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침략-4
‘난 8서클의 벽을 넘어선 마법사다.’
거기다 마왕의 힘을 빌리고 있는 지금, 9서클의 대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
물론 마왕의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패를 보여 주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퓨리를… 맨손으로 튕겨 냈다는 말인가?’
아이작은 김민준을 눈앞에 두고 망설였다.
위력 조절 따위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마나를 끌어올려 최대 위력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그런데도 퓨리를 별것 아닌 것처럼 쳐 내 버린 것이 너무 거슬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처음 침략이야 쉬웠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무리해서 마왕의 힘까지 빌렸지 않는가.
이 침략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자신에게는 뒤가 없을 것이다.
급조한 계획.
예상보다 약한 마왕의 군단.
그리고…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힘을 가진 김민준.
‘그래도 처리해야 한다. 어떻게든.’
아이작은 숨을 고르며 김민준을 응시했다.
“뭘 그렇게 보냐? 마나 떨어졌냐?”
김민준은 마법을 쳐 낸 손을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방금 걸로 대미지를 입었겠지.’
2도 화상에 가까운 부상.
8서클의 고위 마법을 손으로 쳐 냈는데 고작 화상이라니.
마법사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과거의 나였어도 이렇게 쉽게는 못 흘렸지.’
물론 완전 맨몸으로 막아낸 건 아니다.
몸 안의 마기를 끌어올려, 일순간 방어를 극대화시켰다.
‘8서클 마법 하나 쳐 냈는데 마기 2%가 소모되었다라.’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아이작 역시 과거에 비해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였으니까.
“별것 없네. 너 지금까지 뭐 했냐?”
김민준은 아이작에게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스킬, 아이템.
무엇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8서클의 마법을 쳐 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자신 쪽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이다.
‘마법사는 마법 말고 대항할 수단이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고대 마족을 만들어 낸 놈이 아닌가.
자신에 대한 대항 수단을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는 놈이다.
“나와라.”
아이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크사이더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김민준 님.
“위험해 보이는 헌터들이 있으면 가서 도와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환수가 지면 밑으로 사라지는 순간, 놈을 대상으로 절망의 세계를 시전했다.
허튼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넌 나랑 둘이서 놀자고.”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
검은 하늘과 메말라 가는 대지.
김민준이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공간.
“얼마나 버티는지 볼까.”
간 보는 것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시작부터 아이작에게 온갖 제약을 다 걸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놈을 향해 온갖 괴물들과 흑마법을 추가로 쏟았다.
“영역 설치.”
아이작은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달려들든, 강력한 흑마법이 쏟아지든.
손을 가볍게 휘저어 마법을 시전할 뿐.
스스스스.
시전자를 중심으로 방어 공간을 만드는 마법, 면역 영역.
면역 영역은 절대 방어라는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대신, 유지 시간이 30초 정도로 짧은 편이었다.
마나 소모는 당연히 극심했고.
“시작부터 그러면 얼마 못 버틸 텐데.”
김민준은 놈의 발밑에서 새하얀 공간이 뻗어 나가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현재 절망의 세계의 스킬 등급은 A.
과거에도 도달하지 못한 등급인 만큼,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지속 시간부터가 10배 이상 늘어났으니까.
“너 여기서 10시간 넘게 어떻게 버틸래? 난 그냥 저기 누워서 자도 될 거 같은데.”
일부러 조소를 지으며 놈을 도발했다.
자신의 스킬에 대한 대비책을 당연히 마련했을 터.
놈이 어떤 패를 가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김민준… 도대체 힘을 어떻게 되찾은 거냐. 이건 단순히 힘을 회복한 수준이 아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몸에 좋은 것도 많이 먹었다. 이제 20초 정도 남았네.”
“제안을 하나 하지. 나랑 뜻을 같이할 생각은 없나? 나와 동등한 지위를 약속하겠다.”
“내가 그걸 받아들일 것 같냐? 15초 남았다.”
“…….”
아이작은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리를 굴렸다.
김민준에 대한 정보야 빈틈없이 확보했다.
강력한 스킬들, 특히 대상을 독립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스킬에 대해서는 파훼법 연구가 끝난 상태.
‘깨지질 않는다.’
본래라면 면역 영역을 만든 뒤, 특정 마나 패턴을 이용해 공간을 깨고 작은 틈을 통해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작은 균열.
아주 미세한 균열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그 미세한 균열조차 만들 수 없었다.
‘이 스킬 하나 때문에 수년을 연구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렇게 계획이 수틀린 적이 있었던가.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살의가 들끓어 올랐다.
특히 눈앞에서 보란 듯 누워 있는 김민준을 보니,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까지 자신을 얕보는 것인가.
“이 공간을 먹어 치워라.”
아이작은 으르렁거리며 마왕의 힘을 사용했다.
남는 방법은 어차피 이것밖에 없다.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힘을 사용했지만, 괜찮다.
이를 보충할 방법은 있으니까.
쿠와아아아아!
폭식의 마왕에게서 빌린 힘, 폭식의 권능.
아이작의 몸을 휘감은 검붉은 기운이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일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공간을 쉽게 깨트릴 수 있었다.
“미친 새끼. 내 이럴 줄 알았다.”
순식간에 깨져 버린 스킬.
김민준은 아이작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래.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마족과 노바 제국 병사들이 동시에 침략해 온 점.
거기다 공간을 집어삼키는 마족의 힘까지.
‘이건… 마왕이다.’
아이작.
놈은 마왕의 힘을 사용하고 있다.
흑마법사는 마기에 대해 민감하다.
마족 역시 이에 해당하며, 마왕 같은 경우는 특유의 섬뜩한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은… 폭식의 마왕이다.’
마법사가 마족, 그것도 마왕의 힘을 빌렸다라.
이건 자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흑마법사도 이스가르드에서 천시받는데, 마족과 마왕은 어떻겠는가.
“폭식의 마왕이랑 계약했네. 마왕은 인간에게 힘을 안 빌려줄 텐데… 뭐 엄청난 거라도 줬나 봐?”
“크흐흐흐. 역시 아는 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으니 말해 주지. 난 폭식의 마왕과 계약한 상태다. 사후 내 영혼을 대가로.”
아이작은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 음침하게 웃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가를 하나 더 추가할 예정이지.”
스윽.
놈의 눈짓에, 기다렸다는 듯 마족 하나가 차원을 찢고 나타났다.
그림자 백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마왕의 대리자시여.”
“마족의 군단 하나를 빌렸는데, 마족이 너무 약하군. 일부러 나한테 약한 군단을 내어 준 건가?”
“예. 그렇습니다.”
“왜 그런 거지?”
“폭식의 마왕님께서는 영혼의 가치에 따라 군단을 내어 줬으며, 힘을 빌려주셨습니다.”
“내 영혼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것이군.”
아이작은 사후, 본인의 육체까지 넘길 테니 군단 하나를 더 내어 달라고 말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마왕님께 이미 받은 상태입니다.”
“답해라.”
“저를 수하로 부릴 수 있는 것. 기한은 1일. 딱 거기까지만 허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쯧. 넌 얼마나 강하지?”
“저는 상급 마족이며, 그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겠다.”
8서클 마법사의 육체는 상당한 가치를 지녔다.
그건 마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고.
그것을 조건으로 거는데 고작 마족 하나를 추가로 부릴 수 있다니.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구의 병기들을 무력화시킨 뒤, 무장한 지구의 인간들을 죽여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지랄들하고 있네.”
가만히 틈을 노리고 있던 김민준은, 아이작의 말을 듣자마자 마기를 끌어올렸다.
‘내가 널 보낼 것 같냐?’
그림자 백작.
놈이 작정하고 그림자 도약을 사용해 암살을 시작하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할 터.
어떻게든 놈을 이곳에서 처리해야 했다.
‘원래 아이작한테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저놈을 여기서 확실하게 죽인다.’
김민준은 마기의 손아귀로 그림자 백작을 속박했다.
그리고 상공에 설치했던 스킬, 절망의 별을 파괴했다.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아, 해외에 설치했던 스킬까지 추가로 파괴했다.
“넌 여기서 죽어라.”
핑거 스냅과 동시에, 그림자 백작에게 저장된 피해량이 쏟아졌다.
“크아아아아아악!”
상위 마족.
공간 제약 없이 어디서든 출현해 대륙을 공포로 빠트렸던 그림자 백작.
놈은 김민준이 창조한 스킬의 위력에,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 소멸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아이작은 방금 일어난 일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나의 움직임도 없고, 마기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런데 그림자 백작이, 김민준에 의해 소멸했다.
“상위 마족을 일순간에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마족도 아니고 그림자 백작이라고!”
그림자 백작은 보유하고 있는 특유의 능력 때문에,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분명 그럴 텐데….
핑거 스냅 한 번으로 그림자 백작을 소멸시켰다.
“불가능하다고?”
김민준은 아이작을 향해 조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금 소멸했던 그림자 백작의 고유 능력, 그림자 도약을 사용했다.
“그걸 누가 정하는데?”
“이… 이건!”
“그래. 그림자 도약이다.”
“인간이 마족의 고유 능력을 어떻게 사용한다는 말이냐!”
“지금 쓰고 있잖아. 운이 좋으면 다 돼.”
마왕의 권능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알맹이는 인간일 뿐이다.
놈의 반응 속도부터가 하품 나올 정도로 느렸으니까.
“아. 갑자기 현타 오네. 내가 이런 놈들 막자고 열심히 스펙을 올렸나.”
물론 상정 외였던 마왕의 힘은 강력했다.
오러를 최고 강도로 두른 마력검을 가볍게 막아냈고, 한 번에 난사한 중급 흑마법 역시 튕겨 냈으니.
“하필이면 엿 같은 마왕의 힘을 가져와가지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작이 마왕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저 엄청난 힘을 고작 방어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으니.
“역시 마왕의 힘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분위기를 바꿔야겠지.”
아이작은 김민준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캐스팅을 시작했다.
“네 힘으로 어디까지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본래라면 9서클의 마법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마왕의 힘을 빌리고 있는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이건 막아낼 수 없을 거다.”
라바 메테오.
용암으로 뒤덮인 거대한 운석 덩어리를 상공에 소환해 떨어트리는 고위 마법.
라바 메테오가 지정한 지역에 충돌하면, 엄청난 충격량과 함께 용암을 방출했다.
그 위력은 제국 하나는 무슨, 세 개는 지도상에서 사라질 정도.
역사적으로 이 같은 최고위 마법을 사용했던 마법사는 기껏해야 한두 명이 끝이다.
그런 마법을 아주 손쉽게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 말이다.
“야. 누구는 그런 거 없는 줄 아냐?”
아이작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 김민준이 대답했다.
그게 뭐가 대수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