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10화 (11/386)

MISSION 02 : TBD (3)

5월 2일.

가데나 공군기지

가데나, 오키나와현, 일본

CIA 동아시아 지부 요원 트레이시 테일러는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분노하고 있었다.

차를 주차한 곳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았고, 아무리 리모컨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방전인가?

이곳에 차를 주차한지 3일이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방전이 되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리모컨을 눌러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방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도난의 가능성은 없었다.

이곳은 디트로이트가 아니라 오키나와이고, 오키나와애서도 가장 경비가 삼엄한 가데나 공군기지이니까.

가데나 공군기지.

미국 제5 공군 18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는 이 공군기지는 괌 앤더슨 공군기지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전역을 커버하는 태평양 공군의 핵심 기지이다.

기지 내 주차장에서 미국 공군 마크가 붙어 있는 CIA 요원의 차량을 훔쳐간다고?

그럴 가능성은 없다.

뜨겁게 내려쬐는 오키나와의 5월 태양빛은 주차장 바닥은 물론 트레이시의 얼굴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트레이시는 기분이 나빴다.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차도 짜증났고, 주근깨를 잔뜩 만들지도 모르는 뜨거운 햇빛도 짜증났다.

무엇보다 3일 동안 이곳에 감금당해 있던 기억이 제일 짜증났다.

이 모든 짜증의 시작은 다 그 남자 때문이었다.

한규호.

트레이시는 악몽같은 지난 3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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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심문이 아닙니다. 테일러 요원의 보고서를 보완하기 위한 의무적 절차일 뿐입니다. 조금 힘드시겠지만 협조 부탁드립니다."

신뢰성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던 말로 시작된 지옥같은 3일이었다.

“테일러 요원. 확실합니까?”

눈 앞에 앉아있는 조사관은 같은 질문을 여러번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샤워도 제대로 못하면서 절차를 가장한 심문이, 질문을 가장한 괴롭힘이 끝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화번호를 준 것은.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그 남자가 뭔가 앞으로 중요한 일을 한 것 같아서, 알아두면 제 경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이유로 전화번호를 넘긴 것이라고 몇 번을 말했잖아요!”

트레이시는 후회했다.

소말리아에서 한규호를 태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잠만 자던 남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성공시킨 것 같은 그 남자는 중요해 보였다. CIA와도 이대로 끝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헤어질 때, 오산 공항에 그를 내려 줄 때, 그때 전화번호를 넘겼다.

별일 없을 줄 알았다. 자주 있던 일이었고, 설사 발각되었다 하더라도 트레이시는 요원이었고, 그 정도의 자율권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 하지 않았다.

한규호라는 남자를 내려주고, 오키나와로 복귀한 그녀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상적인, 작전 후에 작성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평범한 보고서를.

그를 태웠다. 밥을 먹였다. 기다렸다. 다시 태웠다. 내려주었다.

그런데 추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자세하게, 아주 자세하게 보완해서 다시 작성하라고.

보완할 것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서술했으니. 그런데 무엇을 다시 보완하라는 말이지?

겨우 한두 줄을 더 추가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랬더니 다시 제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상세한 보완지침과 함께.

잠을 잘 때는 어땠는지. 코를 골았는지, 이를 갈았는지. 손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라면을 먹을 때 국물을 먼저 먹었는지, 아니면 면부터 먹었는지!

그런 것이 기억이 날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트레이시는 보고라인을 통해 항의했다. 이것은 합당한 명령이 아니라고!

그랬더니 소환된 것이다!

기지 내 구석진 작은 방에서 3일간 보고서를 보완하기 위한 절차라는 명목으로 심문을 받았다. 코를 골았는지, 이를 갈았는지, 손은 어디에 뒀는지, 면부터 먹었는지, 국물부터 먹었는지.

그리고 왜 전화번호를 넘겼는지.

트레이시는 본부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할 말은 있었다.

“개인적인 호기심. 아주 작은 호감에서. 전화번호를 넘겼어요.”

이것이 패착이었다.

트레이시가 중학교 때 처음 만난 남자친구부터, 그동안 관계를 가졌던 모든 남성의 자료가 책상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취향, 그녀의 성벽,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공개됐고 확인됐다.

요원이 되면서 여자임을 잊겠다고 생각한 트레이시였지만,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결국 트레이시는 손을 들었다.

“그래요. 맞아요. 그 남자는 뭔가 계속 큰일을 맡을 것 같았어요. 그런 느낌이 강했어요. 그래서 접촉할 수 있는 요소를 남겨두고 싶었어요. 내 커리어를 위해서! 이 정도는 모든 요원이 다 하는 거 아닌가요? 요원 각자가 가진 자율권에 따라 사람들을 심어놓고, 정보를 모으고!”

트레이시는 소리를 질렀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진정하세요. 테일러 요원. 지금 이것은 심문이 아닙니다. 테일러 요원의 보고서를 보완하기 위한 의무적 절차일 뿐이에요.”

돌아오는 대답은 동일했다. 그것이 더 트레이시를 미치게 만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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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는 다시 거칠게 리모컨을 누르며 주변을 둘러 보았다.

2007년식 토요타 코롤라. 그녀가 일본에서 이용하는 쥐색 준중형 세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기만 해봐라. 우선 철판이 충분히 우그러지도록 발로 문을 걷어 차겠다고 생각하면서 트레이시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눈에, 코롤라 대신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로건 스미스. CIA 북동아시아 부지부장이었다.

“저 쪽이야.”

로건이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

트레이시는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차가 있다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평소였다면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극동아시아지부 부지부장이라는 지위는 둘째치더라도, 로건은 트레이시가 이렇게 예의없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코롤라 대신 로건이라도 걷어 차고 싶었다.

“괜찮아?”

화나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트레이시를 로건은 여유있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트레이시는 성의없게 답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3일째 갈아입지 못한 속옷이 몸에 붙어있는 느낌이 아주 끔찍했다.

그녀의 눈에 쥐색 코롤라가 들어왔다.

저기 있었군. 개같은 코롤라가.

그녀는 가까이 다가 가며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방전 된 것 같은데?”

로건이 말했다.

트레이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직접 키를 돌려 문을 열었다. 역시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방전 됐네.”

로건이 거 봐라 하는 말투로 말했다.

트레이시는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로건을 향해 던지듯 몸을 돌렸다.

“부지국장님.”

“어어? 어? 왜? 왜이래?”

“그 남자 대체 뭐에요?”

트레이시가 따지듯 물었다.

“그 자식 대체 뭐에요? 뭔데 이렇게 일이 복잡해지는거죠?”

로건은 트레이시의 양 어깨를 감쌌다.

“트레이시.”

“네.”

“일단 내 차로 가지. 옷부터 갈아입고. 냄새가 장난이 아니네.”

로건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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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테일러는 CIA 동아시아 부지부장 로건의 차에 타고 가고 있었다.

5월의 오키나와는 이미 충분히 뜨거웠다. 피부암을 유발할 것처럼 뜨거운 햇빛 아래 주차장을 헤매다 로건의 차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자 그녀는 잠깐의 상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쾌함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가진 분노를 고작 에어컨의 시원함에 상쇄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생각했다. 그 3일간, 그 골방에 갇혀 있던 3일간, 그 방도 평소보다 기온이 높았다. 분명 공조시스템은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미군 기지니까.

미군은 사막 한가운데에 막사를 만들어도 에어컨을 설치한다. 전장의 환경이 열악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전장이 아니라면 소속 군인들의 복지와 환경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분명 그 지옥 같은 밀실에도 완벽한 공조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트레이시는 불쾌함을 느꼈다.

불쾌감을 느끼는 환경을 만들고, 정신적인 고통을 준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놓는다.

심문 방법 중 하나이다. 자신도 배웠던.

트레이시는 다시 또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문 맞았어! 심문이 아니라 단순 절차라고 강조하던 그 개자식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만나서 그 턱에 훅을 먹여주고 싶었다.

트레이시는 자신있었다. 아주 깔끔하고, 고통스러운 훅을 날려줄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옆 자리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로건을 흘깃 보았다.

로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도 한통속일까?

지금 이 자식이 날 찾아온 것도 그 작은 골방의 연속일까?

그러나 그녀는 아주 약간의 이성을 찾았다.

전략적으로 행동하자. 정신차려 트레이시!

“..... 죄송합니다.”

트레이시는 콧노래를 흥얼 거리는 로건에게 사과했다.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응?”

그녀의 사과에 로건의 콧노래가 멈췄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 이해하니까.”

“이해하신다고요?”

“응? 그만둘 것 아니었어? 그만두니까 뒤도 안보고 막 질러댄거 아니었어?”

“.............”

사과하지 말 것을. 트레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자넬 찍었지.”

로건이 말했다.

“네?”

“소말리아 갈 때. 그 남자를 수행하는 역할에 내가 자네를 뽑았다고.”

그날 트레이시는 체육관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달리는 것이 그녀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3km를 막 넘어섰을 때,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긴급 작전. 빨리 가네다 공군기지로 올 것.

단 두 문장을 듣고, 그녀는 샤워도 제대로 못 한 채 바로 가네다 공군기지로 향했다.

거기서 로건을 만났고, 로건과 함께 걸프스트림을 타고 한국으로 향한 것이다.

그녀는 꽤 잘 해왔다. 그 증거가 바로 동아시아지부의 발령이었다.

몰락한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가 아직 군사대국으로서 한축을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 정부 입장에서 그 위상은 아주 낮아졌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 특히 극동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은 커졌다.

이제 경제력으로 유일하게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중국의 위헙은 말 할 필요도 없고, 한때 우방, 말 잘듣던 친구인 일본, 미국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던 한국이 새로운 관심대상으로 부상했다.

거기에 북한의 핵개발은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

자신이 이곳, 동아시아 지부에 발령 받았다는 이야기는 향후 다시 본토로 돌아갈 때 금의환향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모두 일장춘몽이 되어 버렸다. 끝났다. 그녀의 커리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커리어를 끝장낼만한 합당한 이유가.

“왜죠?”

트레이시가 물었다. 짧고, 날카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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