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2 : HANDCARRY (2)
5월 12일
샹그릴라 호텔 치앙마이
치앙마이, 태국
헬리콥터가 옥상에 위치한 헬리포트에 착륙하자 5인승으로 개조한 헬리콥터에서 두 사람의 남녀가 바람을 피해 몸을 굽혀 내렸다.
두 남녀가 내리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다가갔다.
“환영합니다. 미스터 박. 미스 완. 어서 오십시오. 샹그릴라 호텔 치앙마이에.”
남자의 환영 인사를 여자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총지배인님. 저희 리조트의 VIP이신 데이빗 박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총지배인이라고 불린 남자는 데이빗 박이라고 소개 받은 한규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흘간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는 그 인사를 가벼운 목례로 받았다. 총지배인의 정중한 인사에 비해 성의 없는 모습이었다.
“모시겠습니다.”
총지배인은 그런 그의 태도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그 둘을 안내했다.
둘을 내려준 헬기는 그대로 이륙했다. 그렇게 떠난 헬기는 이틀 후, 다시 이곳에 올 것이다. 두 사람과 백만 달러를 가지러.
총지배인을 따라온 두 사람은 로터스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여기에서도 한규호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일이 없었다. 체크인의 모든 절차가 이미 끝나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총지배인 에릭입니다.”
총지배인이 다시 인사했다.
총지배인 에릭는 샹그릴라 호텔 체인의 총지배인들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총지배인 평균 나이보다 젊은 그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 하나인 치앙마이지점의 총지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보는 그만의 감각 덕분이었다.
데이빗 박. 태국 투자청에서 초청한 귀빈이라는 이 남자는 하이클래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돈 많은 졸부나 졸부 2세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인상, 귀찮아하는 행동과 말투 그리고 옆에 있는 여성에게 가끔 보여주는 거만한 모습 등이 전형적인 졸부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옆에 있는 완이라는 여자가 오히려 상류사회에 더 잘 어울렸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 표정, 말 그리고 그 행동거지나 모습 전부 다 기품 있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총지배인님.”
인사하는 모습도 그의 마음에 꼭 들었다. 호텔업에 종사하는 입장에서 스카웃 하고 싶을 정도로.
“트래킹 복장은 준비가 되었는지요?”
제롬은 어젯 밤 늦게 연락을 받았다. 샹그릴라 본사가 있는 홍콩에서 온 연락이었다.
골든트라이엥글 접경지역에 있는 카지노에서 VIP가 2박을 묵으러 올 것이니 스위트룸을 확보해 놓을 것. 트래킹을 한다고 하니 속옷부터 풀 세팅을 마련해 놓을 것. 신발도 구비해 놓을 것.
다행히도 로터스 스위트도 하나 남아 있었다. 트래킹용 복장도 치앙마이 지역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인 센트럴페스티벌, 일명 센탄에서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아침에 개장 하기도 전에 그쪽 구매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급하게 구했다.
세계적인 호텔체인 샹그릴라의 위상은 작지 않으니까. 특히 이곳 치앙마이에서 르 메르디앙과 더불어 단 둘 뿐인 최고급 호텔인 샹그릴라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나.
“네. 남녀 각 한 벌씩 옷장에 마련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데이빗 박이 여자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우선 좀 룸서비스부터 부탁드리겠습니다. 식사를 하시고 휴식을 취하시고 싶으시답니다.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에릭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한게 있으시면 전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담 컨시어지가 24시간 대기하고 있으며, 물론 저에게 직접 연락주셔도 괜찮습니다. 외출하신다면 차량을 준비해놓겠습니다.”
지배인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이제 그 공간에는 둘만이 남아 있었다.
단 둘만이 남자 완은 방 곳곳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도청기나 카메라가 있을 법한 곳을.
“없어. 여긴.”
여전히 침대에 벌렁 누운 한규호가 말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죠?”
완이 그런 한규호에게 물었다.
“알아. 그냥 알아. 난.”
한규호가 답했다.
완은 한규호의 저 근거없는 자신감의 원천이 궁금했다. 하긴. 그런 완 본인도 한규호의 그 근거없는 말, 자신을 데려갈 수 있다는 그 말을 믿고 지금 이 곳에 왔지만.
“흠. 알겠어요. 그래도 한번 더 확인해 볼게요.”
“그러시던가.”
완은 오랜 시간을 들여 방과 거실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녀에게도 딱히 걸리는 무언가는 없었다.
“없는 것 같네요.”
완이 말했다.
한규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 상태로 대답 없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어쩌죠?”
완이 누워있는 한규호에게 다가가 물었다.
“밥 오면 밥 먹고.”
“그리고 나서는요?”
“자야지. 자자고.”
한규호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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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프라이멀 카지노
트라이앵글 미얀마 지역
“치앙마이?”
카지노에서 딜러로 위장하고 있는 태국 국가정보부 소속 2급 요원 야닌 윗미따난은 동료 직원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놀라 반문했다.
“그렇다니까요. 총알 챙긴다고 치앙마이에 갔다고 하더라고요.”
완에게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가 하룻밤에 10만달러를 날렸다고 알려준 그녀가 이번에는 그들이 헬기를 타고 돈을 가지러 치앙마이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자기는 그거 어떻게 알았어?”
“오늘 아침에 출근하는데 그 사람이랑 완이랑 같이 헬기타러 가더라구요. 근데 캐리어도 없고 작은 가방만 하나 들고 가길래, 어딜 가나 싶어서 여기저기 물어봤죠.”
“.... 자기 그러다 큰일 나.”
카지노에서 손님의 신원이나 행방은 중요한 정보이다. 일개 딜러가 알려고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워낙 수다스럽고, 발이 넓은 그녀는 그런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알아요. 언니. 조심하고 있어요.”
“.... 근데 어떻게 알았대? 치앙마이 가는 거는?”
“그 남자가 방에서 또 난동을 부렸나보더라구요. 그래서 객실팀에서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들었다고.”
“그리고 자기가 또 우연히 듣고?”
“그렇죠. 우연히. 호호.”
야닌은 한 귀로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정보조직의 요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녀로써는 정보의 부재와 정보의 모순이 가장 괴로웠다. 본능적으로 모르는 사실, 서로 상충하는 사실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지금 데이빗 박이라는 남자는 그 두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요원. 그가 요원만 아니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저 무례하고, 천박하고, 멍청한 도박꾼에 불과할 뿐, 그녀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요원이고, 그의 위장신분을 만들 때, 야닌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치앙마이 어디로 갔대?”
그 남자가 입힌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한참을 떠들던 야닌의 직장동료는 야닌의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뭐 샹그릴라나 르 메르디앙 아닐까요?”
“아. 맞다. 남편에게 전화해야 하는데. 깜빡했다.”
야닌은 그녀의 말을 끊고 전화기를 들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사람을 붙여야 되겠어. 느낌이 뭔가 이상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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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샹그릴라 호텔 치앙마이
치앙마이, 태국
13일 밤, 시계의 시침이 막 숫자 12를 향해가는 시점에 완은 눈을 떴다.
호텔에 체크인 하고, 룸서비스로 밥을 먹고 내내 잠을 잤다.
완이 본 남자는 말 그대로 잠만 잤다.
“자야지. 자자고.”
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마치 팔을 들어 올리듯, 눈을 감듯, 주먹을 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완은 기가 막혔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긴, 죽다 살아났는데, 아니,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온이 떨어지고 몸이 경직되고 동공까지 풀렸는데, 그럼에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는데.
자고 싶을 때 바로 잠드는 것쯤은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완도 그의 옆에 누워서 잠을 잤다. 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막 자정 되어가는 시간에 완은 눈을 떴다.
이제 하루가 지나갔으니, 그들에게는 약 32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골든트라이앵글로 돌아가야 한다.
완의 입장에서는 탈출 루트도 이야기하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그는 도무지 움직임이 없다. 전혀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규호를 보고 완은 애가 탔다.
그를 믿어도 될까?
완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그가 눈을 떴다.
완은 깜짝 놀랐다. 하필 그를 의심하고 있을 때, 그가 눈을 뜬 것이다.
“왜? 놀랐어?”
놀란 자신을 보고 빙긋 웃는 남자를 보는 순간 완은 생각했다. 자신의 의심이 이 남자를 깨운 것은 아닐까?
근거도 없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의심이 무형의 화살이 되어 그를 깨운 것이 아닐까.
“........”
완은 조용히 있었다. 어떤 말이든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흠. 예전에 친절하던 때가 그립군,”
“네?”
“아니야. 뭐 좀 먹자. 밥 시키라고.”
한규호는 기지개를 피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체크인 하고 바로 배를 채운 다음, 지금까지 잤다. 그리고 완이 애가 타는지도 모르는 듯, 그는 또 밥을 먹자고 했다.
완은 수화기를 들고 룸서비스를 요청했다.
룸 서비스가 방으로 배달되자, 완은 직원에게 팁으로 천 바트 지폐를 지불하고, 내일 정오가 지나서 찾으러 오라고 말했다.
2kg은 넘어보이는 T본 스테이크, 커다란 새우가 들어간 크림소스 스파게티, 시저샐러드, 계란프라이를 추가한 태국식 복음밥 카오팟 꿍. 그리고 치킨 & 비프 사테까지.
두 사람이 먹기에는 많은 양이 배달 됐다.
“먹고, 출발할테니까. 든든히 먹어두라고. 당분간 제대로 된 식사는 못할테니까.”
완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말했다.
“지금이요?”
완은 시계를 봤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도망가는건 기본이 밤이지. 야반도주 몰라?”
“........차를 준비시킬까요?”
“바보야? 도망갈껀데? 저희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차를 춘비시켜 주세요. 그리고 저희 도망간거 알게되면, 이 차 추적해오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할까?”
“......... 그럼 어떻게 갈꺼죠?”
“걸어서.”
“네?”
완은 귀를 의심했다.
“도망은 자고로 걷고 뛰고 해야 제맛이지.”
한규호는 커다랗게 볶음밥을 입에 떠넣으면서 말했다.
완은 입맛이 없었다. 지금 시간은 무언가를 먹기에 적당한 시간이 아니었고, 그녀의 위장과 뇌는 그리 음식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은 한규호의 말을 듣고서 먹어둬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T자 모양의 뼈에서 큼지막하게 고기를 잘라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옷 갈아입자.”
짧지만 엄청난 양의 식사가 끝나고 한규호는 그렇게 말했다.
옷장 안에는 트래킹용 복장과 신발이 남녀 각 한 벌씩 들어있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나요?.”
“그래. 지금.”
한규호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술술 벗어 던졌다.
이 남자는 계획한 것일까? 아니면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일까?
완은 계속 그를 의심하고 지켜봤지만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항상 이랬다.
탈출하겠다고 결정 할 때도, 치앙마이로 목적지를 정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식사를 주문할 때도, 마치 계획된 것처럼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행동했다.
지금도 그렇다. 마치 시간표라도 있는 것처럼 밥을 먹고 나서 옷을 벗어 던졌다. 계획했을까? 아니면 지금 바로 결정한 것일까?
그는 완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도망가겠다고만 이야기했을 뿐, 걸어서.
그런 생각을 하던 완은 천천히 한규호 옆으로 다가가 옷을 벗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행동할 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수 없는 신뢰감.
그 말도 안되는 확률에 완은 베팅을 했다. 모든 것을 걸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불 꺼진 방,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도시의 야경빛에 그녀의 나신이 따라 흘렀다. 곡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한규호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그저 자신의 옷을 입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속옷, 양말, 상하의는 물론 트래킹화까지 모두 신고 나서야 완을 보았다.
완은 브래지어를 벗고, 스포츠 브라를 막 입고 있었다.
스포츠 브라를 입기 위해 팔을 들었을 때, 적당한 크기와 완벽한 모양을 갖춘 그녀의 가슴이 살짝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한규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순간 욕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목적을 가지고 몸을 허락한 여자,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 그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도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했던 여자.
그럼에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가슴을 가지고 있는 여자.
“훗.”
한규호는 웃었다. 그 상황에서도 가슴을 보고 있는 스스로가 웃겨서.
“왜 웃죠?”
“옻나무(Lacquer tree)를 아나?”
“옻나무요?”
그녀는 옷을 입으며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생각했다.
“그래. 옻나무.”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옻나무 수액으로 하는 옻칠은 동아시아는 물로, 동남아시아에서도 전통적 공예로 인정받고 있으니.
“알고 있어요. 갑자기 그건 왜?”
“있었나? 집에 옻칠한 가구가?”
“흠.. 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어요. 그런 비싼 가구가 있을리 없죠.”
“그렇군. 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건 아니고. 옻이 오르는 걸 아나?”
“옻중독(Lacquer poison)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 사람마다 좀 다르긴 한데, 자네는 옻이 올라본 적 있나?”
“아니요. 저는 없어요. 옻나무를 본적은 있지만 그런 기억은 없어요.”
스포츠 브라를 다 입은 그녀는 스커트의 지퍼를 내려 스커트가 스스로 흘러 내리게 한 다음, 자신의 두 손을 허리춤에 껴서 팬티도 벗었다.
실크재질로 만들어진 그녀의 팬티는 행군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옻나무에는 우루시올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이 사람에 닿으면 피부 면역체계에 흡수가 되는거지. 그렇게 흡수된 우루시올은 림프관을 타고 몸 전체로 돌아다니면서 독성물질을 만들어 내는거야. 그래서 피부가 뒤집어지지. 이걸 옻독이 오른다고 하는거지. 어릴 때 한번 옻나무 있는데서 굴렀다가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경험이 있었거든.”
“..... 그런데요?”
그녀는 양 발에 면 팬티를 끼고, 무릎 위 적당한 위치까지 끌어 올린다음, 팬티라이너를 꺼내 면 팬티 위에 부착했다.
먼길을 떠날 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한번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옻나무만 봐도 끔찍한 기분이 들지. 심한 사람은 옻이라는 글자만 봐도 피부가 뒤집어지고 한다더군. 나도 그 경험 이후에 한동안 옻이 보이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
“그렇군요.”
이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그런데, 성인이 되고 우연히 옻나무 순을 먹어보게 됐지. 그저 나무의 순일 뿐인데, 그 부드러운 식감과 감칠맛 그리고 온 세상이 온통 옻순의 향으로 가득해지는 느낌. 아주 충격적인 경험이었어.”
완은 바지를 입고, 허리 벨트를 단단히 조였다. 룸서비스를 많이 먹었는지, 바지의 허리 부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옻순이라는 건 참 먹기가 힘들어. 당연히 귀하기도 귀하고, 시기가 너무 짧아. 조금만 일찍 따면 크기가 너무 작아 식감이 부족하고, 조금만 늦어도 뻣뻣하고 독이 배지. 하지만 한번 그 맛을 보면, 그 다음부터는 옻이 오를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옻순을 따러 가는거지.”
완은 신발까지 전부 다 신었다. 이제 그녀도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당신 가슴을 보는데 옻순이 떠오르더군. 나를 죽이려 했던 여자의 가슴을 보는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만지고 싶고,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옻순을 잘못 먹으면 옻이 오르고, 재수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제철이 되면 옻순을 따러 가는 것처럼, 당신 가슴을 보고,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참 아름다운 가슴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웃겨서 웃었지. 그 뿐이야.”
한규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뭐해? 가자고.”
그리고는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완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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