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이다-161화 (161/212)

161. 러시아-1

“먼지로 뒤덮인 잔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안에서도 당신은 저희를 지켜 주었죠.”

담담하게 읊어 내려가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 안에, 슬픔이 들어 있다.

절제된 감정 안의 슬픔.

그리고 미약하게 느껴지는 그리움.

꿀꺽.

반주도 없다.

그저 중저음의 목소리만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온다.

분명 그것뿐인데, 대강당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김민준이 부르는 노래에 빠져든 것이다.

“우린 함께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볐죠. 당신이 걸어온 길 덕분에 우리가 있어요.”

가사 자체도 슬프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장본인이….

마치 그 상황을 겪어 본 듯했다.

“아….”

그게 아니면 이 정도의 감정을 녹여 낼 수가 없다.

곁에서 듣는 가수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을 다시 만나면 들려줄게요. 모든 이야기를요.”

약 3분간의 노래가 끝났다.

마이크를 내려놓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야. 이놈들 왜 울어?’

주위를 살펴보면, 훈련병들이며 가수들이며 다들 눈가를 닦고 있다.

그때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부르긴 했는데….

이게 울 정도였나?

짝짝짝짝짝.

아무 말 없이, 박수 소리만 울려 퍼진다.

“와…. 가수 하셔도 되겠어요….”

“노래 듣고 울어 본 적은 처음이에요.”

말문을 연 것은 아이돌 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소리 지르고 놀았는데, 다들 엄숙해진 상황.

“감사합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를 오래 끌 이유가 없다.

주머니를 뒤적여 휴가증을 몇 장 꺼냈다.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즐기는 훈련병들 2명에게 휴가증을 선물하겠다. 2일짜리 2장이다.”

“휴, 휴가?”

“우와아아아아!”

휴가라는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그럼 다시 달려 볼까요?”

“예에에에!”

“목소리가 작아요! 다시 달려 볼까요?”

“예에에에에!!”

그날.

아이돌의 위문 공연을 마지막으로, 7일간의 촬영이 끝났다.

**

김민준이 부대에 복귀한 지 3일이 지났다.

“어제 방송 나왔다고 했었나. 반응이 좋으려나 모르겠네.”

소대장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 문득 반응이 궁금해 스마트폰을 꺼냈다.

툭.

“아. 이거 버리는 걸 잊어버렸네.”

주머니에서 쪽지가 같이 딸려 나왔다.

촬영이 끝나고, 아이돌 멤버 한 명이 건네온 연락처였다.

PD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건 호의만 받아야지.’

사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시간 정도는 있다.

하물며 상대가 일반인도 아닌 아이돌 아닌가.

그럼에도 쪽지를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다.

‘일단은 별부터 달고 힘을 되찾는 게 먼저지.’

이스가르드에서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걸 알아차린 이상.

철저한 대비를 우선시할 생각이었다.

-김민준 씨! 대박입니다! 대박!

마침 PD에게 연락이 왔다.

시청자의 반응이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좋은 타이밍이었다.

-헌터군 훈련소 다큐멘터리 특집의 시청률은 무려 62%를 기록했습니다!

“62%나요?”

-예! 전설의 다큐멘터리 탄생입니다!

한때 방송계를 평정했던 ‘나는 야인’ 시리즈가 시청률 57%였을 텐데.

-하하하! 김민준 씨 덕분에 제 앞날이 창창해졌습니다. 물론 위쪽의 장군들께서도 굉장히 만족해하셨어요. 시청자들 반응도 좋고요.

저 방송 하나로 헌터군의 안 좋은 인식이 확 바뀌었다고 말했다.

세금을 미친 듯이 뜯어 가면서, 몬스터도 제대로 못 막아 낸다고 비난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인식이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이다.

-아! 거기다 김민준 씨를 대상으로 각종 광고를 진행하고 싶다는 업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혹시 생각 있으시면….

“그건 별생각 없네요.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렇군요. 헌터군이 할 일이 워낙 많아야죠!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시면 연락 주세요!

그 뒤로 짧은 이야기가 오갔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인지도가 꽤 올라갔다는 것.

방송을 접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 시대의 진정한 군인이라든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며 극찬을 쏟았다.

‘잘됐네.’

헌터군의 이미지도 바꾸고, 자신의 입지도 공고히 다져 나가고 있다.

헌터군에 저 정도의 기여를 했다면, 실적 점수 또한 적지 않을 터.

그야말로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다.

‘심심한 게 아쉽긴 하지.’

통화를 끊은 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강한 몬스터라든가.

아니면 초거대 게이트라든가.

요즘 들어 비상 상황이 터지지 않으니,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궁화부터는 진급하려면 혈귀 같은 애들을 팍팍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품을 하던 중, 연락이 왔다.

청와대 소속 국가 안보실장 신세현이었다.

-김민준 씨. 오랜만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얼마 전 방영한 다큐멘터리 잘 봤습니다. 시간이 그냥 훅 지나가 버리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 방송이 해외에도 방영된 걸 아십니까?

방송이 나가고 난 뒤.

러시아에서 자신을 콕 집어 언급했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 꼭 필요하다면서 말이다.

“러시아 헌터들은 고집이 되게 세다던데요.”

-그렇죠. 자기들이 가장 센 줄 아니까요. 실제로 강한 것도 맞기는 하지만.

불곰국이라 불리는 러시아.

상남자들의 나라라고 불리는 만큼 헌터들의 스펙이 높은 편이다.

신병들이 몬스터를 맨주먹으로 패고 다닐 정도였으니.

‘그런 나라가 도움을 요청해 온다 이거지.’

뭔가 싶어 물어보니, 일단 제안을 받아들여야 설명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해 왔다.

-보상은 확실할 겁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좋죠. 바로 가겠습니다.”

-하하. 화끈하시네요. 위쪽에는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아! 형식상 혼자 파병 나가는 건 안 되니, 헌터를 한 명 더 동행시켜야 할 겁니다.

“하사도 상관없죠?”

-물론이죠. 병 계급만 아니면 괜찮다고 합니다.

그럼 같이 갈 사람은 정해졌네.

김민준은 통화를 끝내자마자, 부대 밖으로 향했다.

“김서현. 나랑 러시아 갈 준비해. 1시간 안으로 간다.”

-흐윽…. 네. 김민준 님.

“뭐야. 너 울었냐?”

-흑…. TV에서 부르신 노래…. 그걸 들으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냐. 러시아는 춥다니까 두껍게 잘 입고.”

-네….

해외로 파병을 나가는 건 꽤 흔한 편이다.

특수 부대원들이 주로 해외 파병을 다녔으니까.

하지만 러시아로 파견을 나간 헌터는 지금까지 없다.

자신이 첫 사례라는 말이다.

‘냄새가 난다. 달달한 보상의 냄새가.’

**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 안.

“이 자료를 읽어 보시면 됩니다.”

신세형이 자신과 김서현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서류에는 러시아가 자신을 콕 집어 도움을 요청한 경위나 상황 등이 적혀 있었다.

“이야. 이거 참 신기하네.”

“네. 몬스터와 인간이 내통하고 있다는 건 세계 최초가 아닐까요.”

김서현이 신세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류를 다 내놓으라는 제스처.

“예.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하사치고는 다소 무례한 행동이다.

그럼에도, 신세형은 불쾌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녀가 김민준의 먼 친척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이 부분을 일차적으로 읽으시면 될 듯합니다.”

그녀는 받아 든 서류를 바로 김민준에게 넘겨주었다.

스윽, 슥.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만 강조해서.

“러시아에서 청소년들이 단체로 행방불명 됨. 그 수는 어림잡아 50명. 몬스터의 소행으로 추정됨.”

이게 1차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2차 보고서에는 몬스터가 헌터들에게 먼저 접촉해 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3차 보고서에는 몬스터와 러시아의 고위 관료가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놈들이 날 왜 불렀는지 알겠네.”

청소년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채찍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던전의 구조상 평범하게는 구해 낼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몬스터는 이레귤러로 추정되며,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지능을 가졌다라.”

구출 작전은 자체적으로 3회 수행했다.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터.

“인질로 잡힌 애들이 살아 있다 이거지.”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면, 몬스터에게 납치된 아이들이 전원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헌터들이 외부에서 건드렸는데도 가만히 두는 걸 보면….

분명 뭔가 목적이 있을 터.

“일단 안톤인지 뭔지. 이놈부터 털어 보면 나오겠지.”

러시아에서 자신을 부른 건 정답이었다.

몬스터와 내통하는 걸 알면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고위 관료, 안톤.

자신은 그놈의 정보를 빼낼 수 있었으니까.

“네가 한국의 헌터, 김민준이냐?”

공항에 도착하자, 러시아 헌터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들었다.

우락부락한 덩치와 사나운 인상들.

말투까지 화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무적 헌터 부대 소속 김민준 소령입니다.”

“우린 러시아의 특수 부대, 화이트 샤크의 헌터들이다.”

“이봐. 이 자식이 한국에서 그렇게 강하다며? 허풍 아니냐?”

대원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시비를 걸어왔다.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몬스터를 상대할 수냐 있겠냐며 말이다.

“러시아도 갈 때까지 갔어. 이딴 놈들한테 도움이나 받아야 하고.”

“거기 여자는 뭐냐? 꼴에 헌터라고 군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여헌터한테 도움받을 정도는 아니지.”

이제는 옆에 있는 김서현에게 험담을 퍼붓는다.

한국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부처님 같은 마음으로 러시아에 왔는데….

이러면 더 참을 이유가 없지.

“이봐! 당장 미샤 소령님에게 말하라고! 이놈들 다시 비행기에 던져 버리고….”

러시아 헌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따악!

“끄어어어억!”

딱밤 한 대.

김민준이 이마에 날린 딱밤 한 대에, 저 멀리 날아간 것이다.

몸무게만 130㎏에 달하는 저 곰 같은 덩치의 헌터가 말이다.

“다음. 불만 있는 사람은 앞으로.”

“방금은 우리 대원이 무방비하게 당해서….”

따악!

“끄아아악!”

“다음. 귀찮게 말로 하지 말고 몸으로 대화를 나누자고.”

“…….”

두 명의 거구가 날아가자, 화이트 샤크 대원들이 조용해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딱밤으로 날아갔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눈앞의 인간에게 개기면 안 되겠다는 것을.

“난 소령. 너네들은 기껏해야 소위나 중위. 먼저 건드린 것도 너네들이다. 오케이?”

“아, 알겠다….”

“말이 짧다? 나랑 스파링 한번 할래?”

“아닙니다!”

“옆에 있는 여헌터는 내 부소대장이다. 정중하게 사과하도록.”

“죄송합니다!”

대원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여 왔다.

이런 무식하고 거만한 놈들의 기강을 잡는 데에는 완력만 한 것이 없다.

애초에 말로 해서 들을 것 같지도 않았지만.

“아하하하하! 대단해!”

잠시 후.

공항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러시아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백색의 군복을 입은 여헌터였다.

계급장에는 붉은 줄이 세로로 두 개가 그어져 있다.

그 위에는 별이 하나 얹어져 있고.

저건 자신과 같은 계급인 소령이라는 뜻이다.

“흐음….”

그녀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입구 쪽에 널브러진 대원들은 관심도 없는 듯했다.

“뭐?”

이어진 그녀의 말에, 김민준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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