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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티드-21화 (22/386)

MISSION 02 : TBD (14)

5월 10일

프라이멀 리조트

트라이앵글 미얀마 지역

한규호는 결정을 내렸다.

“흠. 뭐. 그렇게 나오시는군. 뻔뻔하기도 하지.”

한규호는 두 팔로 머리를 벤 그 상태 그대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뻔뻔하다뇨?”

“사람을 죽이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니가 어쩔껀데. 배째라 이거 아냐?”

“...........”

“뭐 믿고 못 믿고, 그런 게 중요한건 아니지. 할 말 없으면 어쩔 수 없고.”

완은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 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떠한 수단을 동원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뭐. 알겠으니까. 빨리 비행기표나 잡아달라고. 집에 가게.”

“네?”

“비행기표. 인천 가는 비행기. 최대한 빨리.”

완은 당황했다. 그냥 가겠다고? 이러고 그냥 간다고?

그의 모습은 요원의 생리와 맞지 않다. 아마 완이 그가 처음 찾아낸 단서였을 것이다. 그녀를 협박하든 매수하든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것이 맞았다.

아니,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매수? 협박? 아무런 준비 없이?

차라리 안전하게 몸을 빼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들통 난 요원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위험에 노출되니까. 어떻게든 안전하게 몸을 빼내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 아무 일 없다는 듯 항공편을 재촉하고 있다. 그냥 단순한 해프닝인 듯 집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

“왜? 이제 다 들켰으니까 보살펴 주는 것도 끝인가? 집에 가는 것도 직접 하라 이건가?”

완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자, 한규호는 투덜거렸다.

과자를 못 먹게 된 어린 아이처럼 투덜투덜댔다.

이 남자는 다르다.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난다.

그는 죽는다. 완이 그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는 확실하게 죽는다.

간단하다. 비행기를 예약한다고 방을 나가서 징춘에게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보고하면 된다. 그러면 징춘이 그를 잡아다 알고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문을 할 테고, 그 끝에는 죽음이라는 선택지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녀가 방을 나가는 사이에 그가 몸을 피한다?

불가능하다. 그에게 있어서 여기는 적진 한가운데, 더군다나 이 곳은 인접한 3국의 법보다 자본과 폭력이 더욱 더 힘을 발휘하는 골든트라이앵글이다.

여권도, 돈도, 지원받을 인원도 없는 상황에서 그가 몸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시 같은 선택지만 남게 된다.

그럼에도 이 여유는 무엇일까?

마치 싫으면 말라는 투로, 나는 그냥 가겠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허세?

완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허세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요원의 감이, 이 남자의 태도는 허세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알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난 것인지, 아니 죽은 척 한 것인지. 언제 자신의 정채를 알았는지,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인지, 어떠한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그가 이곳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궁금하지 않나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뭐가?”

“왜 당신을 죽이려 했는지.”

그녀는 자신이 알고 싶은 것과 상반된 질문을 던졌다.

그건 한규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물어볼 줄 알았다. 어떻게 살아나게 됐는지, 어떻게 죽은 척을 한 건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흠. 궁금하긴 하지. 말해줄텐가?”

“제 질문에 답해준다면.”

“지금 나를 상대로 거래를 제안할 입장이 아닐텐데.”

한규호는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그녀가 한규호를 해치려 한 의중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꼭 알아야 할 이유도, 그 의중을 알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생각도 없었다.

끌려다니는 건 질색이니까.

그런데. 그녀의 눈. 그녀의 눈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를 보고 있는 그녀의 눈에 떠오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절함 이었다.

시간은 점심을 훌쩍 넘겨 오후로 접어 들고 있었다.

그러나 두 남녀, 완과 한규호는 방에 들어온 지 12시간이 지났음에도 단 한 발자국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슬슬. 의심을 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들어는 보지.”

한규호는 완의 눈을 보고 협상 테이블 의자를 꺼내보기로 결심했다.

꺼내만 보자. 안 앉아도 되는거니까.

“나를 데리고 여길 나갈 수 있나요?”

완이 물었다. 가장 궁금한 질문을, 그리고 가장 노골적인 질문을.

완이 자신이 가진 패 중에서 가장 중요한 패를 꺼내들었다.

배신.

완은 한규호에게 자신의 배신을 도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규호는 질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를 데려가 달라는 말, 조국을 배신하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물론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뜬금없는 타이밍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죽이려던 여자가 자신이 죽이려 한 이유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배신을 도우라고 하는 이 이상한 상황을 그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렇기에, 한규호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가능해.”

짧게 말했다.

완은 그의 대답에서 다시 한번 허세가 아님을 느꼈다.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가능하죠?”

하지만 다시 물었다. 나에게 확신을 줘. 내가 너를 믿을 수 있게.

“가능해. 내가 마음 먹으면 할 수 있어.”

“제가 탈출한 흔적을 지우는 것도 가능한가요?”

“그건 불가능해. 어디까지나 탈출만.”

남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서 완은 가능하다는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해줄 수 있나요?”

“해 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없어요.”

“..........”

그는 침묵으로 거부를 표현했다.

완은 그의 거부를 예상했다.

그래서 그가 거부했을 때, 가장 좋은 시나리오를 떠 올렸다.

옷을 입고, 방을 나가, 보고하는 것.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해 줄 수 있나요?”

완이 다시 물었다.

“해 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없어요.”

“내가 얻는 것이 있나?”

“저는 정보가 있어요.”

“정보는 누구나 있지. 어떠한 정보인지가 중요하고.”

“식양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식양. 그 이름이 둘 사이의 대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신 신분을 생각한다면 그리 대단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는군.”

여유 있는 말과는 다르게 한규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식양. 사라진 요원의 코드명이거나, 그를 지칭하는 단어일 확률이 높았다. 겨우 잡은 실마리인줄 알았더니, 역시 정보가 엮여 있었다.

한규호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인지도 모르는 이유로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첫번 째 실마리가 되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는 있었다.

“..........”

완은 한규호의 마음이 식양이라는 단어를 듣고 변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지위로 접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다. 그가 말한 대로, 그녀의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보고서에 한 글자라도 보탤 수 있다면 정보로서의 가치는 있어요.”

“들어보지.”

“지금 말씀 드릴 순 없어요.”

“그거 말고.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한규호에게 완을 데리고 갈 이유는 충분했다.

식양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녀 수준에서 알 수 있는 하찮은 정보라도 지금 그에게는 가치가 있었다.

김형원 사장이, 정확히 이 일을 의뢰한 원청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현장에서 판단하는 그에게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갈 이유를 찾기 위해, 왜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듣기로 했다.

“이곳에서 3년을 있었어요. 창녀짓을 3년간 했다면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게 내가 죽는 이유가 되는 건 납득하지 못하겠는데, 당신과 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나는 그래도 나름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좀 억울해지는군.”

“당신이 죽으면 문제가 생겨요. 태국 투자청에서 초청한 VIP가 부정맥에 의한 심장마비로 죽으면 양국에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한 트러블이 생겨요. 그러면 내가 본국으로 소환될 수 밖에 없어요.”

“흠..... 그러니까, 나를 죽여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이 장소를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것이군. 무고한 나를 죽여서 말이지.”

“맞아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이곳에서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고.”

“.............”

한규호는 그녀가 이번에도 뻔뻔하게 맞아요 어쩌구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좋아. 계속 들어보지. 나보고 데리고 나가 달라고 했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

“그 말이 진심인지 의심스럽군. 또 앞의 이야기도 조국을 배신하는데 충분하지는 않은데.”

“국민에게 창녀짓을 강요하는 국가라면 조국이라는 이름은 자격이 없어요.”

일리가 있군. 한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원이 되기로 했을 때 이미 각오한 것 아니었던가?”

“자신의 의지였다면 각오는 했겠죠. 그러나 팔려왔다면?”

일리가 있군.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있었을텐데, 고작 다리벌리는 것이 싫다는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군.”

완의 표정이 변했다. 분노. 격양된 감정으로.

“....... 영혼이 뜯겨져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영혼?”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고작’ 다리를 벌리는 것 뿐이지만, 매번 다른 사람을 만나 생글생글 웃으며 옷을 벗을 때 점점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어요. 그때마다 영혼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뜯겨 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한규호는 그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없었지만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협상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했던 당신을 내가 벗어나게 해 달라?”

완은 협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지적은 모두 옳았고, 그의 논리는 모두 맞았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는 이유가 모두 억지처럼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남은 카드는 많지 않았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완은 일어나서 가운을 벗었다.

5월 10일

프라이멀 리조트

트라이앵글 미얀마 지역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던 징춘은 짜증이 났다.

그 한국놈과 잔다고 그 방에 들어갔던 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오고, 어떻게 됐는지 보고를 하고,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방에서 내보내야 빨리 청소를 하고 다시 카메라와 도청기를 설치할텐데.

상황실 전면에 메인 스크린은 한 백인 남성을 비추고 있었다.

프랑스 측 요원임이 확인된 인물이었다.

저 놈도 식양의 냄새를 맡았을까?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일까?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어였지만 상관없다. 전부 녹음되고, 바로 번역되어서 본부로, 본토에 있는 본부로 보고가 되니까. 내용이 무엇인지는 상관없다. 요원으로 확인되면 최우선순위로 그의 모든 행동이 보고된다.

그때 문이 열리고 완이 들어왔다.

조금은 수척해보이는 표정으로.

“보고해.”

“그는 마음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자정이 되기 좀 전 시간부터 그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다 그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오늘 오후까지 4번의 정사를 치뤘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분간 게임은 멈추고, 저와 시간을 보내자고, 그냥 휴가처럼 쉬자고 권유했습니다.”

“믿던가?”

“믿는 눈치였습니다. 그는 4번째 정사가 끝나고, 항공권이 어떻게 됐는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마 예약이 되었을 것 같다고 말하며 확인해보겠다고 했고, 그는 귀국편을 3일 늦추라고 했습니다.”

“게임을 안하면 어쩌지?”

“안 할 수 없습니다.”

“하긴. 안 할 수는 없겠지.”

징춘은 단언했다. 이미 한번 도박의 쾌감에 중독된 뇌는 그 쾌감을 필연적으로 다시 원한다. 그는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카드를 들 것이다.

“뭐. 알겠어. 그 밖에 특이 사항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세부적인 부분은 보고서로 작성해 올리겠습니다.”

세부적인 사항. 그와 어떻게 전희를 시작했고, 어떤 체위로 몸을 섞었고, 어떠한 대화를 나눴고, 정사가 끝난 뒤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자세하게 서술하는 보고서.

다음에 그가 또 찾아왔을 때, 그의 취향에 따라 준비할 수 있는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물론 24시간 밀착 수행하고 있는 그녀는 그가 떠난 뒤에야 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이 있겠지만.

그래봤자 며칠이다.

“뭐. 급한 것은 아니니.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놈에게 붙어있을꺼지?”

완은 숨어들어오는 적 요원을 판별하는 일을 하는 중요한 일을 담당한다. 이미 특별할 것 없다고 밝혀진 데이빗 박에게 완을 계속 붙여 놓는 것은 자원 낭비이다.

그녀는 할 일이 많으니까.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완이 무감정하게 말했다.

“뭐.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2~3일 안에 마무리 하도록 하지. 안되면 다른 여자 붙여서라도 3일 안에 마무리 지어.”

징춘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완이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

“알겠습니다.”

완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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