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프티드 (GIFTED)
PRELUDE. 태청무역 한규호 과장
미션 : FCA - Free Carrier(운송인 인도조건)
d+1(작전 개시 1일 후) 0540
10.008773, 43.163271, 보라마 북북서, 소말리아, 아프리카
위장복을 입은 남자가 묵직한 철문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퀴퀴함을 넘어 악취가 흘러 나왔다.
대소변 냄새만으로는 이런 악취가 날 수가 없다. 피 냄새가 섞여 있어야만 가능하다.
살짝 얼굴을 찡그린 남자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3평 정도의 공간에 들어선 남자는 더욱 진해진 악취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찾았다. 얼핏 보면 쓰러져있는 짐승처럼 보이는, 피 묻은 거적때기로 천천히 다가간 남자는 조용히 목표를 확인했다.
살아있나?
남자는 목표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목에 손을 가져갔다. 턱 밑 움푹 들어간 부위, 동맥이 피부에 가깝게 노출된 그 곳. 맥박이 가장 잘 느껴지는 그곳으로 손을 가져간 남자는 약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맥박을 느꼈다. 아직은 살아있다.
살아 있다. 아직은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며칠만 더 보내면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남자는 목표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깨가 흔들리자 목표는 무조건 반사처럼 눈을 떴다. 그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남자는 재빨리 목표의 입을 막았다. 어느 정도 소리가 나도 상관없다. 이미 이 주위에서 둘의 대화를 듣거나 느낄 수 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목표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에이전트 노이스?”
목표의 눈이 흔들린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는다.
훈련된 요원이다. 아주 잘 훈련된 요원이다.
“에이전트 노이스, 지금부터 코드를 말하겠습니다. 에코나인, 포트 엘리스, 노벰버(N), 골프(G), 유니폼(U), 위스키(W), 탱고(T), 양키(Y), 브라보(B), 호텔(H).”
구출하러 온 남자가 코드를 말했다.
목표의 눈이 더 크게 흔들린다. 동공이 커지면서 눈에 담긴 감정이 바뀌는 것이 보인다. 공포에서 희망으로.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에이전트 에녹?”
목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입을 막은 손을 치운 남자는 귀에 대고 말한다.
“미합중국 정부가 당신을 모셔오라고 저를 보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미 중앙정보국(CIA) 핵확산방지센터 소속의 에녹 노이스(Enoch Noyce)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육성으로 말씀해주십시오. 탈출에 동의하십니까?”
“Yes, I agree. please take me home. sir.”
(예. 동의합니다. 선생님, 저를 집에 데려가 주세요.).
가늘고 떨리지만 의지가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탈출에 동의를 얻는다. 그리고 기록한다.
필수 절차이다.
“오케이. 집에 갑시다.”
한규호는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 미소를 보며 에녹 노이스 요원은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미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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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FCA - Free Carrier (운송인 인도조건)
d-5(작전 5일전) 1000 송파동, 서울, 한국
남자는 짜증이 났다.
숙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다 해가 뜨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는데, 문자알림이 울린 것이다.
남자는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순간에서도 잘 수 있었다.
잘 수 있을 때 자둔다. 먹을 수 있을 때 먹는다. 남자의 생존 법칙이다.
그런 그가 잠에서 깬 것은 그 남자만의 느낌 때문이었다. 물리적인 알람소리가 그를 깨운 것이 아니라, 알람이 중요하다는 그의 직감이 그를 깨운 것이다. 언제나 그의 목숨을 지켜왔던 바로 그 직감이.
남자는 핸드폰을 들어 문자 내용을 봤다.
‘13시 주간 업무회의 예정.’
조사조차 생략된 완전하지 않은 단순한 문장.
“주간업무회의는 개뿔. 이놈의 영감은 타이밍도 좋지, 사람을 괴롭히는데 타고난 능력이 있어.”
일어나서 옷을 입고 간단히 씻은 후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먹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남자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8호선 산성역에서 한국폴리텍대학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에는 태청무역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설립 이후 5년간 성남 내 제조업체들의 수출입업무를 대행해온 이 회사는 연 매출 20억 원 가량의 영세한 물류회사이지만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입 물동량 감소로 영업 이익은 마이너스로 돌아선, 아주 흔한 경쟁력 없는 물류 회사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최근 가지고 있던 화주 하나를 대형 물류업체에 뺏기면서, 어려운 한해를 버텨야하는 상황이었다.
태청무역에는 특별한 부서가 하나 있었다.
수출입 2과.
구성원은 과장 단 한명, 일반적인 수출입업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딱히 영업을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출근도 하지 않아서 책상도 없다.
가끔, 단 한 명뿐인 과장이 어쩌다 회사에 얼굴을 비추는 날이면 사장실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일 뿐,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사장의 먼 친척이라는 소문도 있고, 망해도 이상할 것 없는 회사를 뒷받침하는 스폰서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태청무역 수출입 2과 과장 한규호
조금 전 침대에서 문자를 보며 투덜거리던 남자, 한규호.
한규호 과장은 회사 문을 열고 바로 사장실로 걸어갔다. 어차피 책상도 없고, 직원들과 인사할 정도의 친분도 없다. 낙하산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생각하라지.
사장실 문을 열자 자신의 단잠을 깨운 원흉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다.
태청무역 대표이사 김형원. 매년 손해가 누적되고 있는 중소 물류기업을 운영하는, 반백의 머리, 깊은 얼굴 주름, 전형적인 60대 중반의 한국남성의 모습.
한규호는 인사도 없이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뭡니까? 또?”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어떠하시고? 식사는 잘 하고 계십니까? 그런 인사치례도 없다.
서로 알고 지낸 지 20년이 넘었지만, 둘이 서로 살갑게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형원 사장은 대꾸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계속 보다가 결재란에 가볍게 사인을 하고 나서야 눈을 돌려 한규호를 바라보고 책상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찌잉 하는 진동이 한규호의 고막을 때린다. 일반인들은 들을 수 없는 고주파의 진동이다. 이 진동은 전파방해와 더불어 창문을 진동시킨다.
도청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미 예전에 폐기되었다. 특히 전파를 이용하는 무선 도청기는 100% 확률로 탐지되거나 방해된다. 그래서 나온 방식이 바로 창문의 진동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음파의 진동이라는 방식으로 전달되고, 이 진동이 창문과 동조하게 된다. 이를 감지하는 도청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태청무역은 사장실에 고주파 진동 동조 장치를 구축해 놓았다. 단순하게 말하면 노이즈캔슬링 이어슛트의 기능을 확대한 것이다.
도청 방해 장치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하고 나서도 김원형 사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확실한 상황에서 한 번 더 심사숙고하는 김원형의 버릇이었다.
“미국 애들이랑 일 해야 되겠다.”
“미국 애들? 그놈들 좀 짜증나게 하는데······.”
“CIA 애들이라서 깔끔할 거야.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웬만하면 한번 해주라고. 미국 애들도 애들이지만 원청 애들도 안달난 모양이야.”
원청. CIA로부터 의뢰를 받은 곳이 있고, 그 의뢰가 한규호로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원청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었다.
“그놈들이 왜? 지들이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미국 애들에게 빚을 지우고 싶다 이거지. 지들이 힘써서 네가 움직였다. 이런 분위기.”
한규호는 생각했다. 더 하기 싫어지는데?
“더 하기 싫어지는데요? 제가 뭔 이득이 있다고?”
“우리도 원청에 채무를 안긴다 생각하자고. 실제로 국정원 애들이야. 원청도 아니야.”
“꼭 해야 되나요? 안하고 싶은데요?”
“가서 이야기나 들어보라고. 간다면 오늘 출발할 거야. K-55로 가라고.”
왠지 내키지 않는다.
시작부터 짜증난다.
한규호 과장, 실제로는 각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독립요원 한규호는 왠지 이 짜증이 계속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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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01 : 운송인 인도조건
미션 : FCA - Free Carrier(운송인 인도조건)
d-5 1600 OSN, 신장동, 평택시, 경기도
K-55, OSN, RKSO. 모두가 한 곳을 지칭한다.
오산 공군기지.
미국 태평양 공군 제 7공군의 모기지이며, 실질적으로 미군과 한국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미 공군은 물론, 미국 정부기관과 정보기관은 전부 오산 기지를 통해서 한국에 들어온다. 미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도 미 제7공군의 호위를 받아 오산기지에 착륙한다. 오산 기지는 미국 공군장관이라는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영주가 지배하는 영지이다.
지금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는 제7 공군 사령관 카일 존슨 중장이다.
국내에서 민통선 통제구역보다 더 검문검색이 심한 곳은 두 곳 뿐이라고 말한다.
청와대 정문과 K-55 두리틀 게이트가 그 곳이다.
현직 미군이 아니라면 게이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신분증을 스캔하고, 약속한 사람과 통화를 하고 나서, 전신스캐너를 통과하고 나서야 기지에 발을 딛을 수 있다.
게이트를 통과했다고 끝이 아니다. 기지 관계자의 에스코트 없이는 기지 내에서 움직일 수 없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 시민권자도 이 절차를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약속한 사람이 카일 존슨 사령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규호가 바로 그 케이스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경례를 한다.
“한규호 과장님이시죠? 사령부의 앤쏘니 상사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인사하는 흑인 상사에게 가볍게 목례한 한규호는 상사가 열어주는 세단에 탑승했다.
사령부 소속 상사의 에스코트, 사령관 전용관용 차량. 아이디를 보여줄 필요도, 전신 스캔을 받을 필요도 없다.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된다.
푹신한 뒷자리에 앉은 한규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병사도, 보조석에 앉은 상사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앤소니 상사는 20분전에 명령을 받았다. 두리틀게이트로 나가 한규호라는 사람을 모셔올 것.
사령부에서 한국인을 모셔오라고 한다면 둘 중 하나이다. 장관급의 VIP이거나, 아니면 정보부 쪽 인물이거나.
어느 쪽이든 앤소니 상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는 기계이다. 사령부에 속한 모든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듣질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질 못하는 기계와 같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모셔 오라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다.
한규호가 사령관 전용 차량 뒷자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기계인 그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차량은 단 한 번의 멈춤도 없이 부드럽게 이동해 한 건물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리자 안소니 상사는 떠나가고, 새로운 중령이 그를 맞이했다.
그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 지하 3층에 위치한 벙커 내부로 내려가자 4명의 인물이 한규호를 맞이했다.
밀폐된 공간을 빠르게 스캔한다.
인식되는 환풍구는 하나. 문은 등 뒤에. 중앙에 테이블, 그 위에 프로젝터, 연결된 노트북은 정보기관용 보안강화제품,
왼쪽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남자, 30세 초반. 175cm, 마른 체형, 약 65kg? 국정원일까?
오른쪽에 백인 하나, 흑인 하나. 백인은 양복, 183cm 100kg? 예전에는 근육질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살집이 좀 있다. 왼손잡이. 권총은 오른쪽 허리? CIA? NSA? DIA? 확실한건 저 백인이 이번 작전에 커스터머가 되겠군.
흑인, 190cm, 100kg. 근육질. 왼쪽 어깨가 살짝 올라가 있음. 취미는 골프? 현역 미군? 계급은 공군 준장. 제7공군 소속일까? 이 자리에 있다면 공군청이나 국방부 소속이겠지. CIA와 작전 연계 때문에 나와 있는 것 같은 인물이다. 한국어 알까?
한규호가 짧은 시간동안 그들을 스캔하는 사이에, 그들도 한규호를 스캔하고 있었다.
180cm, 90kg? 근육질, 도수없는 안경, 머리 안 감았음. 츄리닝은 아디다스. 이 정도겠지.
한규호가 밀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꺼냈다.
“안녕하십니까? 한 과장님. 지금부터 영어로 이야기 할까요?”
한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리모컨을 들어 내부 불을 끄면서 영어로 말을 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작전에서 한국 측 연락을 담당하게 된 에이전트 김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번 작전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김 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요원이 화면으로 눈을 돌리면서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우선 작전은 현 시간 부로 103.5시간 이후에 시행됩니다. 세부 타임테이블은 이후 첨부된 서류에서 확인하실 수······.”
한국인 남자는 미리 연습한 것처럼 대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정면의 스크린을 향해 있을 때, 한규호는 손을 들어 브리핑을 제지시켰다.
“잠깐만, 잠깐만.”
김 요원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한규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를 더욱 당황시켰다.
“난 이거 한다고 아직 말 안했는데?”
한규호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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