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프티드-2화 (3/386)

MISSION 01 : 운송인 인도조건 (2)

미션 : FCA - Free Carrier (운송인 인도조건)

d-5 1645 OSN, 신장동, 평택시, 경기도

국가정보원 요원 김규택은 조금 흥분해 있었다. 미국과 같이 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 입사한 기쁨도 잠시, 교육과 훈련으로 찌든 1년을 보내자 미쳐버릴 것 같았다. 3년간 잡일만 담당해왔다. 커피 심부름만 없었지, 국가정보원에 들어온 것인지, 조직폭력배 막내로 들어온 것인지 본인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도 기계처럼 수행해 왔다.

위에서 명령하면 따른다. 이유가 무엇인지,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 가방을 나르라면 가방을 날랐고, 차에서 대기하라면 베지밀 병에 오줌을 받아가며 차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비행기를 타라면 비행기를 탔고, 귀국하라면 귀국했다.

기계의 부품도 되지 못했다. 볼트와 너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요원으로써 재미를 알게 됐다. 바로 정보의 획득이다.

6급으로 승진하고 처음으로 작전 브리핑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3년 전. 대북작전에서 작게나마 임무를 가질 수 있었다. 본인이 수행하는 임무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후 폴란드 대사관에서 백색 스파이 역할을 수행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한국에 보냈다. 한국에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에게 정보를 요구했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요원으로서 자랑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

행운은 끝나지 않았다. 파견이 끝나고 한국으로 들어오자 국정원 대외협력실에 배속됐다. 대외협력실은 승진가도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역할을 한다. 현장의 재미는 없지만 승진하고, 정보를 다루는데 이만큼 좋은 자리는 없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가 미국,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공조하는 첫 번째 자리이다. 이 기회를 잡아서, CIA와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다면, 과장은 따놓은 자리다. 국장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현장요원이 국정원의 꽃이라는 멍청한 동기 놈들은 현장에서 구르라지. 나는 그 위에서 니들을 움직여주겠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는 꼭 성공시켜야 한다. 내가 이 자리를 주도해서, 이 공적을 차지해주겠다. 5급이 눈앞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독립요원, 독립에이전트가 지금 자신의 말을 끊었다.

독립에이전트. 속칭 IA.

정보기관에서 움직이기 힘들거나, 또는 움직이기에는 너무 지저분한 일들을 대신 해주는 용병 주제에. 즉 정보기관이 업무를 주는 원청이라면, 독립에이전트들은 정보기관에서 주는 일거리를 받아먹고 사는 하청업체에 불과한 주제에 지금 감히?

독립에이전트들 중 유독 능력 있는 기생충도 있다고는 들었다.

그래봤자. 개인이 국가와 대항해서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IA는 정보기관이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개. 사냥개에 불과하다. 사냥이 끝나도 다음 사냥을 위해서 삶아먹지 않는 것이지,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한규호도 IA 중 하나다.

이름도 처음 들어봤고, 프로필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미국 정부에서 부탁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국정원에서 한규호를 선택해 준 것이다. 사냥개를 고른 것은 우리 국정원이다. 그런데 사냥개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 한다고 아직 말 안했다고?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다. 더군다나,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진행하는 사냥이다. 내 출세가 달려있는 첫 번째 사냥이다.

빠르게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하청업체에게 원청의 무서움을, 사냥개에겐 사냥꾼의 무서움을 가르쳐 줘야 한다.

김규택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라고? 지금 무슨 헛소리를!”

김규택이 어떻게해야 근사하게 혼낼 수 있나를 생각하던 차에 다시 사냥개가 입을 열어 감히 말을 끊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너 누구 밑이야? 너 위에 누구야?”

김규택은 놀랐다. 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랐다.

요원이 된 이후 그 누구도 자신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작 독립에이전트가, 개 주제에 자신의 말을 끊었다. 끊은 것도 모자라 국정원 요원인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

김규택은 화보다 먼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뭐? 뭐라고 이 미친······.”

김규택은 혼란스러움과 분노로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

한규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핏덩어리를 보내왔구먼.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이번 일은 정말 짜증나네.

“니 위에 누구냐고. 짜증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한규호는 물건 훔치다 걸린 중학생에게 빨리 말해. 너 학교 어디야 하는 말투로 물었다.

“한규호!!”

김규택이 결국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한규호? 미쳤구만. 이 자식 진짜 안 되겠네.”

한규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이번 일은 짜증이 났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국정원 요원이 병신 같아서 저 일 못하겠어요. 징징징 거리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백인 남성이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꺼냈다.

60년대 크리스마스 영화에서나 들릴법한 부드러운 목소리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한규호도, 분노로 얼굴이 빨개진 김규택도, 그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흑인 준장도 모두 백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음······. 제가 상황을 좀 정리해도 괜찮을까요? 우선 김 요원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백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김규택에게 공손하게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김규택의 얼굴에 당혹감이 확 퍼졌다. 거절해야 한다. 이 스테이지는 나의 것이다.

“아······.저는 한국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이라······. 제가 비켜드리는 것은······. 한미 양국 정보기관의······. 그······.”

더듬거리며 거절의사를 표시하는 김규택을 보고 백인 남성은 조용히 한숨 짓더니 전화기를 꺼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규호를 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미스터 한. 괜찮으시다면 저에게 5분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 방을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한규호는 급변하는 상황에 호기심을 느꼈다.

저 부드러운 목소리의 백인이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김규택이 엿 먹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에,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인 남성은 흑인 남성에게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선 전화를 걸었다.

“여기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 한국 측에 우선 직접 일을 처리하고 이후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다고 이야기해줘.”

그리고는 한규호에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기다리라는 듯.

백인의 통화가 끝나고 불과 3분도 되지 않아 김규택의 전화가 울렸다. 김규택은 전화를 두 손으로 받고 ‘네’라는 대답을 몇 번 하더니 울상이 되었다.

“김 요원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도움 주신 보답은 차후에 다시 논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백인이 부드러운 중저음의 펀치를 날렸다. 얼굴에 사람 좋은 웃음까지 띄면서 악수를 청했다. 김규택은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화난 얼굴로 그 악수를 받았다. 그리곤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인의 악수를 웃으면서 받았어야 했다. 고맙다고 인사했어야 했다. 그것이 김규택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지막 수였는데, 그는 놀랐고, 분노했고, 당황해서 그가 가진 마지막 카드를 쓰지도 못하고 멍청한 인상만을 남긴 채로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본인이 김규택에게 엿을 먹인 원흉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한규호는 백인 남성의 행동에 더 기분이 나빴다.

상황을 정리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얼굴 가득한 사람 좋은 미소도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도발하기로 결심했다.

김규택이 나가자 한규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말이다.

한규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인 다음 머리위로 뿜어냈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과 담배 연기가 춤을 추며 휘감겨 올라갔다.

백인은 다시 한 번 싱긋 웃더니 흑인 준장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도 한 대 피울까요?”

흑인 준장은 불쾌했다.

최근에 자신 앞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김규택보다 현명했다. 그 현명함이 준장의 지위까지 그를 끌어올렸을지도 모른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저는 최근에 담배를 끊었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이 피우시는 옆에서 그 향취를 만끽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짓말이다.

콜로라도스프링스, 미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끽연을 즐기고, 한사람이 인내심을 발휘하고 3분이 지나자 백인이 말을 꺼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CIA 북동아시아 부 책임자를 맡고 있는 로건이라고 합니다. 옆에 계신 분은 국무부에 계시는 앨런 블랙먼 준장이십니다. 블랙먼 준장께서 한국어를 못하시는 관계로 영어로 말을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태청무역 한규호입니다.”

한규호가 영어로 답했다.

CIA 동북아지부 부책임자면 한국과 일본을 총괄하는 사람이다. 총 책임자가 중국을 담당하니, 한국 담당에서는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직접 브리핑을 하겠다고? 그런 자리에 머리에 피도 안마른 국정원 요원을 보냈다고?

뭔가 실수가 있었거나, 아니면 물 먹이려는 음모가 있었겠군. 어찌됐던 김규택은 이제 끝났네. 한규호는 생각했다.

“아시다시피 절차라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한국 측과 공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일을 맡으실지 결정을 못하셨다 했는데,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저자세다. 극도의 저자세다.

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공손하게 나온다면, 일이 개 같다는 이야기다.

“오늘 오산으로 가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입니다. 세부 사항을 듣고 결정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이야기부터 들어보죠. 제가 뭘 해드려야 하나요?”

“간단히 말해서 우리 쪽 사람을 한명 구해주시면 됩니다.”

“장소는?”

시간은 아까 들었다. 작전까지 104시간, 4일하고 조금 더 남았다.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국경에 인접한 지역입니다. 정확히는 소말릴란드 내 알 샤바브 점거 지역입니다.”

로건 부지국장은 김규택을 대신해 포인터를 잡았다.

개 같은 일이라고 예상했더니 개 X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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