헤어밴드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고, 헤어밴드도, 머리도 땀에 젖어 있었다.
어디 주립대학 풋볼 팀의 치어리더 같은 모습을 하고는 여전히 빠르고 똑똑하게 행동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가슴도 크고. 골빈 치어리더가 딱인데.
“좋아. 금방 나오겠지. 그리고?”
“연락은 제 개인 번호... 제가 걸프스트림에서 건낸 그 번호로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욕심이 너를 살렸군. 나도 살렸고. 로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 더 이상 보고 할 내용은 없습니다.”
로건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트레이시는 지옥 같던 3일을 떠올렸다.
그가 원하는 것은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모든 정보다.
“달리던 도중에 호흡이 가쁜 상태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왜 숨을 헐떡이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운동 중이었다고 말했고, 그가 그런 것으로 하자고 이야기 했습니다.”
로건의 두뇌가 순간적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한규호가 한 야한 농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머리 미녀.
좋은 조합이다. 써 먹을 수 있겠어.
“그리고?”
“없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으니까.”
“좋아. 알겠네.”
로건은 다시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좋은 조합이다.
“이제 정리해보지. 미얀마에 있던 그가 방글라데시로 향하고 있다. 누군가를 데리고 말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장신분을 요구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일을 의뢰한 어딘가는 그에게 위장신분을 제공할 여력이 안 된다. 그런데 그는 누군가를 데리고 가고 있다. 그것도 젊은 여자를.”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에 있어서 그런 일들을 가장 수월하게 해 줄 수 있는 CIA에. 맞나?”
“우리에게만 요청했는지는 모릅니다. 보험으로서 우리에게 접촉해왔을지도 모르니까요.”
트레이시는 차를 운전해 오면서 생각했던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를 로건에게 이야기했다.
자신만 알고 있을까 했지만 당분간은 로건 이 개자식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괜찮군. 그렇다면 치타공은 첫 번째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군. 인력이 많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네.”
많이 필요할 것이다. 모자란 것보다 넘치는 것이 좋지.
그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요원 한둘 쯤 죽어나가도 상관없다.
로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 12시간 안에, 이곳에 상황실을 구축할 거야. 지국장이 도쿄에서 출발하면 4시간 안에 도착할 것 같으니, 자네는 지국장 오면 지시받고 바로 치타공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게. 이리듐(전 세계에서 단일 번호를 쓰는 위성통신 시스템)을 준비해야겠군.”
“알겠습니다.”
트레이시는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커리어가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현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 전에.”
로건이 트레이시에게 말했다.
“네.”
트레이시가 긴장하며 답했다.
“좀 씻도록 하지. 자네는 볼 때 마다 냄새가 나는구만.”
로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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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CIA HQ
랭글리, 버지니아, 미국
워싱턴 DC는 이제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네일 밀러 CIA 국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아무말없이 한참을 듣고 있던 밀러 국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 우선 절차에 따라 진행하도록. 권한은 지부장.... 아니. 임시로 실장(Director)급으로.”
그렇게 말하고 밀러 국장은 전화를 끊었다.
임시 코드명 스튜(Stew). 그가 다시 나타났다.
동아시아 지부장인 아이작 페리가 직통연결로 그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그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지난 소말리아 작전에서 접촉했던 요원에게 연락이 왔고 도움을 청했다는 것. 그 뿐.
아이작의 보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국가안전부(MSS)가 최근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와 관련됐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CIA 동북아시아지부의 지부장이며, 대중국 첩보전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이작 페리가 그렇게 말했다면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소말리아 작전 이후 밀러 국장은 동아시아 지부와는 상관없이 전담 인력을 동원해 한규호를 감시했다.
그는 감시하기 힘든 인물이다. 감시 전문이라는 국장 직속 팀도 번번이 그를 놓치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완전히 한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작전에 들어갔다고 의심만 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가 동남아시아에 나타났다.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중국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에서 일을 의뢰했다면 한국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둘 중 하나다.
한국이 그를 도울 수 없는 상황이 그 첫 번째다.
한국의 정보기관인 국가정보원은 국내와 대북 사업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높은 레벨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넘어 해외로 시선을 확장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착화된 시스템, 정권에 의해 경직화된 조직체계 때문이겠지. 제대로 활동을 못하고 있다.
미국만 해도, 전 세계에 있는 한국 요원의 명단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다.
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다. 그 나라는.
좋아. 독립요원 한규호는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의 도움을 받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독립요원이라서? 국가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요원이라서?
아니. 아닐 것이다.
그의 신체능력, 밀러 국장과 CIA가 파악하고 있는 그의 신체능력이라면 그는 혼자서 활동할 수 있다.
누군가. 누군가가 같이 있다.
그래서 그는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그가 한국에 등을 돌렸다는 시나리오이다.
그가 한국에 등을 돌렸다면 당연히 미국에 손을 내밀 것이다.
얼마 전 소말리아 작전도 그렇고, 미국이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일개 독립요원인 그를 한 나라로부터, 비록 정보기관의 수준은 참혹하더라도, 하나의 국가로부터 온전하게 지켜내기에 미국만큼 힘있는 나라도 없다.
러시아?
보드카에 취한 그 불곰들이 기프티드가 뭔지 파악이나 하고 있을까?
중국?
기프티드가 뭔지 알았다면 제일 먼저 메스를 들 놈들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최고의 시나리오다.
그렇게만 된다면.
미국도 메스를 들고 그의 배를 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엄청난 계약금과 미녀들을 안겨주고 귀한 손님으로 맞이 할 수도 있는데.
밀러 국장은 생각을 마무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잘 정리된 첫 번째 보고서가 들어 올 것이다.
백악관의 늙은이를 재우지 말아야 되겠군.
잠든 대통령을 깨우는 것보다 재우지 않는 쪽이 조금이라도 현명한 판단을 할 테니까.
밀러 국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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