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1화 (32/386)

MISSION 02 : HANDCARRY (9)

5월 16일

파인트리 빌라(Pine Tree Villa),

칼로(Kalaw), 샨, 미얀마

완은 수건을 두르고 욕실을 빠져 나왔다.

너무 오랜시간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는지, 욕실을 나오는데 온 몸에 힘이라고는 단 한줌도 남아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스스로도 과하다고 생각될 만큼 오랜 시간 공들여, 신체 어디 한 곳 물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정성스럽게 물줄기를 맞이했다.

그러고 싶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완은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싶었다.

먼저 며칠간 고된 행군 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신체 여기저기에 스며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땀을 비롯한 체액, 흙먼지와 매연, 불쾌한 더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불안한 감정을 씻어내고 싶었다.

불안한 감정.

완의 몸에 달라붙어, 그녀를 가장 불쾌하게 만든 요소가 바로 변화된 상황에 따른 불안한 감정이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한규호와의 이 관계, 둘 사이에 바뀐 상황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냈다.

꼭 그와, 거짓 이름임이 분명한 데이빗 박과 꼭 같이 움직여야 하는가?

아니다.

그가 있어야 탈출에 성공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가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 남자가 완 그녀 자신에게 필수선결요건은 아니라는 답을 얻어냈다.

그러면. 이 남자에게서 떠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서의 물음에 대한 답만큼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인 그녀 자신에게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요구했다.

그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는 대답을 스스로에게서 들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안된다고, 떠나면 안 된다고 대답한 이유는? 그 근거는?

다시 시간이 흐른 뒤 답이 들어왔다. 이유는 없다. 근거도 없다.

다만 경험이 있다.

이유도 근거도 없는 불안한 결정을 내렸던 경험.

그를 따라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경험이 지금의 근거 없는 답에 신뢰라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었다.

다시 물었다. 스스로에게.

그 선택은 잘 한 것이었을까?

이 사람을 따라 나선 것은 잘 한 선택이었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이 남자를 따라 나선 것은 잘 한 선택이라는 대답이 들렸다.

이유도, 근거도 없이.

결론은 내려졌다.

그와 함께 할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녀는 우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선택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향력 없는 그녀의 선택을 정했다.

그와 함께 할 것이다. 아직은 그와 함께 할 것이다.

그가 거부한다면?

그가 거부할 수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욕실을 나온 완은 텅 비어있는 방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는, 그가 잠시 앉았는지, 시트가 살짝 흐트러져 있기는 했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 그대로였다. 그녀가 입을 옷이 그 시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소파 옆 테이블에는 음식과 음료가 열을 맞춰 정돈되어 있었다.

간단한 조리식, 고열량 크래커, 초코바, 정체를 알 수 없는 국수, 아쿠아피나 상표가 달린 생수 몇 병, 코카콜라 캔 몇 개, 그리고 이틀간을 보낼 수 있는 다양한 물품들.

누군가가, 아마 그 트래킹 업체 직원이겠지만, 가져온 음식과 물품들이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직 그만이 없었다.

아니, 치앙마이에서 입고 온 옷도 없었다.

그와 그녀가 입고 며칠간을 달려온 옷도 방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녀는 오롯이 방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완은 마음을 다잡고 침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직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는 그녀의 머리에서 물기가 방울져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 곱게 개어져 있는 옷.

그 옷 위에 놓여 있는 직사각형의 하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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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국정원 안전가옥

복정동 성남 경기도 대한민국

“식양인가?”

김훈 원장이 유만호에게 물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식양과 관련된 인물이 아니라면 그가 저렇게 무리하게 몸을 움직일 이유가 없습니다.”

유만호가 김훈에게 말했다.

김훈 원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김형원을 보면서 물었다.

“형원이.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가 저렇게 무리하게 움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김훈의 질문에, 김형원 사장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훈 원장을 노려 볼 뿐이었다.

유만호는 대답이 들리지 않자 옆 자리에 앉은 김형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적을 보는 듯한 눈빛을 원장에게 쏘고 있는 김형원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김 과장. 원장님 질문에 답을...”

“식양이 뭡니까?”

유만호가 답을 채근하기도 전에 김형원이 원장에게 물었다.

아니 추궁했다.

“김 과장!”

유만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김형원이 상대하는 사람은 국가정보원의 수장이자, 새롭게 만들어진 정보위원회의 위원장이다.

“식양이 뭡니까?”

김형원이 다시 물었다.

“.........”

김훈 원장은 자신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오는 김형원의 눈빛과 목소리를 정면에서 받으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발산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 과장! 지금 원장님 앞에서 무례하게 뭐 하는 거야!”

유만호가 김형원에게 말했다.

김형원의 고향후배이면서, 국정원 후배이기도 한 유만호는 지금 그 보다 한급수가 더 높았다. 지금 위치에서 그가 상관이다. 그렇기에 상관으로서 지금 김형원을 말려야 했다.

“만호. 넌 가만히 있어.”

김형원은 김훈 원장에게 눈빛을 고정한 채로 씹어삼키듯 말했다.

“식양이 뭐냐 물었습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을 무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확보하라는 명을 받았고, 그렇게 전달했는데, 지금 현장요원과, 현장요원을 연결하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식양이 뭡니까?”

김형원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김형원!”

유만호가 소리쳤다.

말려야 한다.

지금 여기. 눈앞에서 폭주하는 부하를, 막 입사한 새끼 요원이던 시절 자신을 보살피던 선배를, 고향에서 꼬막무침에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던 형님을 말려야 한다.

“유 단장. 괜찮아.”

김훈 원장이 유만호를 말렸다.

김형원은 유만호는 마치 이 방에 없는 사람처럼 김훈만을 보고 있었다. 그저 김훈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더....”

김형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얼마나 더 요원들이 죽어나가야 정보로 장난치는 개짓거리를 그만둘거지?”

김훈 원장은 김형원의 말에 분노가 중첩되는 것을 느꼈다.

“누구지? 누구의 생각이지?”

“뭐가 말인가.”

김훈 원장이 말했다.

“식양인지 나발인지, 정보를 숨기고, 현장요원을 그곳으로 보내야겠다는 개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지?”

김형원의 마음에는 지금 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정보기관의 정점에 서있는 국가정보원 원장, 그리고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정보위원회 위원장, 또한 김형원에게 있어서는 하늘 같은 선배인 김훈 원장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김형원!”

유만호가 김형원의 멱살을 잡았다.

말려야 한다. 지금 이 폭주하는 형님 개자식을 말려야 한다.

“대답해!”

김형원은 자신의 멱살을 움켜 쥔 유만호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김훈 원장을 향해 소리쳤다.

김훈은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김형원을 보면서 옛 생각을 떠 올렸다.

김형원이 지금처럼 자신을 향해 소리치던 프라하의 그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 자식은 변한 게 없군.

저 불같은 성격 때문에, 승진도 못하고 후배에게 추월당했다.

김훈은 그게 싫지 않았다.

김형원을 정보위원회 창립 멤버로 선택한 것도 김훈 원장 자신이었으니까.

“식양은.”

김훈 원장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신에게 고함치는 사람이 누가 마지막이었는지, 언제였는지 기억을 떠올리면서.

“식양은 MSS의 대(對) 동남아시아 요원이야.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미-중 수교 즈음 이후, 중국이 만리장성을 넘어 국제세계로 눈을 돌렸을 때, 정확히 국내 불만인사들을 때려잡는데 만족하던 MSS가 CIA애들에게 개망신을 당한 이후 만들어진 중화네트워크의 동남아 쪽 핵심이지.”

언제였더라. 기억도 안 난다. 마지막으로 고함을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

“동남아 쪽이라 우리하고는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식양이라는 개자식 덕분에 우리는 동남아에서 여러 번 물을 먹었지. 특히 경제 분야에서 여러 번 물을 먹었어. 사인 직전까지 간 계약이 몇 번이나 어그러졌지. 일본도 비슷하고.”

유만호는 김형원의 멱살을 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그도 김훈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일본이야 돈이 많았으니, 우리보다 최소 10배는 많은 ODA(공적개발원조)를 퍼부어가면서 동남아에 네트워크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뭐 돈이 있나, 실력이 있나. 요원들을 갈아가면서 동남아에 뭘 만들어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지. 우리는, 아니 지금은 나뿐이군. 현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튼 당시 우리는 이게 전부 식양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고.”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과 아주 가까운 시기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 중 한명은 저 놈, 김형원이었다.

“식양의 실체는 몰라. 조직인지, 개인인지, 개인이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우리는 물론, 일본과 미국도 식양을 알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부었지만, 그 실체는 모르는 것 같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 왜 지금에 와서 그게 문제가 된 것입니까?”

김형원이 날카로운 눈빛을 유지한 채 물었다.

“북한하고 관련이 있었거든. 일본에서 넘어온 이야긴데, 뭐, 우리도 조금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식양이 동남아 쪽에서 북한 일을 조금 해준 것 같더군. 아마도 돈세탁이었겠지. 그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발생했어.”

김훈은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김형원에게 내밀었다.

김형원은 그 담배를 받아 깊게 빨아들였다. 옆에 있던 유만호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돈이야 항상 문제가 생기고, 돈세탁이야 거의 100%의 확률로 문제가 발생하지.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문제는 단순한 게 아닌 것 같았어. 북경과 평양의 통신량이 급격하게 증가했고, 특사가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지. 특히 북한 권력서열 10위 안에 있는 인물 중 6명이 북경에서 보였어. 북한이 뭔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였지.”

북한과 관련된 문제라면 국정원의 최우선 관심사항 중 하나이다. 정보위원회도 마찬가지이고.

“문제는 확실하지 않으니까. 실제로 문제가 발생한 것은 같은데, 문제가 뭔지, 어디서 시작됐는지, 동남아에 뭐가 있는지. 무엇보다도.”

김훈은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는 김형원을 마주 쏘아보며 말했다.

“기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곳에 우리 직원을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우리 식구가 또 죽어나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친구를 보냈지.”

“정보는...”

“정보를 감추는 것은 내 결정이네. 우리 식구였다면 지금 내가 아는 사실들을 전부 알고 갔을 거야. 그런데 한규호 그 친구는 우리 식구가 아니니까. 가서 냄새만 맡아오거나, 아니면 좀 흔들고 오거나. 아니면 시체가 되어서 돌아와도 괜찮겠지.”

“언제까지!”

김형원이 다시 소리쳤다. 그런데 바로 김훈의 외침에 막혔다.

“김형원! 고착화되고 경직화된 조직 때문에 요원들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만들어진 것이 정보위원회다. 정보위원회가 보호하려는 가치는 우리 조직이야! 용병 따위가 아니야!”

김훈의 고함에 김형원은 말을 잃었다.

원장의 말이 옳다.

한규호는 그저 독립요원일 뿐이고, 정보위원회는 그를 활용할 뿐이지, 보호할 의무가 없다. 독립요원은 그런 존재다.

그러나 김형원은 원장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규호는 그저 그런 독립요원이 아니다. 김형원도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특별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형원아. 니가 어떤 의미로 지금 이런 말을 하는지 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너도 이제 장기를 두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장기를 두는 사람. 장기말을 옮기는 사람.

“장기를 두는 사람은 장기말을 옮길 때 말이다.”

“잠시만요.”

김형원이 김훈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르는 번호가, 아니, +95로 시작하는 익숙하지 않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김형원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여보세요."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이! 김부장!”

모두의 눈이 김형원이 들고 있는 전화기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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