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11)
5월 16일
국정원 안전가옥
복정동 성남 경기도 대한민국
김형원은 전화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빠르게 세 번 말했다.
“치타공, 탄치, 상구강, 슬로우보트 터미널, 30일 전후, 2일까지.”
속으로 되뇌이지 않고, 직접 소리를 내어 말했다. 자신의 청각에 인지시켜서 전두엽의 해마체에 더욱 강하게 기억을 심기위해서.
그리고 재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앞에 앉은 김훈 원장, 옆에 있는 유만호.
김형원 그가 입고 있는 옷.
휴대전화 표면에 떠 있는 지금 시간.
김훈 원장은 김형원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20대의 풋풋하던 신참요원 김형원을 떠올렸다.
단어가 아닌 장면을 기억한다.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몇 시였는지, 누구와 함께 했는지 등의 순간을 장면으로 저장하고 가장 중요한 기억과 연계하는 기억법이다.
기록보다는 기억.
요원이 갖춰야 할 기본 자세 중 하나이며, 기본 교육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기억법이다.
“치타공, 탄치, 상구강, 슬로우보트 터미널, 30일 전후, 2일까지.”
김형원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장면으로 저장한 뒤에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이제 이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김형원의 이 모든 과정이 끝나자 유만호가 입을 열었다.
“아니. 김 과장.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고...”
“괜찮아.”
유만호가 한규호에게 정보를 알려준 김형원에게 한 마디를 하려는데 김훈 원장이 제지했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김형원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가득 묻어 있는 그의 얼굴에서 김훈은 20대의 김형원이 자꾸 떠올랐다.
“..... 한규호는 누군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현재 곁에는 없다고 했는데, 근거리에 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보관 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형원은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중요단어를 떠올렸다.
‘치타공, 탄치, 상구강, 터미널, 30일 전후’
이제 완벽하다. 이 기억은.
“식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습니다.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알아냈는지 알 수 없지만 식양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련된 인물 같습니다.”
유만호의 얼굴이 펴졌다.
징계는 피할 수 없겠지만, 한규호라는 그 독립요원이 식양에 관련된 괜찮은 정보. 아주 괜찮은 정보를 가지고만 온다면 김형원은 조직에 남을 수 있게 된다.
“그런가. 탈출을 준비해야 되겠군.”
“그렇습니다.”
김형원이 말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는 골치 아프군요.”
유만호가 말했다.
김훈 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글라데시. 정식명칭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 세계 제일의 다우지. 직물가공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빈국.
경제적 관점에서 방글라데시의 아주 높은 인구밀도는 잠재적으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보기관의 입장에서 방글라데시는 무가치했다.
물론 방글라데시에 대한 작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국 정부가 수교를 맺은 1974년 이전에, 현재 국정원이 중앙정보부, 중정이라고 불리던 시절, 북한과 서로 수교국을 많이 맺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부터 방글라데시에 작전은 있었다.
이후 80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수차례 접촉이 있었다.
결론은?
방글라데시는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정보차원에서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 했을 뿐이었다.
정보기관은 부패했다. 보안은 허술했다. 무엇보다 요원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신뢰를 형성할 수 없었다.
나라는 가난했고, 가용할 자원은 넘쳐나는 인구 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질 낮은 노동인력 뿐.
국정원은 방글라데시에 기반이 없다.
기반이 없는 그곳에서 사람 둘을 꺼내와야 한다.
“우선. 인도에 있는 애들 체크하고. 30일, 아니 늦어도 28일까지는 가 있어야 되겠군. 우선 인도나 근처에 있는 애들 중 가용할 수 있는 요원들은 빨리 치타공으로 가라고 해, 최대한 은밀하게. 중국 애들이 눈에 불을 키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유만호가 답했다.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많이 쓰면 쓸수록 작전은 편해질 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쓰면 또 그것도 문제야. 형원이가 지금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을 확인해봐. 안되면 국정원 돈이라도 쓰고,”
“알겠습니다.”
김형원이 말했다.
“하지만 잊지마. 한규호고 식양이고 나발이고. 이번 작전에서 최우선조건은 정보위원회가 노출되면 안된다는 거. 그리고 우리 식구 다치면 안된다는 것!”
김훈의 말에 유만호의 목젖이 한번 크게 울렸다.
“만약 이 두 가지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한규호가 죽든 말든 무조건 철수야.”
김훈은 그렇게 말하며 김형원을 노려보았다.
------------------------------------------------------
5월 16일
파인트리 빌리(Pine Tree Villa).
칼로(Kalaw), 샨, 미얀마
“우선. 여기 있다고 했던 사람. 죽었더군.”
한규호도 빵을 먹으면서 말했다.
“하긴. 벌써 5년 전이었는데, 그때도 약을 달고 살았으니. 안죽었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아무튼 편하게 가기는 힘들겠어.”
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게 갈 수 없게 됐다는 아쉬움 따위는 들지 않았다.
“당신은.... 그냥 요원인가?”
한규호가 갑자기 물었다.
완은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무슨....?”
“중국이 과하게 반응하고 있더군. 고작 하급 요원하나 없어진 것 뿐인데. 물론 요원이 없어졌다고 그냥 없어졌구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것 치고 반응이 너무 격렬한데.”
“.....어떤데요?”
“흠.....”
한규호는 대답대신 말을 아꼈다.
완은 섭섭함을 느낄뻔 했다. 하지만 빠르게 이해했다. 그가 말한 부분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식양... 때문일 꺼예요.”
“식양이라. 참 대단한 양반이군. 이렇게 난리들을 치는걸 보면.”
한규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때문에 귀찮아져버렸다는 듯.
“..... 식양은...”
완은 마음을 먹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이야기 해줘야 되겠다고.
식양에 대한 정보를 흘려서, 자신에 대한 가치를 높여야 하겠다고.
식양에 대해서 알려진 것보다 조금 더 이야기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인계를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를 조금 사용하기로 했다.
“아니. 나중에 듣지. 지금은 탈출이 우선이니까.”
한규호는 완의 말을 끊었다.
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필요 없다고?
지금 식양 때문에 자신을 데려가고 있는 것 아니었던가?
식양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니었던가?
그런데 필요 없다고?
완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는 지금 식양 따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비닐봉지를 뒤적거려 지도 하나를 꺼냈다.
미얀마 북부가 담겨있는 지도였다.
한규호는 그곳에서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지금 우리가 있는 칼로야.”
그리고는 손가락을 왼쪽으로 쭈욱 움직였다.
“만달레이와 네피도 사이를 가로질러 방글라데시로 들어갈 거야. 지금은 죽어버린 그 양반을 만나면 차를 하나 얻어타고 아시안하이웨이1(AH1)을 타고 가면 돌아가기는 해도 편하기는 했을 텐데. 현실적으로 힘들게 됐으니.”
그러면서 방글라데시의 주요 항만 중 하나인 치타공을 가리켰다.
“치타공 인근. 여기에서 도움을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 같아. 지금 여기에서 직선거리로는 400km 정도 되고, 시간은 2주 정도 예상하고 있지. 이것저것 포함해서 하루에 40km 정도 가면 될 거야.”
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만달레이와 네피도를 연결하는 AH1은 중요도로라서, 검문도 심하고, 차량을 몰래 탈취하기도 쉽지 않으니, 여기를 지나기까지는 그냥 걸어서 움직이자. 2번 도로를 지나면 차를 구해서 마투피까지 타고 가서.”
지도의 마투피에 멈춰있던 손가락이 움직였다.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국경에 위치한 산맥으로.
“마투피에서 한번에 국경까지 돌파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자고.”
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무리한 일정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하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아마 태국에서 움직일 것 같아.”
“태국이요?”
“그래. 내 위장신분은 태국 쪽에서 만들어 준거니까. 그쪽에서도 곤란하겠지. 중국에서 난리를 쳤을 테니. 그러니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태국에서도 바로 알았겠군요. 그녀는 카지노에 상주하다시피 하니까.”
“그녀? 그녀가 누군데?”
“본명은 모르고, 우리는 남 아줌마라고 불렀어요. 딜러를 하던.”
“딜러?”
“네. 그.... 당신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했던 그 태국 여자 딜러. 살집이 있는....”
“뭐? 그 돼지아줌마? 그 아줌마도 요원이었어?”
“.... 몰랐군요.”
“당연히 몰랐지. 그냥.... 뭐랄까... 사람 좋은 아줌만줄 알았더니... 태국 쪽 요원이었다니. 무섭구만. 무서워. 믿을 사람 하나 없구만.”
“......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뭐. 그렇군. 당신도 그렇고. 그건 그렇고. 어디 이야기해봐. 태국에서 움직인다면 어떻게 움직일까?”
한규호가 완에게 물었다.
트라이앵글에서 3년을 있었다면 그녀가 더 잘 알겠지 싶은 마음에.
“음... 저라면.....”
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 시선을 벽과 천정이 만나는 모서리로 돌렸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새벽부터, 정확히 그녀가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던 그 순간부터, 지금 막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까지 그녀는 사춘기 중학생 같은 얼굴이었다.
무언가 불만스럽고, 무언가 불안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사춘기 소녀의 얼굴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요원의 분위기가 얼굴에서 드러났다.
생각해보면 완의 얼굴표정은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분명하게 바뀌었다.
처음 자신을 만났던 방콕 공항에서의 얼굴, 자신이 졸부행세를 하던 시기에 수행직원으로서의 얼굴, 처음 그에게 입을 맞추던 그날 밤의 얼굴.
그리고 처음 그녀의 마음속 진심을 드러낸 얼굴, 온 몸이 마비된 상태로 누워 그를 바라보던 무표정한 얼굴.
같은 얼굴에 다른 영혼이 들어있는 듯 느껴졌다.
그 이후 보았던 다양한 얼굴들. 간절한 얼굴, 실망한 얼굴, 두려운 얼굴, 궁금한 얼굴.
그리고 분노한 얼굴.
한규호는 그녀에게서 다양한 얼굴을 보았다.
처음 공항에서 보았던 얼굴과 지금 다른 곳을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완의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른 영혼처럼 느껴졌다.
“제가 태국 측 정보기관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요?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하자고.”
“최악의 상황이요?”
“음. 중국 애들은 길길이 날뛰고, 그 중국 애들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약간 무리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 우선.”
완은 입을 열었다.
“우선, 미얀마에 북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군부에 협조를 요청할거예요. 민정이 들어섰다고 해도, 수십 년 동안 미얀마를 지배해 온 군부의 힘은 적지 않으니까요. 양곤이라면 몰라도, 네피도 북쪽에서는 군벌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군부 세력은 그대로라고 봐도 될 거예요.”
네피도.
미얀마의 독재자 탄 슈웨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새롭게 만든 수도.
1992년부터 20년 가량 미얀마를 무력으로 통치했던 탄 슈웨(Than Shwe)는 2005년 핀마나라는 소도시, 아니 도시라는 이름조차 어울리지 않는 내륙 지역의 조그만 곳으로 행정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006년 네피도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천도를 진행한다.
자신이 총애하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서. 점쟁이의 말을!
탄 슈웨가 실각하고 들어선 미얀마 민정정부도 그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미얀마가 부시 정부의 폭정국가 리스트에 올랐고, 미국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가 어려운 항구 도시 양곤 대신 내륙지역인 네피도로 행정수도를 옮겼다고 둘러댔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미국이 미얀마를 침공한다고?
탄 슈웨가 미쳐서 점쟁이 말을 믿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있다.
탄 슈웨가 점쟁이에 말에 따라 한 나라의 수도를 바꿀 정도의 미친놈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샨주와 카렌주에서 그의 입지는 여전하다.
아니. 미얀마에서 군부의 입지는 여전하다.
애초에 통합단결발전당(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Party)도 그 뿌리는 군부이니까.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에 2015년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야당으로 밀려 났지만, 그 영향력이 적다고는 말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더군다나 미얀마 북부라면?
군부의 힘은 여전하다.
“군부가 어떻게 도와줄까?”
“사진이 있으니, 도로마다 검문소를 깔고 탐문을 하겠죠. 그러려면 루트부터 파악해야 되겠지만. 일단 파악되면 거기에 거미줄 까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그리고?”
“우선 잡으려고 하겠죠. 잡아만 놓으면 죽이든 살리든 어려운게 아니니까. 잡아서 태국에서 원하는대로 하겠죠. 태국은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중국에 넘기겠죠.”
“우리를 추적할 수 있을까?”
“우리가 트럭을 버린 곳을 찾아냈다면 미얀마로 향했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겠죠. 그런데 방향은 쉽게 알지 못하지 않을까요?”
한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군 속도도 평소보다 빨랐으니까, 대략 하루에 45km 정도를 걸었는데, 산악지역을 통과한 것 치고는 빠른 속도니까. 추적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하지만?”
“오토바이를 탈취한 그곳에서 흔적을 발견했다면 여기 칼로까지 찾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칼로에 도착했다면 방사형으로 거미줄을 치겠죠."
한규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 혼자라면 100% 탈출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혼자가 아니라는 것. 무리를 시키면 어느 정도 성공률은 올라가겠지만, 100%를 장담하지 못한다.
“빠르게 움직여야 되겠군. 오늘 밤에 출발하자고. 새벽이 괜찮겠네. 일단은 먹어둬. 그리고 빨리 자자. 분위기가 흐려지기 전에 최대한 움직이는 게 좋겠어.”
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