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고대 마족-1
“합격….”
지금까지 얻어맞기만 했는데 합격이라니.
이래도 되는 걸까.
마지막은 아예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지원자 중에 네가 잘 잘했다.”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김민준이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지며 빨리 나가라고 했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헌터들이 많다면서.
“병장 손은서! 감사합니다!”
간만의 칭찬.
그동안 김서현 중사에게 혼나기만 해서인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푼 뒤 밖으로 나갔다.
최종 선발 시험은 계속 진행되었고, 어느새 밤 9시.
“이것으로 블랙 스완 최종 시험을 마친다. 다들 고생했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자리에 남은 것은 단 10명의 헌터였다.
김민준은 그들의 계급장 옆으로, 블랙 스완의 배지를 손수 달아 주었다.
“중사, 김! 서! 현! 감사합니다!”
“병장, 손! 은! 서! 감사합니다!”
김서현과 손은서를 시작으로 중사, 상사, 소위, 대위 등등.
계급과는 상관없이, 김민준의 기준치를 만족시킨 헌터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라.”
헌터들에게 블랙 스완의 배지를 달아 주고 축하 인사를 건넨 것.
김민준이 한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본격적인 건 3일 뒤에 말해 준다면서, 모습을 감췄다.
‘…우리가 알던 별이 맞나?’
‘뭔가 적응이 안 되네.’
팀원들은 얼떨떨하면서도, 작은 배려에 감사함을 느꼈다.
사실 방금 전까지도 잠이 쏟아져 허벅지를 꼬집었지 않은가.
그만큼 이번 선발 시험의 강도가 무시무시했다는 말이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팀원들은 서로 인사를 건넬 힘조차 없었다.
다들 흐느적거리며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
한편.
지구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사이, 이스가르드는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스가르드의 노바 제국은 다른 모든 제국을 무너뜨린 상황이었다.
전쟁에 패배한 제국은 노바 제국에게 흡수되었다.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실험 용도로 사용하거나, 강제로 노역에 동원했다.
“저기이이이. 나 심심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는 거야?”
노바 제국의 한 지하 시설.
그중에서도 가장 견고함을 자랑하는 건물에서, 작은 체구의 소녀가 툴툴대고 있었다.
장발의 잿빛 머리에 붉은 눈.
분명 어린아이일 뿐인데,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외부와는 달리 방 내부는 아기자기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듯한 각종 인형들과 장난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루나 님. 아이작 님께서 조금만 더 참으라고 하십니다.”
푸른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이 그녀를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그 말, 지금까지 3,800번 들었거든? 너. 이번 걸로 3,801번이야. 설마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작 님은 루나 님을 아끼고 계십니다.”
살짝 삐진 듯한 저 태도에, 남성은 화들짝 놀라며 품 안에서 오브를 꺼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저 어린애 모습을 한 괴물한테 죽어 나간 인간만 몇 명인가.
최소 수백 명은 넘는다.
“기, 기사들은 어딨나! 제어석 가지고 빨리 이쪽으로 와! 루나 님이 계시는 방이다!”
남성이 말을 뱉은 지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가 들이닥쳤다.
지하 시설에서 상시 대기하고 있는 병력들.
저들은 오직 여자아이를 감시하고 제압하는 임무를 위해 배치되었다.
“…아빠가 날 아끼고 있다면서?”
루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별것 아닌 그 행동에, 그 많던 기사와 마법사가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아이작 루나.
고대 마족의 세포를 배양해 인간의 형태로 만들어 낸 괴물.
대마법사 아이작이 만든 걸작.
그녀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하 시설에 갇혀 지냈다.
대마법사 아이작조차 고대 마족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으니까.
비유하자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폭탄인 셈이었다.
“제어석에 마력을 불어넣어라! 빨리!”
“예!”
기사들이 달려들고 후방 위치한 마법사들이 제어석을 사용했다.
평소와 같이 그녀를 제압한 뒤, 아이작을 호출해 기분을 풀어 주면 된다.
“커억!”
수백 번 반복했던 작업이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매번 똑같은 짓만 하네. 지겹지 않아?”
검은 형체를 가진 마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병사를 도륙 냈기 때문이었다.
“제어석이… 제어석이 듣질 않습니다!”
“기, 긴급 상황이다! 아이작 님을 빨리 불러!”
“사, 살려 줘! 난 여기서 죽기 싫다고!”
“끄아아아아!”
나름 수준 높은 정예들이었지만, 루나에게는 심심풀이조차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루나는 이런 생활이 질린 지 오래였다.
수년 전에 말이다.
그래서 아이작에게 힘을 들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움….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그녀에게는 아무런 지식이 주입되어 있지 않다.
고대 마족이 언제 노바 제국에게 칼을 들이밀지 몰랐으니까.
그럼에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고대 마족이란 그런 존재였으니.
스스스스.
생각에 잠긴 루나의 등 뒤로, 어둠이 솟아올랐다.
“뭐어?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정말이야, 베티?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녀는 흐물거리는 어둠과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구? 정말? 나 지구로 갈 수 있는 거야? 거기까지 가면 아빠도 나를 못 찾을 거라고?”
지구.
들어 본 적이 있다.
밖을 지키던 기사들이 가끔씩 꺼내던 대화 주제였으니.
“김… 민… 준. 알아! 아빠가 말해 줬어! 김민준이라는 흑마법사가 이스가르드를 멸망시키러 온다고. 그래서 우리가 준비해서 먼저 쳐야 한다고!”
물론 저 정보가 진실이라 한들, 아무 관심 없었다.
그녀는 심심함을 풀 놀 거리가 필요할 뿐.
“좋아! 그럼 바로 갈래. 베티! 문을 열어 줘!”
고대 마족은 마기를 추적할 수 있다.
설령 다른 차원에 있는 마기라도 말이다.
실험을 통해 태어난 그녀 또한 고대 마족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스스.
어둠에 물든 아기자기한 문이 만들어졌다.
“가자, 베티! 우리는 지금부터 모험을 하는 거야!”
**
“기, 김민준 님!”
다음 날 아침.
김서현 중사가 사택 안으로 급하게 들이닥쳤다.
뭔가 싶었더니, 변덕쟁이 마안이 심상치 않은 예지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뭐냐. 뭐길래 그렇게 겁을 먹었어? 천천히 말해 봐.”
“네, 네에….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어제 본 예지에 대해 설명했다.
“마족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예지였어요.”
“…그래? 자세히 다 말해 봐. 본 것들 전부.”
“네.”
예지의 내용은 드물게도 비슷했다.
이세계의 존재 중, 마족이 지구로 넘어왔다는 것.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으며.
마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
“같은 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김민준이 콧방귀를 꼈다.
마족이 어떤 놈들인가.
인간을 보자마자 죽이려고 드는 놈들 아닌가.
“나이트 워커. 탐색 최대로.”
마족을 살려 둘 이유 따위는 없다.
물론 저 예언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스스스스.
마기를 잔뜩 머금은 나이트 워커가 몸집을 부풀렸다.
힘을 상당 부분 되찾았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진짜로 있네. 넌 일단 대기하고 있어라.”
“네.”
소환수가 특정 인물을 찾아낼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김민준은 곧장 해당 장소로 향했다.
**
“이상한데.”
마족이 발견하고 든 생각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은 사람을 해치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뭐냐. 마족이 아닌가?”
마족의 인간에 대한 적대심은 본능이다.
인간이 숨을 쉬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말이다.
놈이 언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민이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아저씨! 이거 얼마 해요?”
“응? 얘야. 금은 어디서 났니? 부모님이 알면 큰일 나요. 어서 돌려 드려야지.”
“아빠가 저한테 준 거예요! 이거 어디서 팔 수 있어요?”
“…아빠한테 받았다고? 허어…. 이 정도 금이면 800만 원 정도는 할 텐데….”
“아저씨! 그럼 이거 사 주세요! 아빠가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어요!”
“하하. 아빠가 굉장히 훌륭하신 분인가 보네. 이 아저씨가 사마.”
“감사합니다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야. 너 왜 여기 있냐?”
마족이 더 이상 돌아다니게 둘 순 없다.
김민준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한 마족에게 접근했다.
“응? 오빠는…. 뭐? 베티! 그게 진짜야? 진짜 저 사람이 김민준이야?”
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난 루나. 아이작 루나야. 그리고 얘는 베티.”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어둠.
김민준은 그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
상상 이상의 존재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고대 마족의 냄새가 나잖아.’
고대 마족.
멸종한 지 수천 년은 지난 놈들인데,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아이작 루나라. 그럼 아이작 그 새끼 짓이겠네.’
이스가르드에서 아이작이라는 이름은 흔하지 않다.
저 고대 마족에게 아이작을 붙였다면, 뻔하지.
대마법사 아이작.
놈이 저 고대 마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구의 좌표를 어떻게 알았냐? 알고 있는 놈은 없을 텐데.”
놈을 한번 떠봤다.
좌표를 알고서 이곳에 온 것인지.
아니면 저 고대 마족이 독단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응? 나도 몰라. 베티가 해 줬는걸. 얘는 마기를 잘 찾아내거든.”
“여긴 왜 왔냐? 박살 내려고 왔냐?”
단시간에 놈을 처리해야 한다.
고대 마족의 힘은 만만치 않다.
완전히 성장한 혈귀조차 가지고 노는 놈들이지 않은가.
‘이곳에서 붙으면 안 된다. 주위가 다 쓸려 나갈 거다.’
현재 위치한 곳은 서울 한복판이다.
어떻게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놈을 유도해야 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절망의 세계를 사용해 놈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스킬이 통할지도 미지수다.’
고대 마족은 흑마법사에게 있어 완벽한 카운터였다.
놈들은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마기를 꺼내게 되면, 고대 마족의 양분이 될 뿐.
전투를 벌이게 되면, 흑마법사 스킬은 봉인당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성녀. 그 자식이 분명 2년 6개월이라고 말했을 텐데.’
침략까지 2년 정도 남은 시점에서 고대 마족이 등장한다라.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걸 느꼈다.
‘노바 제국. 재밌는 걸 만들고 있었네.’
스으으으.
김민준은 온몸의 신경을 집중시키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놈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
손과 발의 미세한 움직임.
발밑에서 일렁이고 있는 검은 기운.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좋아! 어떻게 할지 정했어!”
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더니, 김민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뭐라고?”
김민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고대 마족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