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30화 (31/386)

MISSION 02 : HANDCARRY (7)

5월 16일

5번 도로, 핀 뤙(Pinlaung) 외곽 4km 지점

샨 주, 미얀마

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보이지 않는 한규호의 얼굴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뿐.

한규호는 그 얼굴을 보고 사춘기 중학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불만스럽고, 그러면서도 뭔가 불안하고.

“어쩔꺼야?”

한규호가 입을 열었다.

“.........”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냥 떠나면 되겠네. 싫다는 걸 내가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참나. 너무하는구만.”

완은 또 하나의 모순이 생기는 것을 알았다.

식양. 이 남자는 식양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나?

그 정보 때문에 카지노에 와서 그 돈을 써댄 것 아닌가?

“...... 내가 가면 식양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필요 없어.”

한규호는 완의 말을 잘랐다.

“네?”

“그딴 정보 필요없다고. 정보가 필요해서 내가 당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라고 생각하나?”

한규호가 말했다.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의뢰를 받았고, 많은 돈이 들어갔다. 김형원은 결과를 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결과를 내면 더 좋은 것이다.

어찌 됐건, 김형원도 모른다던 이름, 식양이라는 이름을 알아 낸 것만 해도 한규호에게는 수확이다.

의뢰인인 원청이 이정도로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그래봤자 그를 어쩔 수 없으니.

“........”

완은 지금 한규호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원한 것은 식양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자신을 구출하려고 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 어떠한 목적으로?

목적이나 실익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적어도 요원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좋아. 어디까지 그 어리광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겠지만, 헤어지기 전 마지막 선물로 알려주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지? 고향도 아닌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냐고.”

한규호는 손목에 달린 GPS를 완쪽으로 내밀며, 어둠 속에서도 충분이 보일만큼 가까이 내밀면서 말했다.

“내 손목에는 GPS가 있고, 내 머릿속에는 좌표가 있으니까.”

완의 눈이 다시 커졌다.

“1도가 틀어지면 1킬로미터에 9m가 어긋난다고 했나? 아주 똑똑하시군. 하지만 틀려. 정확히 8.72m 차이가 나지. 100km의 거리면 단순 계산으로도 872m가 어긋나고.”

한규호는 아예 기를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이번 기회에 완전하게 우위를 점하기로 마음 먹었다.

“각도가 커지면 그 오차는 급격하게 늘어나는데 어떻게 헤매지 않고 찾아왔냐고? 로이코시의 북쪽, 그러니까 내가 처음 차량을 확보할 만한 곳으로 생각한 곳의 위치가 위도 19.7685, 경도 97.2107 이야.”

그걸 어떻게 알지? 완이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규호는 설명을 계속했다.

“어떻게 아냐고? 그날 우리가 처음 치앙마이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그날 외웠으니까. 설마 저 숫자 외운 것도 의심스럽나?”

완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국경을 넘어 처음 야영한 곳의 위치가 19.6얼마, 97.8 얼마였어. 이제 아주 단순해지지. 좌표를 외워놓은 로이코 북쪽 지점까지 위도는 아주 미세하게 증가하고, 경도는 줄어들면 되니까. 당신은 그저 내 발끝만 바라보면서 걸어왔으니 모르겠지만 나는 중간중간 이 GPS를 보면서 체크했으니까 어긋날 일이 없지. 이제 이해가 됐나?”

완은 자신이 걸을 때 단 한 번도 그를 살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발만 보고 따라 갔을 뿐.

“칼로까지 한 60km 남은 것을 어떻게 아냐고? 지도도 없이?”

한규호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위도 20도 지점에서 경도 1도의 거리가 약 115km야. 그리고 다음 목적지인 칼로 서쪽 삼거리, 위도 20.6433, 경도 96.6099. 이건 내가 먼저 외우고 있는 거고. 지금 위치 20,0505, 96.8009. 이건 GPS로 확인 가능한 위치고.”

한규호는 GPS를 완의 얼굴 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완은 그의 몸짓에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지금 방향이 북북서, 거의 북쪽에 가까우니까 살짝 기울어져 있다고 치고, 그래서 대충 60km 정도 남았다고 이야기 한 거고. 왜? 이게 이상한가? 이게 잘못된 건가? 이제 설명해줬으니 나를 믿을 수 있나?”

완은 얼이 빠져있었다.

지금 이 남자가 한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니, 맞는지, 아닌지는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반박할 수도 없다.

“믿을 수가 없다고, 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지? 자 이제는 믿을 수 있나? 아니, 아직 못 믿나? 또 뭘 해명해줘야 하지? 당신이 잠든 사이에 토끼는 어떻게 잡아왔는지, 요리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왜 소금은 왜 안 챙겨왔는지 설명해주면 믿음이 좀 가겠나?”

한규호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완전하게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반쯤 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이 그의 생각을 뒷받침했다.

“다 필요없어. 참나. 너무 자연스러워서 못 믿겠다는 사람을 도와주겠다고 비행기 1등석을 걷어차고 이 고생을 하다니. 제기랄!”

그렇게 말하고 한규호는 완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 이제 당신 차례야.

어디. 잘못했지만 사과하기에는 자존심 상해서 주저하는 사춘기 여중생 같은 아가씨.

어디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

완은 한규호가 어둠속에서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기척을 느꼈다.

그 순간 그가 그녀에게서 완전히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한 말은 전부 옳았다.

그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고, 그런 그에게 탈출을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제와서 너무 믿음직한 모습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거기에 대해 그가 해명해주었다.

어떠한 관점에서 봐도 그가 옳고, 그녀가 틀렸다. 그녀가 잘못했다.

그가 몸을 돌리자, 그 순간 그녀는 그가 떠나갈 것임을 알았다.

“잠깐만요!”

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떠나가려는 그 등에 멈춰달라고.

한규호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로 씩 웃었다.

이겼다. 이것으로 승기는 넘어왔다고 확신했다.

“잠깐... 잠깐만요.....”

완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한규호는 완전한 굳히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을 무시한 채로 천천히 오토바이로 걸어갔다. 엔진은 적당히 식어 있었다.

한규호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공랭식 단기통 엔진이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달려줄 것이다.

완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도 오토바이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은 그녀가 자초한 것이다. 그는 떠나가라고 말했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떠나가려는 그를 그저 바라만 볼 뿐.

“뭐해? 타라고. 해뜨기전에 칼로에 도착해야 하니까. 거기서 각자 갈 길 가자고.”

시동을 건 한규호가 말했다. 그리고 뛰어오는 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둠속에서 살짝 미소 지었다.

승리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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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프라이멀 리조트

트라이앵글 미얀마 지역

제이크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 둘 만 아는 이야기를 하자는 말입니다.”

“둘 만 아는 이야기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과 내가 아는데, 어찌 둘만 아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소?”

징춘이 말했다.

“하늘과 땅은 알아도 상관없습니다. 입이 없으니까요.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가 귀하에게 득이 됐으면 득이 됐지, 실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징춘은 앞의 남자가 의심스러웠다.

세상에 실이 없이 득만 있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 바보같은 이야기는 카지노에서 돈과 영혼을 깎아먹는 바보들에게나 어울릴 말이다.

“들어나 봅시다.”

징춘이 말했다. 그 말에 제이크는 웃음을 보였다.

“미얀마에 저희 측 선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가진 카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징춘은 제이크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귀로는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전부 귀담아 들으면서, 그의 눈을 보았다.

“귀국의 요원이 있으니 어차피 찾기는 찾으셔야 하는데, 제가 가진 그 카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나.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왜 나에게 득이 되지? 당신에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데?”

“우선 신세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이번 실수에 대한 저희의 작은 보상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제가 귀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저에게도 작은 득이 될 수 있겠지요.”

“............... 어떻게 나에게 득이 되는지는 이야기 안 했는데.”

징춘이 그에게 답을 재촉했다.

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그의 결정이다. 이야기나 들어보는 거지.

“지금부터 드리는 이야기는 그냥 제 혼잣말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만약 그 한국인 혼자 사라졌다 한다면, 제가 귀하의 입장이었다면 그냥 적당한 정보조작으로 없는 일로 만들거나, 별것 아닌 사안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귀국의 요원 중 한명이 관여돼 있다는 것이죠.”

제이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어투로 말했다.

“문제는 발생했습니다. 이 사실은 바꿀 수 없죠. 그렇다면? 발생한 문제가 만들 수 있는 여파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어떻게? 최대한 내 손안에서 해결해야죠. 그런데 어렵습니다. 왜?”

“내 손이 닿지 않는 지역이니까.”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국이었다면, 태국 안에서 방콕 쪽으로 움직였다면, 잘못한 저희를 닦달할 수도 있을 텐데, 라오스 쪽이었다면, 중국입김이 잘 작용하는 라오스였다면, 또 방법이 있었을텐데. 하필 미얀마일까.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저라면.”

“.........”

“참 웃기는 나라죠. 군부독재가 오랜 기간 계속되고, 결국 민주화라는 이름하에 정권이 수립하기는 했는데, 그럼에도 군부의 세력은 아직 그대로고. 무엇보다 서방세계의 지지를 받아 민주화 정권을 수립해놓고는 소수민족 탄압으로 그 지지를 자기 발로 차버리고 말이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 쪽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습니다. 그 카드를 이용하면 문제를 최소화 할 수는 있겠죠.”

“어떻게?”

“시체 두 구, 또는 한 구.”

“두 구는 알겠는데, 한 구는?”

“마찬가지로 저의 혼잣말입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눈 앞에 물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중국 측 직원이 죽는다면, 그 죄를 한국 놈에게 다 덮어씌울 수 있고, 한국 쪽에는 그놈이 중국 요원을 해쳤다해도 되고, 중국 여인을 간살(姦殺)했다고 압박하는 카드로 쓸 수도 있고. 또 혹시라도 뭔가를 알고 있다면 알아내기도 쉽고, 어찌됐건 하급 요원 하나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 낼 수 있다.”

징춘은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에 있어서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미쳤군. 당신.”

그러나 그 마음을 표현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징춘은 소리장도가 떠올랐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전국시대 병법가인 손자의 병법 36계 중 적전계의 10계.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어 상대의 환심을 사는 병법.

소리장도의 완성은 의도된 호의로 인해 의심을 없앴을 때이다.

징춘은 의심을 멈출 생각은 없다. 호의만 받고, 의심은 계속하면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미쳤군. 당신. 지금 나보고 부하 직원의 목숨을 활용하라는 것인가? 당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걸 내가 받아 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건가?

징춘은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에게 웃어 보였다.

“뭐. 다양한 시나리오 중 하나입니다.”

이 중국놈이 지금 자신의 손을 잡았다. 미소로 긍정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약삭빠르게, 자기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았다.

개자식이라고, 아주 노련한 개자식이라고 제이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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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02 : HANDCARRY (8) + 알리는 글

5월 16일

국정원 안전가옥

복정동 성남 경기도 대한민국

“지금 장난하는 거야?”

국가정보원 해외정보실장 모용진이 책상을 내리쳤다.

모용진, 1급 실장이며, 해외정보실의 수장을 맡고 있는 그가 지금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누군가 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도 부하 직원이.

모용진 실장이 찢어죽일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소파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사람.

국정원 2급 단장 유만호, 그리고 3급 과장 김형원이다.

“어떻게 된 거지? 왜 해외정보실장인 나도 모르는 해외 작전이 있는 거야!”

모 실장이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모용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태국 국가정보부가 보낸 공식 항의, 그리고 중국 국가안전부에서 보내온 비공식적인 협박의 원인에 대해서 모용진, 국정원 해외정보실장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문제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두 사람, 그것도 본부가 아니라 각각 위장 파견 나간 부하들이 자신이 모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좀 진정하시죠.”

국정원 2급 단장이면서, 대한장비협회 상근 부회장으로 위장하고 있는 유만호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모 실장은 더욱 화가 났다. 그가 보기에 매우 불손한 태도였으니까.

“유만호 너 이 자식. 뭐라고 했어?”

“진정하시라고 했습니다.”

유만호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진정? 진정하라고? 지금 그게 나에게 할 소리야?”

“그렇게 소리 지른다고 뭐 될게 안 되고, 안될게 되는거 아니니까. 조금만 진정하시라고요. 어차피 제가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장님 오셔야 뭐가 진행되도 진행될 것 아닙니까?”

모용진 실장은 기가 막혔다.

1급인 그, 2급인 유만호의 사이에는 강이 흐른다.

그 강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 피를 온 몸에 뒤집어 쓰며 그 강을 건넌 사람만이 1급에 오를 수 있다.

모용진은 그 피를 뒤집어 쓴 사람이다.

평생을 국가를 위해서 피를 흘리고, 흘리게 하고, 닦아내는 일을 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 2급인 유만호는 일급차에 불과한 급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부하일 뿐이다.

그런데 고작 2급에 불과한 유만호가, 더군다나 본부에서 제대로 발붙이지도 못해서 한직으로 밀려나 있는 유만호가 자신에게 저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만으로도 불손함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것이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원장님 오셨습니다.”

직원 하나가 문을 열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국정원 원장이 들어왔다.

“앉아있어.”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모용진 실장은 국장의 소리에 멈칫했다. 그리고 원장이 왔음에도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말해봐.”

김훈 원장. 군 출신도, 검찰출신도 아닌 내부 승진으로 원장 자리에 오른 국정원의 신화는 소파에 앉으면서 바로 입을 열었다.

“태국에서 공식적으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 쪽에서 요청해 만든 위장신분이.....”

원장의 말에 모용진이 답했다. 그러나 그 말은 바로 끊겼다.

“아니. 실장 말고. 우선 형원이.”

김훈 원장은 모실장 대신 이 방에서 가장 직급도, 역할도 보잘 것 없는 김형원을 지목했다. 모 실장의 커진 눈이 김형원을 향했다.

“마지막 연락은 누군가를 확보했고, 자력으로 움직이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언제?”

“11일입니다.”

“4일 전이군. 그 이후는?”

“연락은 없습니다.”

“모 실장.”

“네? 네.”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며 듣던 모용진 실장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국장의 말에 당황해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태국애들이 뭐라는가?”

“..... 우리가 요청해 위장신분을 제공한 사람이 중국 쪽 시설에서 사람을 납치해갔다면서...”

모용진은 말을 하면서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춰 나갔다.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 원장은 알고, 그리고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부품들은 아는 누군가가.

“항의와 더불어 사실확인을 요청해왔습니다.”

“사실 확인? 우리 요원이 맞냐고 물었겠지.”

“맞습니다. 그래서 사태를 파악중이라고 답변한 상태입니다.”

저 김형원이라는 놈이 하는 이야기를 태국 쪽 이야기와 맞춰보니 대충 답이 나왔다.

모용진은 확신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인물이 자신이 모르는 어떤 작전을 진행 중이다. 원장의 지휘 아래.

“중국애들은?”

원장이 물었다.

“중국 쪽에서는.....”

모용진은 원장의 눈치를 살폈다. 유만호와 김형원이 있는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괜찮네. 말하게.”

원장이 말했다.

“...... 중국 쪽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접촉해 왔습니다. 빠르게 원상태로 복구하지 않으면....”

“않으면?”

“.... 중국 내 있는 요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모용진이 말했다.

“MSS가 파악한 우리 쪽 요원이 얼마나 되지? 검은 애들만.”

원장이 물었다. 백색요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요원들을 건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 기피인물)로 지정하고 추방하는 정도겠지만, 외교문제까지 감안한다면 그 자체도 쉽지 않다.

문제는 블랙요원들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당수가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모용진은 얼굴을 붉혔다.

김형원은 모용진이 얼굴을 붉히는 이유를 알았다.

요원이 노출됐다는 사실은 요원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이것이 지금 국정원 해외 정보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너무 노출이 많이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모용진은 모르는 정보위원회다.

“최대한 빠르게 전부 불러들이도록 하지.”

“전....부 말입니까?”

모용진이 되물었다.

김훈 원장은 살짝 짜증이 났다. 20대에 국정원에 들어와 평생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이 자식은 지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

요즘 말로 고인물이다. 국정원 해외정보실을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고인물 중 하나가 바로 모용진이다.

“..... 우선 전부 불러들이게. 조직이 살짝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무너지지는 않겠지. 중국에는 뭔가 줄 만한 것을 찾아보고. 중국의 조직은 새로 짜야겠네.”

조직을 새로 짤 때, 모용진은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우선 알겠네. 본부에서 다시 이야기 하지.”

김훈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원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용진에게 모였다.

“......... 먼저 본부로 가 있게.”

김훈 원장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해외정보실 실장을 바꿔야겠다고.

“......... 알겠습니다.”

모용진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배제된다는 모욕감, 부끄러움, 그리고 자신을 배제한 원장과 수하들에 대한 분노.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모용진은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지금의 이 기분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모용진이 나가자 김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만호를 보며 말했다.

“식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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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파인트리 빌라(Pine Tree Villa),

칼로(Kalaw), 샨, 미얀마

한규호는 허리에 수건만 두른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국에서 차를 버리고 처음 행군을 시작했을 때는 호텔이고 리조트고 다 필요없다. 이 해방감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며칠 노숙했다고 침대에 누웠더니 이 안락함이 좋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0시가 막 넘은 시간, 태양은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암막커튼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태양빛이 방 안의 먼지들을 희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그도 피곤을 느꼈다. 며칠간 산지를 행군했고, 노숙하면서 현장에서 얻은 음식으로 대충 허기만 면했다. 특히 어제 밤새도록 오토바이를 타고 오면서 엔진이 열에 녹아 붙어버릴까 신경쓴 탓일까.

뭐 그래도 지금 당장 100km를 10시간에 주파하라고 하면 콧노래를 부르며 갈 수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두 팔로 머리를 괴고 누워 눈을 감았다.

커튼 사이로 살짝 들어오는 태양빛, 샤워를 마친 후 살짝 달아 오른 피부, 열심히 돌아가며 시원한 바람을 내뿜어 그 피부를 식혀주는 에어컨, 그리고 문 너머로 들려오는 샤워기 소리.

완은 샤워실에 들어가고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뭐. 여자들은 원래 오래 씻기도 하고, 며칠간 노숙까지 했으니 더 깨끗하게 씻고 싶겠지.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완의 나신을 상상했다.

“참.. 예쁘긴 예쁜데 말이지.”

그 완벽한 형태와 탄력의 가슴,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그 라인, 그리고 특히 그 엉덩이. 위에서 내려다 봤을 때, 완벽한 사과 모양을 보여주는 그 엉덩이.

한규호는 자신의 분신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교감신경도 통제할 수 있는 그이지만, 그냥 부풀어 오르게 두었다.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허리에 묶은 샤워타월을 다시 한 번 질끈 동여매고 문을 열었다.

4시간 전, 한규호는 결국 해가 살짝 뜨고 나서야 칼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가 뜨기 전에 시내로 접어들고 싶었지만, 오토바이는 지구 자전의 속도를 이겨내지 못했다.

한규호는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퍼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잘 버텨줘서 조금 늦기는 했지만 칼로 시내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칼로(Kalaw).

미얀마가 버마이던 시절, 이 곳을 식민지배하던 영국관리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산간 피서지로 조성한 이 마을은 이제 명실상부한 미얀마 중부 트래킹 관광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미얀마 정부의 허가를 받을 필요 없이 1박 트래킹이 가능한 이 도시는 중국인 단체가 오기 전에 최대한 즐겨두자는 생각으로 찾아오는 유럽 트래킹족은 물론, 영국 식민시대에 건설인력으로 미얀마로 넘어와 정착한 인도, 방글라데시인들, 구루카 족, 토착민족인 샨족을 비롯한 여러인종들로 가득한 국제관광도시가 된 것이다.

칼로의 메인스트리트, 고작 2차선 도로 양 쪽에 단층 건물들이 빼곡히 늘어선 볼품없는 거리이지만, 칼로 고산 트래킹 관광의 시작이자 끝인 칼로 메인스트리트 한쪽에 오토바이를 세운 한규호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저 멀리 도로 끝 쪽에 사리탑이 눈에 들어왔다.

금과 은색의 유리 모자이크로 만든 칼로의 랜드마크.

완은 그런 한규호 뒤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규호는 몸을 풀면서도 그런 그녀의 눈빛을 눈치채고 있었다.

오토바이 뒤에서 평소보다 더 강한 힘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는 그녀의 팔에서 이미 그는 주도권을 쥐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규호는 천천히 메인 도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완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규호는 천천히 걸어가며 트래킹 업체들을 살펴봤다.

이미 새벽 출발팀을 한번 보냈는지, 아침인데도 가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는 피곤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한규호는 천천히 걷다가 KBZ은행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티비를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남자, 실제로는 아직 35밖에 안됐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칼로의 중심가인 민스트리트(Min St.)에서 트레킹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쿵(Kung)은 어떤 남자가 들어오며 자신을 비추던 기분 좋은 아침햇살이 가려지는 것을 느꼈다.

새벽같이 일어나 유럽과 일본에서 온 몇 명을 묶어 봉고를 태워 보냈다.

조금 이른 아침을 먹고, 점심이 되어서 밤새 술과 대마초에 취해 느즈막히 일어난 양키들이 거리로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기 전까지 그는 여유있는 오전을 즐길 상황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타났고, 햇빛을 가려버렸다.

“Need help? sir?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선생님)”

한규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박혀 있는 100달러 짜리 지폐 세장이 천천히 그의 손에 의해 테이블 위에 놓인다.

그리고 한규호는 쿵이 300달러의 돈을 인지할 충분한 시간을 준 후 말한다.

“2 night. Villa or Bungalow. with Bathtube. Air conditioning, Not the fan.”

(2박. 빌라나 방갈루, 욕조, 에어컨 있는 곳으로. 선풍기는 안되고.).

쿵은 300달러를 인지했다. 그리고 이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Need hotel Sir? Here’s many many very good hotel.”

(호텔을 원하십니까 손님. 여기 정말 좋은 호텔이 많습니다.).

“Not the Hotel. Place What Privacy guaranteed.”

(호텔 말고. 독립적이고 은밀한 장소.).

한규호의 대답에 쿵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제서야 그의 뒤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역광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트래킹 복장을 하고 있었다.

좋다. 트래킹 복장을 한 두 남녀가 찾아와 은밀하고 조용하고, 하지만 시설은 나쁘지 않은 독립된 숙소를 원한다.

아주 좋은 손님이다. 팁이 후한 좋은 손님이 될 가능성이 높다.

“Ok. I’ll find it. Passport Please.”

(알겠습니다. 한번 찾아보죠. 여권 주세요.).

한규호는 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었다. 그리고 100달러 짜리 지폐를 한 장 더 꺼냈다.

쿵은 그의 손에 들린 100달러 지폐를 보았다. 여권 대신 100달러. 합당한 가격이다.

하지만 쉽사리 손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 남자 뒤에 몇 발자국 떨어져 서있는 여자를 보았다.

사람이 두 명이면 여권도 두 개여야 합니다. 그런 시선으로.

한규호는 쿵의 시선을 따라가 뒤에 있는 완을 보았다.

완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불안한 여중생 같은 모습으로.

한규호는 다시 쿵을 바라보면서 약간 분한 눈빛으로 주머니에서 백달러 지폐를 한 장 더 꺼냈다.

그제서야 쿵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새롭게 그의 눈 앞에 나타난 두 장의 벤자민 프랭클린을 영접하기 위해서.

쿵의 손이 막 닿으려던 찰나, 돈을 쥔 한규호의 손이 살짝 뒤로 멀어졌다.

한규호의 한 장의 지폐를 더 꺼내어 3장의 백달러 지폐를 들고 말했다.

“Clothings for Changing. Foods, snacks, beers, etc for 2 night.”

(갈아입을 옷. 음식, 간식, 맥주, 기타 등등 이틀간 쓸 용품).

그리고는 뒤를 돌아 완을 보고 다시 앞을 보고 말했다.

“for 2 person.”

(두 사람 분.).

잠깐 멎었던 쿵의 손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한규호의 손에 들려져 있던 세장의 지폐를 잡았다.

“No problem Sir. Welcome To Kalaw.”

(문제 없습니다. 칼로에 오시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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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자 쿵이 커다란 봉지 두 개를 한규호에게 건내줬다.

“대충 필요한 것은 다 챙겨왔습니다만, 혹시 부족하신 게 있으시면 이리로 연락 주십시오 손님.”

쿵은 명함을 건네면서 활짝 웃어보였다.

“고맙군.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하지.”

한규호는 명함을 받으며 그에게 말했다.

쿵은 들려오는 샤워기 소리에 반응하며 시선을 욕실 쪽으로 살짝 돌렸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한규호에게 말했다

“그럼. 좋은시간 되시길.”

한규호는 문을 닫고 그가 건넨 봉지를 살펴 보았다.

커다란 20개 들이 콘돔상자가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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