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손가락 하나
“어….”
“규혁 오빠. 갑자기 왜 정색하고 그래?”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
테이블에 정적이 흐르자, 나머지 여성들이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야. 곤란하다는 게 이놈 때문이냐?’
자신의 귓속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는 손은서.
‘그렇단 말이지.’
김민준은 여전히 불쾌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김규혁을 응시했다.
슥.
그리고 보란 듯이 손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야, 야! 갑자기 지금 뭐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크게 뜨는 손은서.
김민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규혁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초면인데 말이 좀 험하시네요. 전 은서랑 친구 하기로 했는데. 평소에도 이러고 놉니다.”
“그래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합니다.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그쪽 입장까지 신경 써 줘야 하는데요? 은서만 안 불편하면 됐지.”
“…….”
점점 과열되어 가는 분위기.
김규혁은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저, 저흰 잠시 규혁 오빠한테 갈게요.”
“저 오빠가 원래 욱하는 성격이 좀 있어서… 죄송해요.”
어느새 둘만 남게 된 테이블.
김민준은 과자를 한 움큼 집어먹으며, 손은서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하라는 의미로.
“하아. 저 사람 때문에 피곤해 죽겠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시작했다.
김규혁이라는 남자는 헌터군 부사관 출신으로,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한다.
“딱히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라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계속 들이대더라고.”
보통 같으면 사단장인 아버지가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만, 김규혁의 아버지와 손은서의 아버지는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김규혁을 은근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란다.
“내가 그거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쌍욕을 갈겼을걸.”
“그러니까 저놈을 떼어 내고 싶은데, 그게 곤란하다 이거지?”
“그래. 귀찮아 죽겠어. 대놓고 까톡 연락을 무시하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채.”
“내가 해결해 줄까?”
“뭐라고?”
자신만만한 김민준의 말에, 손은서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놈은 단기간에 병사에서 간부로 올라갈 만큼 괴물 같은 힘과 실력을 가졌지만, 성격 또한 괴팍했다.
마치 뒤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묘하게 싫다는 느낌은 안 들었지만.
“내가 저런 놈들 다루는 법을 알아서 그런다.”
김민준은 맡겨만 달라고 말하며, 김규혁이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아. 죄송해요.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여성들과, 김규혁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지, 말없이 물만 연달아 마셨다.
“김규혁 씨라고 하셨죠. 헌터군 부사관 하사.”
김민준은 그런 그를 쳐다보며,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렸다.
그리고 검지 하나를 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김규혁 씨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에 은서랑 얘기했는데, 약한 남자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네요. 그리고 최근에 헌터군 하사 한 명이 자꾸 들이대서, 불편하다네요.”
“예….”
“야, 야! 내가 언제….”
다급하게 팔을 휘젓는 손은서.
김민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랑 팔씨름 한판 하시죠. 전 손가락 하나만 쓰겠습니다. 절 이기시면, 이전에 했던 행동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고 손은서랑 거리를 두겠습니다. 대신 지면, 쟤한테 얼씬거리지 마세요.”
겉으로 보면 자신이 손은서를 도와주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과연 부사관 출신의 헌터가 얼마나 강할까라는 호기심 반.
나머지 반은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장난 좀 적당히 치시죠.”
“전 진지한데요? 아니면 손가락 하나도 이길 자신 없으세요?”
김민준은 대놓고 도발을 하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세계에서 생활하던 시절, 별별 인간 군상들을 다 만나 봤다.
저런 타입의 인간을 다루기에는,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하는 게 은근 잘 먹혔다.
“손가락 부러져도 모릅니다.”
순간 욱한 김규혁은 군복 상의를 탈의하고,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렸다.
그러자 굵직한 팔 위로, 꿈틀거리는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 대박. 은서야. 헌터군 하사 두 명이 너 놓고 신경전 한다. 이거 완전 드라마 아냐?”
“얘 은근 인기 많다니까. 남자친구 없다고 징징거리기만 하는 애 맞아?”
“아! 쫌! 조용해! 갑자기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건데! 김규혁 씨. 저놈 원래 저런 놈이니까 받아 주지 마요.”
손은서가 그러거나 말거나, 여성들은 재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전 손가락 하나만 쓰겠습니다. 힘드시면 두 팔을 쓰셔도 됩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김규혁은 으르렁거리며 김민준의 손가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우습게 보다니.
순간적으로 화가 나, 반대편으로 넘기는 걸 넘어 손가락을 꺾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뭐, 뭐야?”
그러나.
눈앞의 검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말이다.
“으아아아!”
“힘드시면 두 팔 쓰셔도 된다니까 그러네.”
급기야 기합까지 내지르면서 악을 쓰는 김규현.
김민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허억… 헉….”
10분 동안 안간힘을 쓰던 김규혁은, 결국 포기 선언을 하고 손을 뗐다.
‘무, 무슨 저런 놈이 다 있는 거냐!’
김민준 하사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최단기간에 이병에서 병장으로 연이어 승급한 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간부로 승격한 헌터.
솔직히 그 소문을 들었을 때는, 상당한 연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 한두 개로는 어림도 없고, 최소 세 개 이상 장성의 줄을 잡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김민준 하사가 단기간에 이룬 성과는, 아무리 유능한 헌터라도 불가능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럼… 그 소문이 다 진짜였다는 건가?’
훈련용 오크를 어깨 빵으로 죽여 버렸다든가, 이레귤러 몬스터를 단독으로 처리했다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죄송했습니다. 손은서 씨가 불편하다고 했으니,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
김규혁은 김민준에게 재빨리 머리를 숙인 뒤, 술집을 떠나갔다.
이 이상 말을 꺼내 봤자, 자기 얼굴에 침 뱉기였으니.
“우와…. 대박!”
“김규혁 오빠 힘 되게 세신데, 그걸 한 손가락으로 이기신 거예요?”
“김민준 씨 되게 터프하시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여성들이, 감탄사를 토해 냈다.
심지어 한 명은 물개 박수를 치기까지.
“야. 손은서. 이제 됐지? 난 간다.”
“어? 어….”
정작 김민준은 흥미가 식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저희랑 얘기 좀 더 해요.”
“그래요. 모처럼인데, 군대 얘기 좀 듣고 싶어요.”
“요즘 여자들도 군대 얘기 좋아하거든요.”
여성들은 김민준을 자리에 좀 더 잡아 두려 했다.
그의 시원한 성격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저 게임 하러 가야 해서요. 바쁩니다.”
“네?”
“게임이요?”
김민준은 대답 대신, 손은서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술집을 떠나갔다.
“…….”
순식간에 여자들만 남게 된 테이블.
손은서는 김민준의 뒷모습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봤지? 저놈 이상한 놈이라고.”
**
“음. 이봉구는 열심히 던전 찾아다니고 있고, 김서현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고.”
2박 3일의 휴가가 끝났다.
김민준은 부대에 복귀하기 전, 부하들에게 잠깐 들렀다.
김서현은 이 정도 속도라면 조만간 헌터 부사관 시험을 치를 수 있겠다고 말했다.
이봉구 역시 빠른 시일 내로 던전을 찾아내겠다고 말했고.
“아직까지 별 낌새는 없고.”
김서현에게 이전의 예지에 관해 물어보았지만, 그 뒤로 나타난 예지는 없다고 했다.
이스가르드에 대한 것들은 아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것보다 당장 내일부터 던전 공략 잡혀 있다는데, 거기에 신경 써야겠지.”
병사와 간부가 해야 할 역할은 다르다.
병사였을 때는 소대장의 지시에 따라 착실히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계급은 하사.
몬스터를 처리하는 역량도 중요하지만, 밑의 병사들을 이끄는 능력 또한 중요했다.
“내일 공략할 던전이나 공부해야겠네.”
그날.
김민준은 완벽한 공략을 위해, 던전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
**
“다들 주목!”
“주목!”
다음 날 아침.
2중대 2소대가 던전 공략을 위해, 연병장 앞으로 집합했다.
그들이 이번에 향할 던전은 폐쇄형 던전 중에서도, 이레귤러 몬스터가 출현한 곳이었다.
“야. 거길 1개 소대만으로 클리어하라고?”
“너무한 거 아니냐? 이레귤러 몬스터가 나온 곳은 최소 2개 소대로 공략해야 하잖아.”
“왠지 화염 방호복 입는다 했다. 어우.”
이레귤러라는 말에, 헌터들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교적 처리하기 쉬운 몬스터가 이레귤러가 되어도, 헌터들 입장에서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이레귤러 몬스터는 패턴 외의 행동을 자주 하기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자. 다들 긴장한 것 같은데, 이번에 출현한 이레귤러는 붉은 아귀 2마리다.”
“붉은 아귀 2마리입니까?”
“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김철민 중위의 말에, 헌터들이 안심했다.
붉은 아귀는 이레귤러 중에서도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편에 속했으니.
“자. 준비 다 끝났으면 출발할 수 있도록 한다.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던전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긴장을 놓지 마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헌터들은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뒤, 대열을 이루어 던전으로 향했다.
‘폐쇄형 던전에 붉은 아귀 2마리라. 이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던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봉쇄된 입구.
김민준은 무기와 함께, 방호복을 장비하는 병사들을 슥 훑었다.
‘화염 방호복 입고 1개 소대 정도면 무난하게 처리하겠는데.’
현재 병사들은 오렌지색을 띠고 있는 화염 방호복을 입고 있는 상태.
열 보호 성능이 뛰어난 저 방호복이 있다면, 붉은 아귀의 까다로운 화염 공격을 쉽게 대처할 수 있다.
“우린 되도록이면 저놈들이 잘해 내는지 지켜보자고.”
“하사 김민준. 알겠습니다.”
김철민 중위의 말에, 김민준은 병사들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두 마리 정도면 뭐. 딱히 내가 나설 것도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던전 안의 기척을 감지했다.
‘잠깐만.’
뭐가 이렇게 많이 잡혀?
분명 폐쇄형 던전에 있는 건 붉은 아귀 2마리가 끝이라고 했었는데.
김민준은 다시 한번, 던전 안을 스캔했다.
‘이야. 이놈들 재수도 없네.’
폐쇄형 던전 안에 존재하는 몬스터는 2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소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뭐야.”
현재 상황을 김철민 중위에게 보고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소대장은 김민준의 보고를 듣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