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시련-2
“여긴 어디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김민준은 메시지창의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한국에서 시련을 치르게 되면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몰라 살짝 걱정했었는데, 이 점은 다행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감각을 날카롭게 끌어올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감지되는 기척이 전혀 없다.
뭘 해야 하는지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시련이라고 하길래 긴장하고 있었는데, 기운 빠지는 장소였다.
‘일단 기다려 볼까.’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낫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쉬익!
“잠깐! 잠깐만!”
“이건 또 뭐야?”
반사적으로 휘두른 주먹은 대상의 코앞에서 멈췄다.
“어후. 성질도 급하기는. 죽을 뻔했잖아!”
“…몬스터?”
그 대상은 바로 하급 몬스터인 스켈레톤이었다.
약하지만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게 출현하는 언데드.
지능이 없는 놈인데,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말까지 하고 있다.
“너. 냄새가 난다. 이건… 흑마법사의 벽을 뚫어 버렸구나?”
“어쭈. 하급 몬스터가 말까지 하는데 내 정체까지 알아?”
“당연히 알고말고. 내가 바로 이스가르드의 1세대 용사 출신, 그리고 1세대 흑마법사였으니까!”
“…뭐라고?”
눈앞의 뼈다귀는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1세대 용사 출신.
이것만 해도 놀랄 지경인데, 흑마법사 출신이라니.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냐?”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1세대 용사에 대해서는 자신 역시 알고 있다.
다만, 그 1세대 용사가 흑마법사라는 것은 틀린 정보다.
“경기도!”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이밀자, 스켈레톤이 익숙한 지역명을 말했다.
“뭐?”
“나, 나는 서울 경기도 출신이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대학교 18학번인 건 기억난다. 입대를 앞두고 휴학을 신청하고 집에 가는 도중에 이스가르드로 소환됐다!”
여기까지 말하니 주먹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뭐지.’
김민준은 현재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메시지창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날려졌다.
거기서 처음 나타난 게 한국인이었던 해골이라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고 있는 것들 좀 말해 줄 수 있냐?”
그의 태도가 누그러들었다.
눈앞의 해골이 같은 한국인이라는 걸 안 이상,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 1세대 용사에 흑마법사라고 하지 않는가.
분명 뭐라도 하나 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거야 물론! 내 친히 후배를 위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도록 하지!”
스켈레톤은 반색하며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할 이야기가 길어.”
“그래.”
칠흑 같은 어둠 속.
둘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
한편.
김민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군에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일반군이든 헌터군이든 할 것 없이, 군의 방산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썅! 기밀 자료가 대체 어디서 유출된 거야!”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정보가….”
“형님. 해군 쪽을 너무 해 먹으신 거 아닙니까? 최근에 해상 작전 헬기랑 고속함 쪽에 손대지 않으셨습니까.”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티 나게 해 먹었겠냐? 너 설마 날 의심하는 거냐?”
“형님. 진정하시고요. 천천히 대화 좀 해 봅시다.”
“씨부럴! 커피나 한 잔 타 와!”
오래된 건물 안.
육군, 해군, 공군의 각 장성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5년 전부터 조금씩 빼 오던 뒷돈.
흔히 방산 비리라고 불리는 행위가 적발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전 아닙니다. 육군 쪽은 헌터군 지원이니 연계니 하면서 감시가 심한 거 아시잖아요.”
“공군 쪽도 최근에는 전투기 도입에 각종 기술 지원에 말이 많아서…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나 때문에 꼬리가 잡힌 거다 이거냐? 고속함 몇 대랑 헬기 몇 대 때문에?”
그렇게 서로 열을 올리며 언성을 높이던 와중,
“다들 주목!”
창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성들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까마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내 이름은 이봉구, 탐정이죠.”
“…….”
“뭐, 뭐냐 저건?”
“까마귀가 말을 하잖아!”
“말하는 까마귀 처음 봐? 에이 씨. 나름 연구한 포즈랑 대산데.”
까마귀는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너희들이 국가의 세금을 해 처먹고 있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 지금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헌터군 김민….”
“입 닫아! 정신 나간 벌레야!”
이봉구가 괴상한 포즈를 취하며 말을 하던 도중, 문 입구가 부서지며 헌터군 한 명이 들이닥쳤다.
그 헌터는 김서현 상사였다.
“꾸엑!”
뭔가에 얻어맞은 이봉구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앞으로 넘어졌다.
“내가 그만큼 입 열지 말라고 했는데도 듣지를 않아요. 매를 번다니까.”
그녀는 허리춤에 찬 마력검을 꺼낸 뒤, 오러를 둘렀다.
스스스스스.
세차게 일렁거리는 오러와 위협적인 눈빛.
군의 장성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거 지금 불법 침입인 거 몰라? 넌 뭔데 문을 부수고 들어와?”
“헌터군? 마크 보니까 특수 부대인 것 같은데, 헌병도 아니면서 네가 무슨 권한으로 여길 들어와! 정신 나갔어?”
“너 소속 어디야, 새꺄! 관등 성명에 소속 불어!”
그들은 오히려 화를 내며, 당장 소속된 부대에 연락하겠다며 위협해 왔다.
퍼억!
“커헉!”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잠깐! 내가 누군지 알고….”
“군복 벗고 감옥 갈 사람인데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녀에게는 어중간한 위협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본보기로 한 명의 장성이 피떡이 될 때까지 맞고 나서야, 다른 장성들이 분위기를 파악한 듯 무릎을 꿇었다.
“내가 다 사실대로 말하겠네! 그러니….”
“필요 없어.”
“뭐라고?”
그 말대로였다.
그녀가 최근에 얻게 된 만물을 보는 마안 덕분이었다.
‘확실히 이건 달라.’
이전의 반쪽짜리보다 못한 성능이었던 변덕쟁이 마안과는 다르다.
그 무엇이든, 대상이 5m 반경에만 있으면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원한다면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말이다.
‘김민준 님의 말이 맞았어.’
김민준은 자신과 이봉구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그 눈을 시험해 볼 겸, 군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라는 지시를 말이다….
‘확실히. 이 눈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아.’
당장 지금만 해도,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고 다니던 장성들의 비리를 적발했으니까.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마안이었다.
‘이 엄청난 효과를 가진 눈을 일회용으로 사용하려 했었다니….’
그녀는 다시 한번 본인의 어리석음에 반성했고, 김민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이것도 김민준 님이 마음만 먹으면 다 털 수 있는 거지만, 이런 놈들에게 시간을 쓰시게 할 수는 없어.’
만물을 보는 눈을 사용하면, 이봉구가 압도적인 수의 신도를 활용해 증거를 확보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고작 2일 만에 방산 비리를 저질러 오던 군인 전원이 적발되었다.
그 수는 일반군과 헌터군을 통틀어 총 40명이었다.
**
같은 시각.
김민준은 스켈레톤과 긴 대화를 마친 뒤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1세대 흑마법사라. 죽은 뒤 이 공간에서 눈을 떴고, 지금까지 혼자 지내 왔다 이거지.’
저 스켈레톤은 동정심이 들 정도로 불쌍했다.
자신처럼 갑작스럽게 이세계로 소환되었다.
여기까지는 같다.
하나, 1세대 흑마법사는 용사로서의 재능이 없어 제국에서 버림받았다.
‘멋대로 소환하고, 멋대로 버렸다 이거지.’
그 뒤, 저 해골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결국 굶주려서 죽었다고 한다.
몬스터에게 죽은 것도 아니고, 제국 소속의 병사에게 죽은 것도 아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죽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죽음 뒤에 이런 어둠만 있는 공간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망할 새끼들.’
눈앞의 해골이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당장 지구로 돌아가 성녀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이용할 만하면 이용하고, 그럴 가치가 없으면 버린다니.
사람이 도구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가.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다 무뎌졌어. 대신 화내 줘서 고맙다.”
스켈레톤은 자신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이미 다 지난 일이라며 말해 왔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야지. 어차피 성녀가 소속된 제국은 망했다며?”
“그래. 노바 제국이 이스가르드를 먹었지. 성녀는 낙인이 찍혀 노예가 됐고.”
“그 정도면 뭐. 부족한 감이 있긴 한데, 벌 받았네. 그것보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쿠구궁!
녀석이 말을 마치길 잠시.
어둠이 걷히며 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네가 한 거냐?”
“아니. 이건 나도 좀 놀라운데. 타이밍이 환상적이네. 내가 그럴 힘이 있겠어? 당장 동네 개랑 싸워도 질걸? 그것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스켈레톤이 당황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김민준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이런 현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공기 좋네.”
“냄새는 못 맡지만 기분이 좋아지는걸.”
푸른 하늘.
그리고 싱싱한 풀들이 자라나는 땅.
띠링.
김민준이 주위를 둘러보기 무섭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제야 나타나냐?”
그토록 기다리던 시련의 내용이었다.
[시련-1]
고대 몬스터, 베히모스를 처리하라.
“베히모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베히모스가 맞나?”
베히모스.
붉은 털을 가진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죽어도 살아나는 특징을 가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면, 놈은 살아날수록 강해진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미쳤네.”
김민준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몬스터를 확인하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겉보기에는 전설로만 듣던 그 몬스터가 맞았다.
“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라.”
스켈레톤을 등 뒤로 떠민 뒤 놈에게 스킬을 연발했다.
암흑 화살을 시작으로,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마기 채찍을 사용해 거리를 다시 벌렸다.
이 영문 모를 공간은 오직 흑마법사의 스킬과 기본 스텟만 허용했다.
때문에 마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했다.
‘역시. 영구 기관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공간에 들어오고 난 직후부터, 영구 기관이 멈췄다.
거기다 소지하고 있는 아이템은 사용할 수 없었다.
즉, 지금 가지고 있는 마기만으로 시련을 끝내야 한다는 말이다.
“으르르르!”
“진짜 베히모스 맞네.”
전성기를 넘어선 마기와 스킬 등급 덕분에, 김민준의 화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고위 마법을 퍼부어야 제압할 수 있다는 베히모스가, 기본 스킬로 한 번 죽어 버렸으니까.
“에이 씨. 벌써 한 번 죽었네. 살짝 약하게 날린 건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달려드는 베히모스를 보고 혀를 찼다.
놈을 처치하는 건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어떤 방법으로 죽이든 간에, 다시 살아났으니까.
“분명 주술사, 마법사, 사제, 성기사, 흑마법사들이 힘을 모아서 놈을 제압한 뒤 다른 차원으로 날려 버렸다고 했지.”
시련의 내용 역시 놈을 처리하라고 했을 뿐, 죽이라는 말은 없었다.
“그럼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게 정답이겠네.”
김민준이 놈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